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호 | 마음의 눈을 밝히사 (92)
‘믿음’은 자칫 오해를 불러오기 쉬운 개념이다. 때문에 먼저 성경을 통해 믿음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좋다. 믿음, 신뢰, 확신, 의지함 등은 종종 같은 뜻으로 쓰인다.
진실한 믿음은 각자 개인의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명백한 객관적 ‘사실’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의자에 앉는 것은 그 의자가 몸을 지탱해 주리라는 객관적 사실 때문이다. 그 사실이 확인된 의자는 신뢰를 받는다. 그 의자에 대해 특별한 느낌이나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의자가 튼튼한지를 잠깐 살펴보고, 견고하다는 사실에 확신이 있을 때 의자에 앉는다. 이와 같이 아브람의 믿음은 ‘사실’에 근거를 두었다. 그에게 사실이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문제는 믿음의 분량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달려 있다. 아브람의 믿음도 처음부터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침내 하나님께 대한 견고한 뿌리를 내렸다.
성경적으로 볼 때, 믿음이란 어떤 사실에 관해 이성적으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의의 수준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이 설 때 갖게 되는 것이다. 동의의 수준은 아직 진정한 믿음과는 거리가 있다.
믿음의 수준을 설명하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두 친구가 놀이동산에 놀러 갔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물었다. “저 청룡열차가 궤도에서 탈선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니?” 다른 친구가 대답했다. “응, 믿고말고!” 그러자 먼저 물었던 친구가 제안했다. “좋아, 그럼 우리 한번 타보자.” 이때 만일 다른 친구가 자기는 타지 않겠노라고 한다면, 그가 정말 믿고 있는지를 의심해 봐야 한다. 그는 그 사실에 대해 단지 생각으로 동의만 할 뿐이지, 마음 속으로 확신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믿음은 그 증거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려는 요점은 믿음이 바로 행동을 지배한다는 단순한 논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아브람의 믿음은 이성적으로 동의하는 차원 이상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자신의 목숨과 명성의 모든 것을 걸었다. 아브람은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해서 목적지를 알지 못한 채로 떠날 수 있었다. 아브람은 바로 그 믿음 때문에 희생 제사를 드렸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 주실 것을 믿었다.
아브람의 순종은 그의 믿음의 진실성을 내보이기 위한 과장된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아브람의 순종은 그의 믿음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타났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라는 말씀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 후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의 이름을 ‘많은 나라의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라함’으로, 그리고 ‘사래’의 이름 역시 ‘많은 나라의 어머니’를 뜻하는 ‘사라’로 바꾸어 주셨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 새 이름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이 반드시 지켜질 것을 보여 주시는 또 다른 표현이었다. [복음기도신문]
엠마오 길에서 만난 사람
(죤 크로스.엔티엠 출판부. 2006)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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