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베랴 바닷가의 베드로와도 같이 주님 없이 살 수 없음은 더더욱 실제 되게 하셨기에, 주님 세우신 이 자리에서 더욱 주님 향한 노래를 그치지 않을 것을 결정한다.
잘 가고 있는 줄 알았다. 적어도 두 번의 말씀 기도학교에 참석하기 전까지는. 나에겐 잘 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할 몇 가 지 이유들이 있었다. 완전한 복음 앞에 서서 지리산 자락 남원에서 광주로 전주로 타고 있는 차가 폐차 될 지경에 이르도록 여러 훈 련과정의 훈련생과 섬김이로 이삼년간 정말 빡세게 훈련을 받았다.
복음의 토양이 척박하 고 교회가 외면 받는 이 산촌에서 지역교회 성도들과 매주 화요중보기도회를 하고 느헤 미야기도 초창기부터 수차례 느헤미야가 되 어 기도회를 진행했으며, 한 선교단체 전주지 부에 동역간사로 섬기고, 또한 ‘원형교회회복 을위한목회자모임’에 지역 섬김이로도 섬기 고 있다. 고향인 경기도에서 전라도 산골로 내려온 지난 6년 동안 사례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지만, 한 눈 팔지 않고 욕심내지 않으 며 나름대로 열심히 목회했다. 겉으로 보기엔 누가 봐도 그 정도면 잘 가 고 있다고 인정했을 법 하다. 나 역시 그 정도 면 잘 가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것이 착 각이란 것을 안 것은 작년 11월 티앤알미션 이 마련한 2기 말씀기도학교에서였다.
2기 말씀기도학교에 참석하기 전, 그 주는 12월 초에 있을 일반복음학교 신청기간이었 다. 완전한 복음 앞에 서는 은혜를 입은 지 만 삼년 여! 이제 성도들에게 도전해야 할 때라 고 생각했다. 그동안 두루뭉술하게 상처받지 않을 선에서 적당히 권해 왔다면, 이제 좀 더 강력하게 총체적 복음 앞에 초청해야 할 때 라고 생각했다. 교회 내에 몇몇 임직자들과 복음학교에 꼭 가야한다고 생각한 지인들에 게 일일이 원서를 나누어주며 ‘당신은 꼭 가 야할 사람’이라고 참석할 것을 강권했다.
그 러나 단 한분도 지원하지 않았다. 말씀기도학교에 갈 때 즈음, 마음이 참 힘들 었다. ‘왜 그렇게들 반응하지 않는가! 왜 그렇 게들 믿음이 없는가! 이젠 정말 지친다. 복음 으로 결론 난(!) 나와 마음을 함께 할 수 없다 면,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안락을 위해선가? 그래, 이제 이 시골을 떠날 때가 되었나보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가 왔다고 생각하며, 말씀기도학교로 향했다. 성도들의 믿음 없음에 분개하며 참석했던 로마서 말씀기도학교에서, 주님은 정작 나 자 신의 믿음 없음을 보게 하셨다.
말씀으로 비 춰진 나 자신을 보게 되었을 때, ‘어~! 이게 뭐야!’ 첨엔 좀 당황스러웠다. 시간이 흐를수 록 그 당황스러움은 절망감으로 바뀌기 시 작했다. 말씀을 통해 드러난 나의 실상! 정말 완전한 절망이었다. ‘도대체 뭐야! 나 정말 아 무것도 아니었네!’ 꼭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문제는 바로 너야! 이 바보야!’ 아니,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다. ‘문제는 바로 너야!’ 그동안 믿음이 실제요 결론되었다고 떠들며 주위사람들에게 설레발치며 남을 비방하고 수군댔으나, 실상 진리가 내 삶에 실제 되고 결론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철저히 길들여지 고 익숙해져서 마치 실제 되고 결론 된 것처 럼 착각하고 있었던 나를 보게 하셨다.
말씀기도학교 둘째 날 오전 로마서 8장을 묵상할 때 주님은 나에게 회복을 허 락하셨다. “그래, 너! 어떠냐? 너의 믿음 없는 실상을 보았느냐? 너에게서 무슨 소망이 있느냐?” “오 주 님…” “이기현! 너! 잘 들어라! 그래 서 넌 내가 필요 한거야! 너로선 안 되기에 내가 필요한 거야! 내가 나의 핏 값으로 너를 샀는데…” ‘오 주여! 예, 아멘입니다.’ 엄청난 감격이었 다. 내가 마치 대단히 믿음 좋아서 잘 가고 있 다고 착각하던 나에게 주님 편에서의 일방적 인 은혜로 그 기회들을 허락하신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믿음을 가능케 하는 것은 나 의 어떠함이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임을, 또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그 은혜를 주님은 이미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셨음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지난 5월 중순 주님은 다시 한 번 말씀이 실제 되는 이 은혜의 자리로 초대하셨다. 아브 라함의 믿음의 여정을 중심으로 한 창세기 말씀기도학교! 가기 전 은근히 기대하는 마 음이 있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이라~! 옳거니, 이제는 주님이 나에게 잘 가고 있다 고 격려하시려는가보다!’ 그러나 웬걸! 또 다시 절망이었다. 로마서 때보다도 강도가 좀 더 셌다. 약속으로 출발 한 믿음의 여정이었으나 자신의 안정과 목숨 을 위해 곧바로 ‘마누라 장사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아브람! 나에게 실제 되지 않 고 결론된 말씀도 아니면서 그냥 한 주를 때 우기 위해 중 염불하듯 설교했던, 결국 내 안 정과 목숨을 위해 말씀을 이용하고 팔아먹는 ‘말씀 장사꾼’이었던 나!, 지속된 주님의 경고 앞에서도 끝내 그 땅을 향한 마음을 포기하 지 않던 롯! 끝끝내 이 땅을 향한 일말의 여 지를 포기하지 못하는 나!, 21장과 22장을 묵 상하면서는 ‘떠나보내야 할 이스마엘’과 ‘(하 나님께)드려야 할 이삭’.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는 나를 보게 하셨다. 그래서 이 두 여지로 인해 정작 마음 중심으 로는 단 한 번도 믿음의 여정을 떠나본 적이 없는 나! 잘 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출발도 못하고 있는 나를 보게 하셨다!
그날을 위해 달린다고 하면서도 그날이 나 에게 전혀 실제 될 수 없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몸뚱어리는 떠났으나 마음 중 심으론 단 한 번도 애굽을 떠나본 적 없는 출 애굽 1세대와 같이, 마음 중심으론 단 한 번 도 떠나보지 않았다. 그래서 실상 나그네(창 23:4)가 아니었고, 나그네가 아니니, 주님 다 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부가 될 수 없 었으며, 주님의 신부가 아니니, 당연히 그날 (창15:18)을 간절히 기다리며 싸우는 군사가 될 수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진리 앞에 드러난 나의 실상은 여전히 주님 께 드릴 것 없는 초라하고 볼품없는 빈 바구 니일 뿐이지만, 그러나 디베랴 바닷가의 베드 로와도 같이 주님 없이 살 수 없음은 더더욱 실제 되게 하셨기에, 주님 세우신 이 자리에 서 더욱 주님 향한 노래를 그치지 않을 것을 결정한다. ‘주여! 이 고백을 진정한 고백이 되 게 하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십자가만이 믿음 의 삶을 가능케 함을 믿습니다. 내 안에 주님 이 사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