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호 / 일상에서 만난 하나님]
나는 스스로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줄 알았다. 어릴 적부터 주님 일에 쓰임 받고 싶었고, 청년 때 선교사 헌신을 결단했다.
하나님이 나를 언제, 어디로 보내실지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러다 전문인 선교를 꿈꾸는 형제를 만나 결혼했고, 주님이 열방으로 우리를 불러주시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내가 꿈꿔왔던 선교사의 삶은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를 낳게 되면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육아의 시간이 펼쳐졌다.
주님께 더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가 그것을 가로막는 것만 같았다. 팍팍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그 무렵 주님은 ‘복음과 가정’이라는 훈련으로 나를 불러주셨다. 그 시간은 목마른 일상에 은혜가 쏟아지는 단비 같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어린 두 딸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는 모임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주님이 불러주신 자리이기에 떠날 수 없어 그냥 자리를 지키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내 안에서 소리 없이 일하고 계셨다.
아이 때문이라고 답답해 했는데…
지체들과 함께 복음을 나누고 기도하면서 존재적 죄인인 내 모습을 직면하게 됐다. 그동안 주님께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 아이들과 상황에 가로막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핑계로 주님 앞에 순종하고 싶지 않았던 내가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동안 난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주님 사랑하는 나를 자랑했던 것이었다.
복음의 포도즙 틀에서 터지고 짓눌리는 것 같은 시간들을 지나고 있을 때 주님이 말씀을 주셨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b), 내가 너의 상급이라(창 15:1)’ 주님은 이렇게 당신 자신을 내게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그리고 이전처럼 자신만만하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없는 내게 다시 찾아와 주셨다.
그동안 나는 선교사의 부르심을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는 존재적 부르심이었다. 주부로서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땅 끝에 있는 선교사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덮어놓고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 스스로 속은 것이었다.
주님을 오해했고, 내 마음은 주님을 향한 반역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복음 앞에 서면서 드러나게 된 내 실체다. 하지만 내 모습이 추악할수록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음의 농도가 그만큼 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님을 만나 변화된 존재는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과 동일한 삶을 살게 된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만 있을 뿐이다. 주님은 내게 이 일을 이루셨다. 복음 안에 있어 안전하고 기뻤다.
6개월간의 훈련이 끝나자 주님은 셋째 아이를 주셨다. 열방으로 불러주시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내게 ‘보내는 선교사’라는 새 이름도 주셨다. 다시 훈련이 시작되었고 일상은 더 분주해졌다. 여섯 살, 네 살, 5개월 된 세 딸과 함께 모임을 향해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이제 부르신 이 자리에서 ‘복음 곧 나, 나 곧 복음’이 되기까지 신실하게 일하실 주님이 기대된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말씀을 듣는 자리와 열방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가 내가 거할 곳이 되었다. 열방의 어느 곳으로 가게 될지, 지금 허락하신 장막 안에 언제까지 머물러야 할지는 내가 고민할 바가 아니다. 부르신 자리에서 시므온과 안나, 나다나엘처럼 주님을 기다릴 것이다. 이 세대가 가기 전에 나 역시 주님 만나기를 간절히 꿈꾼다. [GNPNEWS]
최다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