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는 목적이 있다.
올해 여름만 해도 나는 두 살 된 딸을 수천 번이나 익사의 위기로부터 구했다. 딸애는 수영을 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 수영을 못 한다. 불안함 자체가 없는 건 딸에게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다. 수영장에 갈 때마다 딸애는 그냥 물로 뛰어들고 내가 두 손으로 잡아줄 때까지 물속에서 마구 허우적거린다. 그런데도 물속에서 끄집어낸 얼굴에는 언제나 즐거운 미소가 가득하다. 말 그대로 무지가 주는 행복이다. 하지만 우리 딸은 불안하지 않아도 된다. 아빠인 내가 충분히 불안해하니까.
요즘 들어서 불안은 나쁜 평판을 받는다. 본질적으로 아예 부정적인 용어로 여겨진다. 코이네 그리스어 단어 merimna는 “불안” “걱정” “관심” 또는 “부당한 관심”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존중에 근거한 경계를 묘사하는, 부정적, 긍정적 또는 중립적일 수도 있는 단어이다.
자격증을 가진 치료사인 내 친구는 정기적으로 “불안”을 가진 사람들의 방문을 받는다. 상담의 첫 번째 단계는 구체적인 자기 평가라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 불안에 어떤 질서(order)가 있는지 아니면 무질서한지를 분별하도록 돕는다. 일반화된 불안장애(anxiety disorder)나 공황장애와 같은 불안 관련 장애의 존재는 실제로 어떤 질서가 있는 불안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임상적으로 무질서한 불안인 불안장애는 혼자 감당하기 힘든 짐이다. 목사, 정신과 의사, 그리고 친구로 구성된 전체 팀이 구체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갈 6:2). 이 글은 정신 질환이나 그 치료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삶에서 질서 있는 불안이 어떻게 보이고 느껴지는에 관한 글이다.
거룩한 이유로 생기는 불안
사도 바울은 merimna라는 용어와 그 파생어를 아홉 번 사용했는데, 대부분 긍정적인 의미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7:32-34을 보자.
나는 여러분이 염려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쓰게 되므로, 마음이 나뉘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나 처녀는, 몸과 영을 거룩하게 하려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씁니다.
염려(불안)의 역할이 무엇인가? 여기서 염려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기쁘게 하도록 활력을 불어넣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다. 또한 “주님의 일”에 대해 근심하는 것은 몸과 영으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염려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때, 바울은 상호 경쟁하는 불안 요소가 어떻게 한마음으로 행동할 자유를 방해하는지를 보여준다. 미혼자는 사역에 대해 한마음이지만, 기혼자의 관심사는 올바르게 나뉜다. 배우자를 기쁘게 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은 좋고 또 옳은 일이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 용어를 두 번 사용한다. 첫 번째로 바울은 디모데를 위대한 목사로 묘사한다.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빌 2:20). 이 용법은 고린도전서 12:25에서 바울이 교회를 향해 연합하여 “지체들이 서로 염려하도록” 하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불안은 보살핌 또는 관심과 동의어이다. 빌립보서에서 두 번째로 사용된 용법은 유명하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
“염려”라는 단어의 이 두 가지 용법이 어떻게 함께 사용될까? 우리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게 바울의 바람인가? 불교도처럼 열반을 추구하기 위해서 아예 욕망의 불꽃을 끄라는 것인가? 아니다. 바울은 “불안 속에 앉아 있거나 불안에 마비되지 말고 감사와 기도로 주님께 가져오라” 말한다.
빌립보서 4:6에서 사용된 불안은 누가복음 12:25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비슷하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 수명을 한 시간이라도 더할 수 있느냐?”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의 수명을 몇 시간이라도 더할 수 있다. 따라서 수명 걱정은 감정적 에너지 낭비에 불과하다. 그런 불안이 있다면, 당신은 생명의 주인을 붙잡기 위해 더 기도해야 한다.
지역 교회를 향한 목회적 불안
불안을 짊어지고 산다고 해서 돈이 드는 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부담을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고후 11:28). 아니, 바울은 교회를 돌보시는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건가? 바울은 “지옥의 문이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건가? 주권자이신 주님이 결코 잠들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건가?
지역 교회가 연약하다는 사실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냉정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을 닫는 교회가 생긴다. 장로들은 분열되고 파열음을 낸다. 교회 분열은 예배 자체를 황폐화시킨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단 번에 성도에게 전해진 복음을 버리고 믿음의 난파선에 승선하는 목사들이 출현한다. 하나님 나라는 흔들리지 않지만 지역 교회는 흔들린다. 그게 현실이다. 바울은 염려하는 건 교회 그 자체가 아니다. 그는 모든 지역 교회에 대해서 염려한다.
약 십 년 전에 내 멘토 중 한 사람이 사역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 사실은 나를 괴롭혔다. 몇 달 후, 그는 다행히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와 점심을 먹으면서 내가 물었다. “나도 당신처럼 될까 봐 걱정이에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한 건데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음, 그건 공격적인 질문이라서 아직 대답할 준비가 안 됐어요.” 그러고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나는 내가 믿음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상상한 적도 없어요. 그러니까 불안한 적이 없었지요. 하지만 당신은 다르네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서 걱정한다는 건 좋은 신호예요. 그러니 계속 불안해하세요, 그게 더 좋겠지요?”
이것은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을 살피십시오. 이런 일을 계속하십시오”(딤전 4:16). 도덕적으로나 교리적으로 나도 얼마든지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음에 대한 염려를 멈추는 순간, 나 자신에 대한 면밀히 관찰도 같이 멈출 것이다.
불안 없는 리더십이 항상 건강한 건 아니다
차별화된 자아감을 통해 불안하지 않은 존재감을 추구하는 것은 가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 때, 나는 다른 사람의 승인이 필요하지 않다. 확신을 가지고 살면서 내 삶을 주도적으로 리드할 수 있다. 과도한 책임이라는 메시아 콤플렉스에도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목사들을 유혹하는 저급한 자기애는 내가 사실상 신경도 쓰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기 위해 마치 불안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고자, 차별화의 개념을 사용할 수도 있다. 굳은살이 박인 마음은 필연적으로 불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불안하지 않은 건 아마도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어쩌면 아예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불안하지 않은 건 아마도 경험이 많고 이미 다각도로 검증되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사실은 거만하고 교만하기 때문은 아닐까? 불안하지 않은 건 아마도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어쩌면 기관의 취약성에 대해 지나치게 나이브해서가 아닐까?
불안을 피하거나 억누르기보다는, 질서 있는 불안을 일으키는 서로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고 해도 다시금 그분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수영장 아기처럼 불안을 모르는 건 자산이 아니라 부채이다. [복음기도신문]
세스 트라우트 Seth Troutt | 세스 트라우트(DMin,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는 Ironwood Church의 교육 목사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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