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이야기 (17)
파트모스 섬의 아픈 역사
파트모스(밧모 섬Patmos)는 에게 해의 그리스 섬으로, 도네까니시의 최북단에 있는 섬이다. 가장 가까운 섬은 사모스이다. 그리스 본토보다도 터키가 휠씬 가까운 곳이다.
파트모스는 작은 섬으로, 바위가 많고 대부분의 땅들은 불모지이다. 이 섬에 사람들이 살게 된 것은 고대 바다 건너 소아시아 지역의 라트모트 산에서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를 섬기던 사람들이 이 섬으로 이주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로마 시대에 이르러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유배의 섬으로 사용된다. 이때 사도 요한이 이곳으로 추방된 이후,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게 된다. 이후 10세기까지 이 섬은 에게 해의 대부분 섬들처럼 아랍 해적들에게 수없이 많은 약탈과 어려움을 겪는다. 11세기에 들어서는 이곳에 요한 수도원이 세워진다. 12세기와 13세기 이 시대에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서구세력에 약탈을 당하게 된다. 1453년 5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에 함락 당하자, 많은 난민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온다. 이때 기존의 주민들과 난민들이 지금의 호라 지역을 공동으로 세우게 된다.
사람들은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섬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해상 운송업과 해상무역에 의지했다. 이 지역을 주도하던 터키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일정한 세금을 지불하고, 그들의 마음을 사는 선물로 아슬아슬하게 평화와 안정을 추구할 수 있었다. 17세기에는 유명한 20년간의 크레타 공방전(1645-1669) 기간 동안 이 섬은 베네치아 해군 기지로 사용된다.
전쟁이 끝날 무렵 파트모스 섬은 크레타와 함께 터키에게 점령당한다. 1770년 산업혁명 기간 동안 파트모스는 러시아에 의해 점령되며 당시 인구조사에서 510가구와 2086명의 오늘날과 비슷한 규모의 주민이 살았다고 한다. 1832년 7월 9일 콘스탄티노플 조약 이후, 파트모스는 오스만 제국으로 다시 복속된다.
1912년 이탈리아인들이 이 섬을 점령했고, 1943년 파시즘이 붕괴될 때까지 이탈리아 부속 섬으로 남아있었다. 1947년 2월 10일 에게 해에서 모든 이탈리아 점령지와 함께 그리스에 통합된다.
슬픔의 역사보다는 천국의 비밀을 보여준 계시의 섬 밧모
형벌과 유배를 멍에 진 인사들이 찾아들었던 그래서 버려진 섬이었으나 이제는 귀한 천국의 비밀을 간직한 동경의 섬이 된 밧모이다. 그러나 그 땅으로 가는 길은 그 옛날 로마 시대의 뱃길이나, 초고속 유람선이 취항하는 오늘이나 순탄치 않은 것 같다.
![[김수길 칼럼] 천국의 비밀을 열어준 계시의 섬 밧모 1 250119 KSK island 2 1](https://gpnews.org/wp/wp-content/uploads/2025/01/250119_KSK_island-2_1.jpg)
아테네 외곽 피레우스 항구에서 약 열 시간의 밤 바닷길을 쉬지 않고 달려간 10층 높이의 카페리는 피곤한 닷을 잠시 동안 바다에 내려놓는다. 밧모의 새벽은 배 안에서 느끼지 못했던 심한 바람과 파도 소리로 옷 입고, 하품 속에 묻혀있던 순례자의 남은 졸음을 순식간에 빼앗아버린다. 다시 보니 이곳은 망망한 바다에 떠있는 손바닥만 한 땅이다.
섬의 남쪽에서 북쪽까지의 길이는 16킬로미터인데, 동서의 폭은 매우 불규칙하고 좁아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섬은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섬의 중심부에 위치한 스칼라 항구에서 요한 수도원을 지나는 폭은 1킬로미터가 되지 않는 작은 섬이다. 그러기에 바쁘지 않다면 걸어서 섬을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사도 요한 당시의 이곳은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만이 유배되어 채석장에서 강제 노동으로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여름날에는 물이 귀한 탓에 심한 갈증으로 겨울날에는 가릴 것 없는 벌거벗은 섬이기에 유배된 죄수들과 이들을 지키는 로마 군인 모두가 혹독한 추위에 떨어야 했다.
화산암으로 구성된 이곳은 약간의 밀과 포도 정도가 재배될 뿐 다른 모든 물품은 외부에서 반입되어 사용해야 하는 곳이다. 지금도 상주인구 약 2500명의 주민 대부분은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이나 관광객을 상대로 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섬 중심에 있는 요한 수도원 외 27개 크고 작은 수도원에 관련된 수도자들과 소수의 어부들이 주민의 전부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요한 수도원은 1088년 성 크리스투스 둘로스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 아르테미스 신전 터 위에다 세웠다. 요한 수도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도원 내부의 아이콘은 대부분 사도 요한의 사역과 생애에 대하여 그려져 있다. 오랜 시간이 흐름으로 인해 그림들의 색은 비록 흐려져 있지만 이곳이 사도 요한의 신앙을 기리는 곳이기에 그의 신앙 정신은 세월에 관계없이 지켜져 오고 있다.
![[김수길 칼럼] 천국의 비밀을 열어준 계시의 섬 밧모 2 250119 KSK island 3 1](https://gpnews.org/wp/wp-content/uploads/2025/01/250119_KSK_island-3_1.jpg)
요한 수도원에서 스칼라 항구로 내려오는 중턱에 사도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요한 계시 동굴이 있다. 동굴 입구에는 요한이 계시를 받아 불러주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는 요한의 신실한 제자 ‘푸로 코로스’와 요한의 그림이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붙어져 있다.
로마시대 채석장이었던 이곳은 동굴이라는 표현보다는 깊게 파인 바위 속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곳곳에 순례자들이 피워 놓은 향불과 촛불들이 동굴 속의 모습을 여과 없이 비쳐주는 동굴 작은 예배 실에서 조용히 기도해 본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의 심정으로 기도드리는 노년의 사도 요한의 음성이 살아 울리는 것 같아서 오랫동안 눈을 감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다시금 눈이 뜨여진다. 흐르는 나의 눈물로 다시금 기도드린다. 네! 주님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속히 오시옵소서! [복음기도신문]
![[김수길 칼럼] 바울의 환상속의 마케도니아 사람 3 kimsookil](https://gpnews.org/wp/wp-content/uploads/2024/09/kimsookil.jpg)
김수길 선교사 | 총신 신학대학원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GMS 선교사로 27년간 그리스에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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