복음의 영광에 사로잡힌 안정규 선교사
주님은 제한받지 않으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시다.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은 실로 능력의 주님이시다. 시각 장애인 안정규 선교사(54)를 만나본 사람은 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01년 아프리카에 도착한지 10여년이 흐름 지금까지 주님은 그와 함께 계셨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볼 때 때로는 절망스러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신실하셨다. 잠깐 국내에 귀국한 그를 만나, 그동안 주님 손에 이끌려온 그의 삶을 들어본다.
– 시력을 언제 잃으셨나요?
“어릴 때 야맹증이 있었어요. 그러다 20대 후반에 우연히 병원에 갔다가 시력을 완전히 잃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죠. 더욱이 증세가 유전적인 원인 때문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참담했죠. ‘오함마’ 있잖아요. 큰 대형해머. 그것으로 가슴을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부모님을 찾아가 원망 섞인 투정도 하고, 방황의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 30대에 들면서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됐고, 5년 전부터는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됐어요. 지금 불빛이 비치는 곳을 바라보면 약간 흐릿한 뭔가가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상태예요.”
– 시력을 서서히 상실하는 과정을 온 몸으로 부대껴야 했던 시간을 어떻게 누리셨을지…주님의 은혜 아니면 극복하기 어려웠겠군요.
“시력을 잃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당시 아주 어려운 시간이었어요. 저는 당시 대학(연세대 경영학)을 졸업해, 아프리카를 상대로 무역을 했어요. 야망은 있었지만 경험은 부족할 때였죠. 덕분에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게 됐어요. 그러다 아주 곤경에 처하는 일을 경험하며, 도망가다시피 산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곤 외무고시를 준비했어요.
1차시험을 통과하고 2차 시험을 준비할 때 였어요. 그 무렵, 제 눈이 망막색소변성증이 있어 언젠가는 시력을 잃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 거죠. 모든 희망을 잃었죠. 그렇게 낙심한 상태였는데, 그런데 희안하게도 제 머리 속에서 ‘주께로 가까이’라는 찬송이 떠오르며 입으로 부르고 있는 거예요.”
– 당시 신앙생활을 하셨나요?
“유년 시절에 성당에 다닌 적은 있어도 교회에 나간적은 없어요. 아마도 성당에서도 같은 곡조로 가사를 달리 부르던 곡이 있어요. 그 영향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교회를 가자고 권유했어요. 아무 소망도 없는데,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더군요. 그래서 난생 처음 부흥회에 가게 됐어요. 카톨릭에서도 ‘방언’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막연하게 내게도 그런 외국어 방언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부흥회에 참석했어요. 그러나 3일째가 되던 날까지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문득 이렇게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라도 해야겠는데 할 수 있는 것은 ‘주여 삼창’밖에 없더군요. 난생 처음으로 ‘주여’ 그렇게 외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한번 두번, 그리고 세번째 ‘주여’를 외치는데 갑자기 뭔가가 저를 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순간적으로 ‘아!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그 분이 나의 주인이구나’ 그냥 믿어졌어요. 설명할 수도 없는데 그냥 믿어진 거예요. 당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할 때여서 그랬는지 ‘워즈 잇 로드’(Was it lord, 주님이셨군요)‘ 그렇게 입술에서 고백이 나오더군요.”
– 주님의 은혜로 주님을 만났다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군요.
“주님은 그때 또 이런 생각을 갖게 하셨어요. ‘만약 외교관이 된다면 나는 남북통일에 기여하겠다. 그러나 주님의 대사가 된다면 바로 선교사가 돼야겠다.’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그런 마음을 주님이 갖게 하셨지요. 예수를 믿자마자 선교사로 서원을 한 셈이에요(웃음). 그리고 주님은 머지않아 신학공부를 하도록 이끄셨어요.”
– 구체적으로 선교사로 방향을 결정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90년대 초반에 아세아연합신학대학과 성서침례신학원에서 신학공부를 했어요. 그때 아프리카 수단에서 한국으로 신학공부를 하러 온 스테판 형제를 알게 됐어요. 어느 날 아침, 그에게 기도제목을 나눠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가 이런 말을 했어요. ‘리비아의 가다피 대통령이 화학무기로 수단의 남부 기독교인을 죽이려고 한다. 고국에 있는 성도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내용이었어요.
제게는 충격이었죠. 간혹 성도들의 핍박에 관한 얘기를 듣기는 했어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실제적인 사실을 듣게 된 것은 처음이었죠. 그 기도제목이 절로 마음에 새겨지더군요. 오랫동안 주님이 그의 말을 가슴에 기억나게 하셨어요. 이밖에도 생활규모도 아주 선교지의 삶에 맞도록 조절해주셨어요. 선교지로 떠나기 직전인 90년대 후반에 구체적으로 선교지 체질로 바꿔주셨어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인지 선교사로서의 삶의 전환도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아요.”
– 선교지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은 언제였나요?
“90년대 중반에 당시 섬기던 교회의 전도사직을 사임하고 비즈니스를 통한 선교를 위해 동원사역과 현장 지원사역을 하게 됐어요. 그러다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수단의 한 난민촌을 방문했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10여년 전 고국의 성도를 위해 기도해달라던 스테판 형제를 만났어요. 서로 너무 놀랐죠. 다시 기도제목을 물어봤어요. 그는 환란 가운데 있는 남부 수단 성도들이 믿음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요청했어요.
10년 전이나 다름없는 기도제목이었어요. 그는 당시 조그만 순회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더군요. 와서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어요.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알고 순종했어요. 그렇게 주님이 이끄셨어요.”
– 그럼 처음에 신학교 사역으로 선교지에서 시작하셨나요?
“신학공부를 하면서도 복음에 대한 기초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오던 차 그런 요청을 받게됐어요. 국내에서도 한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경험이 있던 저는 그곳에서 복음을 나눴어요. 그러다 사역지를 케냐로 옮기게 됐어요. 그때 30년간 사역해온 한 외국 선교사가 아프리카는 변하지 않는다고 포기하고 철수했다는 말을 듣고 그럴 수는 없다는 강한 부담감으로 그곳에 가게 된 것이죠.”
– 복음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실제 경험하셨는지요.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나눴지만, 그들에게는 당장 빵과 물이 필요했어요. 그들에게 우물을 파주고 염소를 사주고, 빵을 나누고 한 해 두해 흘러가지만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역설적으로 복음 아니고는 어떤 대안도 없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 더욱 강하게 붙잡게 됐어요.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그리고 급기야 제 마음에 동역자들과도 연합할 수 없는 저의 실존에 대해 절망하는 시간을 갖게 됐어요.
국내에 돌아와 한 선교단체의 훈련을 받으며 이론적으로 알고 있던 십자가 복음 앞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경험을 하며 ‘죄 곧 나’라는 나의 실체를 인정하게 됐어요. 그리고 다시 아프리카로 갔어요.”
– 사역에 변화가 있었나요?
“그 이후 동역하는 현지인 목회자들에 대한 훈련과정에서 복음에 대한 저의 메시지가 더욱 강해지더군요. 달리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하게 알아가는 것이죠. 오직 복음 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죠. 주님이 원하시는 변화와 회복을 위해 필요한 유일한 대안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섬긴 현장에서 한 두 사람이 그 복음의 진리에 반응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십자가의 복음이 한 현지인 목회자의 입술에서 터져나왔어요. 정말 감동이었어요. 그의 그같은 고백 이후 다음 주일날 그 목회자가 집례하는 예배는 정말 감동이었어요. 로마스 6,7장을 본문으로 한 그 목사님의 설교는 마치 바울이 다시 되살아난 것 같은 열정과 감동을 성도들에게 안겨줬어요.”
– 확실한 증인의 말은 능력이 있다는 잠언의 말씀을 실감하게 되는군요.
“그 목사님 같은 증인이 세워지면서 주님은 전혀 예기치 않는 결과를 가져다 주시는 것 같았어요. 무슬림 전도가 본격화하고, 위기상태였던 가정의 부부가 회복되는 여러 건의 사례를 보게 됐어요.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멉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목회자들도 무척 많습니다. 이들도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돼요.”
– 기도제목과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나눠주세요.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이 뿌리 깊은 토속신앙 등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 영역에서 이들의 연약함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빵을 손에 쥐어주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복음 없이 빵만을 주는 것은 더욱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나누는 것과 함께 난민촌에서 주님이 만나게 하신 소수종족이나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늘어나고 있는 무슬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제가 무슬림과 기독교가 충돌하는 접경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것도 그런 부르심에 순종하고자 하는 이유 때문이기도 해요.”
그는 지금도 주님이 주시는 꿈을 꾸고 있다. 윤옥자 사모와 슬하에 중헌(20) 이은(18) 제리나(16)의 세 자녀들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주님이 이루실 그날의 영광을 꿈꾸며 오늘도 주의 얼굴을 구하고 있다.
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