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TGC 칼럼]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다

▲ 2024 제4차 로잔대회. 로잔대회 제공

한국에서 열린 제4차 로잔대회에 참석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경험 중 하나였다. 앞으로도 몇 주, 아니 몇 달 동안 그 의미를 숙고해야 할 정도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200개 나라 이상을 대표하는 5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함께 경배한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여기서 하는 어떤 설명도 내가 느낀 경험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번 대회에 대한 몇 가지 성찰과 함께 서울선언문 그리고 전 세계 복음주의 선교 사역의 미래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제시하려고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로잔운동은 세계 복음주의 선교 전략에서 주요 전환점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1974년 첫 번째 로잔대회는 복음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토대를 마련했고 향후 복음주의 교회와 조직에 큰 영향을 미친 언약을 초안했다. 1989년 마닐라대회는 10/40 창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교차문화 사역과 상황에 맞춘 교회 개척을 강조했다. 2010년 케이프타운대회는 전도(복음 선포)와 사회적 행동(복음 실천)의 통합을 강조했는데, 이 관점은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노력의 기초가 되었다.

다중심 선교 

서울-인천대회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다중심 선교이다. 선교 활동은 이제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사람들을 파견하는 진정한 글로벌 노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2010년 케이프타운에 모인 선교학자들이 예견했던 이 개념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북미와 유럽이 선교를 주도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글로벌 교회가 그 역할을 맡아 모든 대륙에서 선교사역을 지원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케냐에서 온 형제는 자신이 지원하고 있는 아프리카 다른 지역의 선교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브라질 출신 선교사이자 현재 이탈리아에서 사역하는 르네 브루엘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그는 The Paradox of Happinesss라는 훌륭한 책을 썼다). 그리고 물론 이런 변화하는 패러다임의 증거로 한국 교회를 꼽아야 한다. 한국 교회는 북미를 빼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가 선교에 접근하는 방식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 더 이상 선교사는 서구에서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실은 나이로비나 뉴욕, 상파울루나 서울 등 세계 곳곳의 교회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자신들의 역할을 점점 더 잘 이해하고 있다. 선교는 이제 서구의 수출품이 아니다. 전 세계를 향한 복음 전파는 전 교회의 공동 소명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라 브루엘이 대의원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전 세계에서 역사하시는 방식을 설명했고, 각 대륙이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구현하기 위해 선교에 온 마음을 다해 참여하도록 촉구했다. 북미 교회를 향해서는 경고를 던졌다. 선교 운동이 식민지주의의 산물이라는 관념 때문에 선교에 담대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쇠락한 유럽에 대해서는 관점을 바꾸자고, 그리고 오늘날의 과제를 단순히 “기독교 이후”가 아니라 “부흥 이전”으로 재구성하자고 강조했다. 아직도 기독교 이후의 부흥을 목격한 적 없다는 팀 켈러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모든 부흥은 부흥이 일어날 때까지는 언제나 전례가 없기 때문에 “아직”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던 그의 말을 기억한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다.

맥락을 넘나드는 대화 

서울-인천대회는 전 세계 형제들과 함께 나누는 풍부하고 서로를 깨우치는 대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 테이블 그룹 리더로서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우리 그룹과 만나는 특권을 누렸다. 우리 테이블에는 홍콩, 케냐, 한국, 인도에서 온 참가자들이 있었다. 인도에서 온 형제는 개종한 시크교도로, “구도의 길을 걷는 나를 더 위대한 구도자가 찾았습니다”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언제 찾았느냐”는 내 질문에 그의 대답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요!”였다. 그런 만남은 나로 하여금 동일한 주님을 경배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주는 풍성함에 더 감사하도록 만들었다. 

복잡한 문제를 다루는 대규모 모임에서 예상하듯, 많은 공감을 얻은 프레젠테이션도 있었지만 당혹감을 불러일으킨 것도 있었다. 세대에 다가가라는 요청, 제자도에 대한 더 강력한 집중, 리더십의 신실성, 복음과 그 의미의 연결에 대한 도전 등 당연히 예상된 주제들이 거론되었다. 정의와 관련한 문제에 대한 몇몇 프레젠테이션의 경우에는 (적어도 서구적 맥락에서는) 기독교가 “좌파”가 아닌 “우파”로 점점 더 치중하는 문제에 있어서 단지 원인 파악을 넘어서서 보다 더 종합적으로 다루었다면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발표자의 주장대로 기독교가 정말 인위적인 범주(정치 연합이 정치 이익에 따라서 선택적으로만 적용하는 원칙)를 부수는 진리가 분명하다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잔혹 행위에 주의를 기울이자면서 정작 낙태라는 재앙을 중대한 불의로 보지 않고 언급하지 않은 것은 발표자의 실수이다. 

이번 대회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전 세계에서 모인 수십 명의 신자들이 다 함께 참여한 성별과 성적 지향에 대한 협업 세션이었다. 이 문제가 전도와 제자 양성에 대한 우리의 노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격차(gap)”를 어떻게 드러내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 테이블에는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 가나, 말라위, 그리스에서 온 참가자들이 포함되었다. 둘째 날 흥미로운 토론이 열렸다. “성별과 성적 지향”이라는 주제를 보는 순간 대부분은 보나마나 모든 토의가 LGBT 관련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 출신의 소수가 이 세션을 선택한 건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 그리고 결혼 및 가족과 관련한 더 광범위한 문제를 탐구하고 싶어 했다. 생각보다 다뤄야 할 주제가 다양해짐에 따라서 다시 세부 소그룹으로의 재편성이 논의되었지만, 결국 원래 계획대로 세션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다양성은 대화를 단지 문화적 갈등 지점 너머로 밀어붙여, 남성과 여성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기독교의 신체 신학에 대한 더 깊은 고찰을 촉구했다. 이러한 다양한 대화는 성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가 모든 맥락에서 그 도전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보다 심오하고 성경에 근거한 이론적 토대가 시급하게 필요함을 강조한다. 

서울선언, 그리고 몸의 신학 

복음과 성경 해석에 대한 지침 제시와 관련한 칭찬을 포함하여, 서울선언이 상당한 토론거리를 불러일으킨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류학과 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에 대한 강조도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젠더와 성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 속에서 신체에 대한 강력한 신학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이 문제를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비판했지만, 나는 여기에 주의를 기울인 초안 작성자들이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몸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필수이다. 이 주제에 초점을 맞춘 건 서울선언이 단지 서구의 문화적 논란에 대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신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이러한 문제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논의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서울선언의 발표까지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동성애적 매력을 경험하는 신자들에 대한 교회의 실패에 대한 단락이 수정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실패가 “무지”(아마도 아프리카 교회에서 반발을 받았을 것이다)나 단순한 “차별”(내가 보기에 이 단어는 제자도 중심의 관점에서 법적 의미로의 전환까지 인식하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정확하게 비판받았다) 때문일 수도 있다는 개념도 제거되었다. 편집 내용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추가 수정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나는 복음 전파에 대한 역사적 헌신을 “주요 관심사”(Manila 1989)로 분명하게 천명했던 로잔 정신을 강조하는 문장을 하나 넣자고 권고했다. 특히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가장 두드러지는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기독교의 존재와 실천은 환영받는 반면 복음 선포는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그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계속해서 피드백을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서울선언이 지금 상태에서 더 이상 바뀌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Theology Working Group의 리더인 이보르 푸발란과 빅터 나카가 수많은 관점과 씨름하는 데 공감한다. 여러 결의안 또는 특정 문서 작성을 책임지는 위원회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나는 포괄적이고 간결하게, 그리고 비판 속에서도 냉정하게 문서를 작성하는 데에 따라오는 골치 아픈 일을 잘 안다. 

서울선언 발표에 대한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울선언에 감사하며 앞으로 교회에 필수적인 자료로 쓰임받기를 기도한다. 서울선언은 인류학을 창조, 타락, 구원, 회복에 대한 성경 서사에 근거를 두며, 기독교의 비전이 반동적이지 않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선한 설계에 대한 긍정적 선포임을 상기시킨다. 

복음주의가 힘을 합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행동으로 

로잔 그리고 세계 복음주의가 맞은 지속적인 과제 중 하나는 전도와 사회적 행동 모두를 강조하며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다. 현대 선교 운동의 역사는 사회적 행동을 우선시하면서 전도와 개종을 과소평가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도와 제자도라는 북소리를 울리지 않는 한,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북을 다 잃게 될 것이다. 

존 스토트와 빌리 그레이엄은 로잔의 초점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로잔을 살펴보면, 논쟁의 승리자가 스토트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로잔은 교회가 세상 모든 일에 다 발을 담그는 것에 대해서 주저했던 그레이엄의 우려로부터도 얼마든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전체론적 선교라는 측면에서 볼 때 나는 스토트 지지자이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서 그레이엄이 느꼈던 부담에 공감했다. 로잔은 앞으로 세계 선교, 제자 양성, 미전도 종족의 복음화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 복음이라는 기독교의 중심이 수많은 경쟁 이슈가 춤추는 우선순위의 혼란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잔이 궤도를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돌아오신다는 사도적 가르침, 즉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데에 영원한 위험이 내포되었다는 개념을 긴급한 전도가 필요한 핵심 동기로서 반복하는 것이다. 복음전파의 열정을 영원한 심판이 아닌 사랑에 근거한 케이프타운서약이 틀린 건 아니지만, 로잔대회에서 더 이상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심판이라는 측면이 복음 선포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로잔대회보다 훨씬 더 자주 심판의 경고를 강조했다. 

미래를 위한 비전 

여러 도전에도 불구하고, 제4회 로잔대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모인 영광스러운 혼란이었다. 토론과 논쟁은 수년에 걸쳐 로잔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 중 하나이다. 갈등 없는 협력은 있을 수 없다. 로잔의 역사를 들려준 더그 버드솔은 이 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처음부터 어떻게 갈등을 견뎌냈는지를 보여주었다. 중요한 것은 표면 아래에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게 두려워 아예 논란을 피하려는 자세를 지양하는 것이다.  

세계 교회는 다면적인 다문화 현상이다. 나는 (주로 Isaiah 6tyOne이라는 유명한 한국 밴드와 Gettys가 주도한) 예배 중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전 세계에서 온 많은 신자들과 나란히 서서 손을 높이 들어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했다. 나는 앞으로 과연 사도 신경에 나오는 “성도의 교제”에 대한 구절을 로잔대회에서처럼 진짜 의미를 실감하며 암송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전통 의상 착용의 날에 복도를 걸으면서 만나는 다양한 문화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그날 내가 아직 간 적도 없는 고향을 향한 향수병을 느꼈다. 모든 부족과 나라가 왕 되신 예수님의 발 앞에 자신들의 문화를 바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에티오피아, 케냐, 인도, 그리고 한국의 독자들과 만난 것이다. 그들은 내가 하는 작업이 그들의 삶과 사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내 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었고 단지 북미의 지평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교회의 필요를 바라보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제4차 로잔대회는 지금 세상이 아무리 미친 듯 보여도 교회는 괜찮을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은 살아 있고, 번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전진한다. 의견 불일치와 논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은 역사하신다. 여전히 영혼들을 자신에게로 이끌고 미래의 과제를 위해서 그의 백성을 연합시키신다.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 [복음기도신문]

원제: Reflections on the Fourth Lausanne Congress: Declaring and Displaying Christ Together

트레빈 왁스Trevin Wax | 트레빈 왁스는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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