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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욥이 가스라이팅 당한 거라고?

Unsplash의 Felix Mittermeier

“이거야 원, 하나님이 욥을 가스라이팅하는 거 같지 않아?”

욥기 38-41장을 본문으로 한 내 설교를 들은 친구가 이런 우려를 제기했다. 설교를 준비할 때만 해도 나는 이런 질문을 고려하지 않았지만, 오늘날 특히나 치료를 중시하는, 치료 문화에서 사는 한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는 항변이다.

나는 이 질문을 세 단계로 살펴보고 싶다. 첫째, 임상적 정신 건강 역학을 말씀에 적용하는 게 목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폭넓게 고려해 보겠다. 둘째, 가스라이팅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욥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놓고, 과연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을 선의로 매핑하는 게 가능한지를 살펴보겠다. 셋째, 욥기 속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살펴보고 욥이 하나님을 만난 사실을 표현하는 데에 “가스라이팅”이라는 딱지가 적절하지 않은 이유를 살펴보겠다.

목회적 고려

필립 리프가 ‘치료의 승리(The Triumph of the Therapeutic)’라고 부른 맥락에서 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꼭 알아야 할 몇 가지 핵심 역학이 있다.

첫째, 관계적 역학과 권력 역학은 초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다. 성경 속 인물을 “독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낙인찍는 것부터 시작해서 본문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 내적 동기를 찾아 행간의 의미까지 고려해서 읽는 것까지, 사람들은 마치 정신 상담 세션이 전개되는 장면을 보듯 성경 이야기를 대할 수 있다. C. S. 루이스의 말을 빌리자면, 이야기를 어린이 이야기로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심리학의 부재”가 아니던가? 오늘날 성인 독자들은 본문에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직관적으로 면밀하게 심리학적 관점을 적용해 가며 이야기를 읽는다.

둘째, 성경을 적용하고 또 설교할 때, 심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우리는 말씀에 드러난 사실을 훨씬 넘어서서 해석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말씀이 알려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원하기도 한다. 욥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하나님의 지혜로 인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셋째, 우리는 대중 심리학의 사고 과정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차세대는 엄청나게 온라인 상태이며, 그 상황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에게는 두 가지 옵션이 있다. 스스로도 엄청난 온라인 상태가 되거나, 아니면 과도한 온라인 상태인 사람들과의 실제 관계에 몰두함으로써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압도적 다수는 이미 디지털화 되어버린 자아감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의 언어를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맥락 파악에 실패할 것이다.

이것이 대중 치료적 세계관에 따라오는 전제를 있는 그대로 채택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에 우리가 “당신은 온라인에서 그렇게 들었겠지만, 나는 지금 당신에게 직접 말하고 있거든요.” 할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처럼 설교할 수 없다. 자,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욥에게 닥친 하나님과의 무서운 만남을 살펴보자.

폭풍우

점점 흔하게 사용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는 일부 학대 관계에 존재하는, “미친 짓”을 가능하도록 하는 어떤 작용을 말한다. 이 용어는 1944년 영화 ‘가스라이트’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영화에서 남편은 새 아내를 완전히 통제해서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과 판단을 의심하게 만든다. 급기야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는 더 이상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신이 상상 속에 살고 있다고까지 확신하는 상태가 된다.

욥의 서사를 보면, 선의를 가진 독자조차도 하나님이 고통 받는 욥을 다루는 방식에서 가스라이팅을 의심하도록 유혹하는 몇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

첫째, 분명한 권력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폭풍우 속에서 나타나 힘을 과시한다.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압도적인 은유를 담고 있는 땅과 별, 베헤못, 리워야단 등의 표현은 욥을 대화 속으로 참여시키려는 게 아니라, 도리어 침묵시키고 억압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이 모든 위대한 역사가 가능한 내게 네가 뭔데 감히 질문을 하는 거냐?

둘째, 그냥 별 생각 없이 읽으면, 하나님은 마치 자신의 정의와 공정성에 대해서 묻는 욥의 질문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욥의 진짜 불만이 묵살되거나 무시된 듯하다.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에 대화를 자신의 질문으로 돌리고 욥의 초라한 자질, 제한된 본성,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활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강조한다. 결국에 욥의 질문은 무효한 것으로 규정된다. 내가 가진 정신적 능력이 없는 네가 감히 내게 질문할 자격이 있느냐?

셋째, 하나님은 핵심 정보를 숨긴다. 욥은 욥기 1장에서 벌어진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거래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하나님은 왜 욥에게 그 모든 과정이 단지 테스트였다고 말하지 않는 걸까? 악한 사탄과 너의 의로움을 걸고 내기를 했고, 내가 이겼다고 왜 말하지 않는 걸까? 하나님이 욥이 알아야 할 모든 사실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데, 어떻게 욥이 남은 삶을 제대로 살 수 있겠는가? 욥은 지금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 같다.

어떤 남편이 하나님이 욥에게 하듯 아내와 대화한다면, 누구라도 아내를 지지하고 남편을 질책할 것이다. “내가 집에 월급을 벌어다 주는 사람인데, 지금 내 부주의에 대해서 불평하는 거야? SAT 점수가 나보다 500점이나 낮은 주제에 감히 아이들 교육 문제를 놓고 내게 우려를 제기하는 거야? 뭐? 내 위치를 추적하고 있다고? 네 일이나 똑바로 해!” 이런 남편은 아내를 심하게 통제하고 또 모욕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자,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변호할 수 있을까?

욥의 대면

먼저, 가스라이팅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자. 그것은 긴 시간을 두고 누군가가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정신 건강에 대해서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단 한 번 만나서 조종되거나 거짓말에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를 가스라이팅이라고 하지 않는다. 가스라이팅에는 패턴이 있다. 욥기 서사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적절한 의미에서의 가스라이팅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다. 하지만 Z 세대와 틱토커(TikToker)가 사용하는 의미에서 보면 어떨까? 이 경우에 가스라이팅은 오히려 조작이나 모호함의 동의어에 더 가깝다.

폭풍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는 위협이 아니라 계시이다. 욥기는 지혜의 책이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경건함, 존중, 마음 챙김에 관한 것이다. 새를 두려워하면 끊임없이 새를 살피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삶의 구석구석에서 그를 찾는다. 폭풍우는 강력하고 주의를 끈다. 주님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는 분명하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욥의 주된 고민과 질문은 묵살되기는커녕 하나님의 현존으로 응답되었다. 욥기의 전체 내용은 하나님께서 욥을 버리셨는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들으실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실지에 대한 질문과 씨름에 관한 것이다. 번개-눈-토네이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욥의 핵심 질문에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확실히 대답한다. 아니, 욥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 예, 저는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 이제 내가 네 질문에 대답하겠다.

하나님의 대답은 욥의 관점을 묵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관점을 맥락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언제 고통당했느냐?” “네가 겪은 일은 타당하지 않아.” 또는 심지어 “너는 틀렸어.” 하지 않는다. 욥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축복을 받는다. 욥을 향한 메시지의 핵심은 이것이다. “너는 유한한 존재야.” 욥이 여기서 새로운 정보를 얻은 건 아니다. 대신에 그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나는 귀로만 주를 들었지만, 이제는 눈으로 주를 봅니다”(욥 42:5).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욥의 질문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그의 믿음과 그 믿음을 자신의 고통에 대한 실제 경험과 조화시키려는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힌 욥은 비로소 자신의 경험을 리워야단을 붙잡고 있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이라는 맥락에서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의 무시무시한 힘조차도 주님에게는 애완 카나리아에 불과하다. 욥은 그 사실을 “알았다.” 이제 그는 그 모든 것을 다르게 “알았다.”

욥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경이로움과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하나님의 위엄이 드러내는 초월성을 다시 인식했다. 하나님에 대한 신학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근접성이 바뀌었기에, 그는 지혜를 키울 수 있었다.

이제 하나님이 사탄으로 하여금 욥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파괴하도록 내버려둔 내기에 관해서 당사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첫째,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욥에게 일어난 일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욥은 혼돈의 위대한 대리인인 리워야단이 여호와의 통제를 받는다고 들었다. 여호와는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진다.

둘째, 하나님은 욥에게 그가 살고 있는 현실과 씨름하는 데 필요한 관점을 보여준다. 그 결과 욥은 현실과 더욱 일치하며, 누군가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할 때처럼 현실과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면, 맑은 정신을 통해서만 우리는 모든 것을 관장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제대로 존중할 수 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참으로 지혜의 시작이다.

말씀의 학생들

성경을 읽을 때 처음에 가진 느낌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 우리가 본문 속으로 가져가는 건 사실상 내가 가진 사회학적 맥락과 신학적 전제가 포함된 우리 자신이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려는 유혹과 경향을 의식하고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욥을 학대하는 분이 아니다.

사실, 그 반대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는 욥을 혼돈과 혼란에서 현실로 초대하고, 그를 새롭게 축복한다.

욥의 슬픔은 여전하지만, 그가 제기한 핵심 질문(“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이 하나님의 현존으로 응답받을 때, 그를 괴롭히던 믿음의 위기는 어느새 녹아버린 눈처럼 사라진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Gaslighting Job

세스 트라우트(Seth Troutt) | 세스 트라우트(DMin,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는 Ironwood Church의 교육 목사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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