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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GTK 칼럼] 다른 이름(4): 지식없는 열심의 위험성

unsplash의 Olga DeLawrence

건강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 자체가 끝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다루는 목자의 신실한 가르침 아래 있는 것은 축복이자 특권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축복이 주님과의 관계 가운데 진전 없는 안일함으로 나아가게 해서는 결코 안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이러한 위험을 일깨워주는 좋은 예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함이라”(롬 10:1). 바울은 여기에서 이방인을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스라엘은 주께로부터 구약성경을 받은 백성이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던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믿었다. 신약이 완성되기 전, 그들은 주께서 계시하신 성경의 유일한 소유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으로서 그들은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영적인 빛 안에 거한 민족이었다.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롬 9:4).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이는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의 변질에 대해 책망하셨다. 심지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걸어가실 때에, 그를 두고 눈물을 흘리는 직업적 상()녀들에게 돌아서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변절자로 보았다. 그들은 구약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 의미를 잘못 해석하여 결국은 성경의 진리를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왜곡 시켜버렸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결국, 종교적인 열정이 아무리 에너지가 넘치고 경건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지식이 부족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를 과소평가하고, 그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함으로 스스로 주님의 율법의 의로운 기준을 충족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타락과 무능을 완전히 오해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누가복음 18:13에 나오는 세리처럼 겸손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리는 반면 자신의 참혹한 죄성에 가슴을 치며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그 대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 자신의 선함과 받아들여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죄악에 대해서, 주님의 의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바울이 로마서 10:4에서 썼듯이, 그들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는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율법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 중심 진리를 놓치는 것은 이스라엘 신학의 재앙이었다. 그것은 죄악과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완전히 왜곡시켰다. 그들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의를 이루려 애썼다. 곧, 그들의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그 일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행위에 집중되어 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계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육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바울의 마음이 너무도 아팠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의 민족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그는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의 변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로마서 10:13~14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

잠시, 자연 신학의 이론이 옳다고 상상(가정)해 보길 바란다. 이는 예수님의 설교와 복음주의가 영혼을 구원하는데 전혀 불필요하다 느끼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2000년 이상의 선교 활동을 완전히 헛되게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주님의 사람들이 그 사역을 위해 헌신한 헌금을 가치 없게 만들고, 복음을 위해 희생된 생명들이 한심한 낭비일 뿐이라 착각하게 할 것이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모든 순교자들도 마찬가지다. 만약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복음에 노출되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순교자들은 우리 신앙의 영웅이 아니라 배타적이지 않은 복음을 위해, 그리고 의미 없는 성경의 정밀함을 지키기 위해 가치 없는 죽음을 맞은 바보들인 셈인 것이다.

오점을 만들지 말라: 포스트모던 기독교의 부상과 주님의 자비를 비성경적으로 넓히는 것은 곧 건강한 신학적 관점에 해를 끼친다. 이는 교회의 복음 사역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며, 역사를 통해 고통받고 순교한 수많은 성도들의 신실성에 대한 모욕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헛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설교한 복음, 그리고 그 뒤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설교한 것이 자기 의로움(self-righteousness)에 빠진 세상 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말이다. 로마서 10:13~14는 복음 사역에 온전히 헌신하기 위한 그의 외침이다. 그는 매우 단호하고 명백했다. 복음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듣지 못하면 복음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곧, 그가 열정으로 헌신했던 것은 바로 죄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였다.

바울은 복음의 업적에 크게 힘을 주어 주님의 충실한 복음 전도자들을 향해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 10:15)라는 열렬한 찬사를 보낸다. 그는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극악무도함을 이해했고, 죄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에 대해 열정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또한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이 부분에 대한 최고의 정리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를 반드시 들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대사로서 그리고 전달자로서 봉사할 수 있는 소중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종종 이러한 성경적 진리에 결코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즉 우리의 구원과 주권자의 은혜에 결코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불신자를 구원으로 이끌 수단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말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은 우리가 그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신실한 삶은 사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복음기도신문]

원문: www.gty.org/library/blog/B180924

존 맥아더(John MacArthur)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다.

[관련기사]
[GTK 칼럼] 다른 이름(3): 미련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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