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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조지아 시골에서 백악관까지

▲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위키피디아

1976년 대선에 출마한 지미 카터는 무심코 자신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언급했다. 기독교 우파와 “복음주의 정치”가 부상하기 전 시대였고, 카터의 발언은 기자들로 하여금 “거듭났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만들었다.

로마가톨릭교도였던 알 스미스와 존 F. 케네디가 대선에 출마했던 1928년과 1960년을 제외하면, 유권자들이 후보자의 종교에 대해서 궁금증을 보인 대목은 후보가 속한 주류 교파가 어디인지가 전부였다. 종교가 사적인 문제로 여겨졌던 시대에 자신을 “거듭났다”라고 묘사한 건 굳이 유권자에게 밝힐 필요가 없는 지나친 정보였다.

‘거듭난’에 관해서 면밀하게 조사를 한 NBC Nightly News의 존 챈슬러는 어색하게 방송을 시작하며 당황했을 시청자들에게 나름 위로가 섞인 설명을 더했다. “우리는 카터의 심오한 경험이 반영된 그 말에 대한 종교적 의미를 확인했습니다. 침례교도라면 누구나 다 경험하는 수준의 평범한 고백이라고 합니다. 결코 비정상적인 건 아닙니다.”

카터의 출마는 복음주의에 대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뉴스위크는 1976년을 “복음주의의 해”라고 불렀다.

카터가 10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공개 장례식은 1월 9일 목요일 오전 10시에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거행됐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조지아 플레인스로 옮겨져 그가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마라나타 침례교회에서 비공개 예배가 진행되고, 1월 9일 오후 5시 20분에 조지아 주에 있는 가족묘지 아내 옆에 안장되었다.

저명한 침례교도들 사이에서 카터의 삶과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한 반응은 엇갈린다. 데이비드 도커리는 흥미로운 역사적 일화를 발표했고, 앨 모흘러는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 글은 카터를 선출한 워터게이트 이후의 미국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를 거부한 기독교 우파가 어떻게 미국 역사 속에서 부상했는가를 추적할 것이다.

침례교 뿌리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는 1924년 10월 1일 조지아 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미국 대통령으로 단임(1977-81)에 그쳤지만,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직 대통령 경력을 쌓았고 자신의 취임 40주년에 살아 있었던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카터의 어머니 베시 릴리언은 간호사였고, 아버지 제임스 얼 카터 시니어는 사업가이자 농부였다. 카터의 부모는 명목상 교인에 불과했지만, 지미와 그의 형제자매, 글로리아와 루스가 플레인스 침례교회에 빠지지 않도록 확실하게 감시했다.

이 교회는 카터의 성장기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주일 아침과 저녁에 주일학교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Royal Ambassadors라는 주중에 활동하는 소년 선교 훈련 기관에 가입했다. 11세에 신앙을 고백한 후, 카터는 세례를 받고 정식 교회 회원이 되었다.

플레인스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한 카터는 1946년 졸업 후 장교로 임관했다. 그리고 같은 고향 출신인 로잘린 스미스와 결혼했다. 1953년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후, 카터는 해군을 떠나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 후 13년 동안 카터 부부는 사업을 운영했다. 지미는 운영과 함께 대부분의 육체노동을 했고, 로잘린은 장부를 관리했다.

부부는 플레인스 침례교회에서 다시 활발하게 활동했고, 지미는 중학교 부서장이자 집사로서 봉사했다.

정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헌신

카터의 종교 활동을 특징짓는 핵심은 인종 차별 반대였다. 그런 카터의 생각은 이웃, 고객, 그리고 동료 집사들과의 갈등을 의미했다. 어느 날 빌리 그레이엄 복음전도협회가 인근 아메리커스에 있는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할 계획을 세웠지만, 협회가 흑인과 분리된 좌석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인 지지자들은 참석을 거부했다. 그 소식을 들은 카터는 지역 조직 위원회 의장을 자원했고, 영화 상영은 19세기 이후 조지아 섬터카운티에서 개최된 최초의 백인과 흑인을 구분하지 않은 모임이 되었다.

당시 카터의 인종에 대한 견해는 적절한 수준의 진보적이라는 게 가장 맞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의에 대한 그의 깊은 기독교적 헌신에서 비롯되었다. 60년대 초반에 그는 더 큰 공직을 원했다. 1962년에 조지아 상원에서 자신의 지역구 의석에 출마했다. 그는 승리했고 1964년에는 재선에도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1966년 처음 출마한 주지사 선거에서는 예비 선거에서 3위를 차지했다.

영적 재각성

힘겨운 선거 운동을 마친 카터는 길지 않았던 정치 경력을 끝내면 어떨까를 고민하는 동시에 일종의 영적 위기에 빠졌다. 심지어 그로 하여금 애초에 공직에 나가도록 동기를 부여한 기독교적 헌신에까지 의문을 품었다. 여동생 루스 카터 스테이플턴이 이 기간에 그의 친구이자 영적 카운슬러의 역할을 했다. 루스 자신도 1959년에 기독교에 재헌신했고, 그 결과 그녀는 전도사가 되었다.

카터는 동생과 똑같은 체험을 갈망했다. 그는 자신이 주지사가 되기 위해 조지아 주를 횡단하며 약 30만 명의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와는 대조적으로 플레인스로 돌아온 이후, 지난 몇 년 통틀어서 1년에 딱 두 번 교회에 가서 약 140명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한 게 다라는 사실을 생각했다.

대략 이 무렵에 카터는,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는 세상에서 산다면, 당신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유죄 판결이 내려질 만큼 충분한 증거가 있는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다. 이 질문은 카터를 괴롭혔다. 자신이 그리스도께 완전히 헌신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는 그토록 갈망하던 재헌신을 경험했고, 1967년과 1968년에 남침례교 국내선교부(Southern Baptist Home Mission Board, 현재는 North American Mission Board로 알려짐)가 후원하는 단기 선교 여행을 떠났다. 펜실베이니아와 매사추세츠에서는 집집마다 다니며 그리스도를 증언했고,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의 빈곤에 시달리는 푸에르토리코 지역에서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봉사했다. 카터는 또한 정기적으로 가정 예배와 함께 성경 읽기를 실행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최고의 정치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헌신했다.

1970년에 주지사 선거에 다시 출마해서 승리한 그는 재선에까지 성공했다. 주지사로서 그는 조지아 침례교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초상화를 의사당 건물에 거는 행사를 진행함으로 온건 진보를 표방하는 인종적 관점을 다시 표면화시켰다. 이 행사에서는 KKK단이 시위를 벌였고, 흑백 혼혈 합창단은 “우리는 극복할 것이다”를 불렀다.

거듭난 후보

주지사로 재임하는 동안 카터는 민주당 내 리더십을 확장해 나갔다. 처음에는 민주당 주지사 선거 위원회 위원장으로, 다음에는 민주당 전국 위원회 선거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 이후, 카터는 자신이 표류하는 미국의 도덕적 질서를 회복할 적임자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닉슨이 사임하고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은 1974년 후반에 그는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출마를 결정한 당시, 그의 미국 내 인지도는 2퍼센트에 불과했다. 하지만 주지사 선거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지칠 줄 모르고 낙관적인 선거 운동을 통해 카터는 후보 지명을 획득했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내걸었다.

카터의 상대는 현직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였다. 스피로 애그뉴가 사임한 후 닉슨으로부터 부통령 낙점을 받은 포드는 아직까지도 미국 역사상 투표가 아닌 방식으로 부통령 그리고 대통령까지 선출된 유일한 인물이다. 포드가 행정부에 들어온 건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닉슨 대통령이 남긴 오명의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서 불명예스러운 대통령, 닉슨을 사면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에까지 먹칠을 했다. 대통령의 사면 결정이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국가의 회복에 도움을 준다고 여겨지지만, 당시에만 해도 인기가 없었다.

카터는 시종일관 압도적으로 포드를 앞섰지만, 선거 후반에 경포르노 음란 잡지인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로 인해서 포드에 대해서 갖고 있던 상당한 우위를 거의 다 날릴 정도로 상당수의 표를 깎아먹었다. 복음주의자들이 주로 정치 후보자의 개인적 도덕성을 중요시하던 시대에 음란 잡지와의 인터뷰는 카터를 지지하던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고 격노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카터의 인기에 피해를 주는 일이 선거 이틀 전에 발생했는데, 플레인스 침례교회 예배에 참석하려던 흑인 목사가 입장을 금지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카터는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76년에 복음주의자들의 투표는 카터와 포드로 양분되었지만, 그럼에도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백악관에 복음주의자가 들어갔다는 사실로 기뻐했다. 그들의 생애 전체를 통틀어서 카터는 자신을 “거듭났다”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복잡한 사회 관점

하지만 카터가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만큼 보수적인 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신학적으로도 말이다. 그가 존경한 신학자는 라인홀드 니버였고, 그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또 사회적 필요에 따라서 가끔 술도 마셨다. 무엇보다 그의 도덕적 신념은 주류 좌파의 입장과 일치했다.

예를 들어, 그는 동성애 라이프스타일에 반대한다고 말했지만(그는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바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게이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다. 카터의 행정부가 가족에 대한 대규모 콘퍼런스를 조직했을 때,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하는 바람에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참석자들은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낙태에도 반대했지만, 로 대 웨이드(1973) 판결을 국가법으로 지지했다. 또한 정교분리에 대한 침례교적 견해는 그로 하여금 공립학교의 단체 기도에도 반대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카터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반발을 촉발한 사건은 따로 있었다. 인종간 데이트를 금지한 사실을 근거로 밥 존스 대학(BJU)의 세금 면제 지위를 박탈하려는 미국 국세청(IRS)의 시도를 카터 행정부가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IRS는 1975년에 처음으로 BJU를 공격했고, 1978년에 들어서는 사실상 인종 차별을 하는 사립학교의 세금 면제 지위를 박탈하려는 노력을 확대했다. 이는 남부의 많은 복음주의 단체가 연방 정부가 의무화한 공립학교 통합에 저항하기 위해 기독교식 “분리주의(인종차별) 아카데미”를 열면서 발생했다.

공화당의 핵심 활동가이자 기독교 우파 조직자인 폴 와이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 공동체를 고무시킨 것은 낙태, 학교 기도, 또는 ERA(평등권 수정안)가 아니었다. …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정작 그들의 마음을 바꾼 것은 지미 카터였다. 그가 기독교 학교에 개입하여 소위 사실상의 분리주의를 근거로 그들의 세금 면제 지위를 박탈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와이리히는 ERA, 낙태 및 학교 내 기도 결정,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성교육 및 세속적 인본주의의 다른 모든 영향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복음주의자들이 사립학교를 이용하는 게 가능하다고 믿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정부가 그런 학교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더 이상 개인 차원에서 하는 반대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터에 대한 그들의 환멸은 정부가 전통적인 기독교 도덕에 적대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믿었던 복음주의 대통령의 행정부가 바로 그 문제의 일부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종 문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답은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것이었다.

원인이 무엇이든, 카터가 제리 폴웰, 팻 로버트슨, 제임스 돕슨 및 1세대 기독교 우파의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복음주의자라는 것이 분명했다.

카터는 기독교 우파보다는 복음주의 좌파와 훨씬 더 일치하는 견해를 가진 사회 정의 복음주의자였다. 게다가 그는 제사장보다는 예언자 쪽에 가까운 시민 종교의 소유자였다. 제사장적 시민 종교가 미국을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국가로 축복한다면, 예언자적 시민 종교는 인종 차별, 빈곤, 과도한 군사력 사용이라는 죄악을 저지르는 미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한다. 인권을 외교 정책의 중심으로 삼았던 카터의 시도는 군사력이라는 위협을 사용하여 미국이 공산주의의 악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기독교 냉전 전사(Christian Cold Warrior)의 외교 정책과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카터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1978년 9월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과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를 캠프 데이비드의 대통령 휴양지로 불러 이룩한 외교 성과였다. 세 지도자는 당시 엄청난 희망이 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했다.

사회적인 정의와 평화의 추구와는 달리 개인의 성경적 도덕성을 보호하거나 증진하는 데에 있어서는 정부가 가급적 간섭을 줄여야 한다는 게 카터의 생각이었다.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이용해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을 꺼려했던 카터에 관해서 그의 행정부 관리였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지미 카터는 역대 대통령 중 그 누구보다도 성경에 해박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성경 구절을 덜 인용했다.”

신뢰의 위기

1980년 재선에 도전한 카터에게 복음주의자들의 불만은 그가 직면한 도전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미국은 포스트 베트남 전쟁, 포스트 워터게이트라는 침체기에 있었다. 이자율이 거의 13퍼센트까지 상승했고 연간 인플레이션은 그보다도 더 높았다. 경제적 어려움을 에너지 위기로 포장한 카터는 이 모든 상황을 “신뢰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대중적으로 ‘지루한 연설(Malaise Speech)’로 널리 알려진 텔레비전 연설로 알려진 말인데, 카터가 실제로 이 단어를 사용한 건 아니었다.

카터에게 닥친 최악은 테헤란에서 이슬람 혁명가들에게 52명의 미국인이 인질로 잡힌 그의 임기 마지막 1년에 닥쳤다. 이란의 미국 대사관 공격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출마를 선언했고, 민주당 후보 지명을 놓고 카터와의 경쟁에 돌입했다.

한편 복음주의자들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을 자신들의 이상적인 후보라고 생각했다. 그는 소규모 정부, 자유 시장 원칙을 지지했고, 미국이 군사력을 통해 자유를 보호하고 증진하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국가라는 믿음에 따라 기독교 냉전적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공화당은 로 대 웨이드 사건과 낙태에 대한 선택의 자유에 반대하는 입장까지 공식적으로 밝혔다. 제리 폴웰 시니어의 도덕적 다수파와 팀 라헤이의 종교 원탁회의와 같은 초기 기독교 우파 조직은 레이건이 표방하는 시민 종교 브랜드에 열광했다.

활발한 전직 대통령 시절

카터는 1932년 허버트 후버 이후 재선에 실패한 최초의 현직 대통령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이야말로 20세기 최고의 전직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은퇴라는 일몰로 사라지기는커녕, 카터의 전임 대통령 기간은 그의 성인 인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정의, 민주주의, 인권을 위해서 전 세계를 누비는 대사로서 카터는 39개국에서 100회가 넘는 선거에 참관인으로 활동했다.

2002년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노벨 위원회는 수상 이유로 “국제 갈등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을 찾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발전시키고,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수십 년간의 끊임없는 노력”을 꼽았다. 그의 가장 눈에 띄는, 아니 가장 중요한 사회 정의를 위한 활동 중 하나는 친구이자 조지아 출신인 밀러드 풀러가 설립한 해비타드 운동(Habitat for Humanity)과 함께한 것이다. 카터는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해비타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기금을 모금했다. 그리고 매년 한 번 우리는 저녁 뉴스를 통해서 세계 어딘가의 해비타드 건설 프로젝트에서 망치를 휘두르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해비타드만큼 눈에 띄는 건 아니지만, 그는 카터 센터에서 더 중요한 작업을 진행했다. 지미와 로잘린이 공동으로 설립한 이 센터는 공식적으로 “인권과 인간 고통 완화”에 전념하고 있으며 80개국 이상에서 “갈등을 해결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증진하고, 질병을 예방하고,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 활동을 해왔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카터는 자신의 삶의 모토가 된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 말은 오늘도 ​​카터 센터 웹사이트에서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고통을 완화하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 평화를 위해 함께 일하겠다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From Plains to the White House: Jimmy Carter’s Legacy for Evangelicals

배리 행킨스 Barry Hankins | 배리 행킨스(PhD, Kansas State University)는 Baylor University의 역사학 교수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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