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GTK 칼럼] 사도 요한(4) : 고난을 기꺼이 감당한 사랑의 사도

simonjenkins의 사진, 저작권: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고난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고난은 사도들에게도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막 14:50). 하나님은 화평을 위해 주권적으로 고난을 허락하셨지만, 제자들이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요한은 고난을 몹시 싫어했을 뿐 아니라, 영광을 소망하는 강한 야망에 붙잡혀있었다.

그의 야망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요한은 예수님의 영광을 변화산에서 직접 목격했고, 그 영광에 참예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다(마 19:28~29). 어떻게 그가 그러한 축복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면에 고난은 누가 바라겠는가? 그것은 지옥의 특징이지 천국에 속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예수님의 영원한 나라, 그 영광에 참여하겠다는 요한의 욕망은 전혀 죄악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보좌와 영광에 대한 유업을 약속하셨다. 더욱이 우리가 완전히 베일을 벗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천국에서 목격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상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확신한다. 충만한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한 자락만 본다 해도 우리는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과 슬픔과 고난들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시 17:15; 요일 3:2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합당한 소망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이 땅에서의 고난에도 기꺼이 동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바라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바울의 말은 그가 마치 고통에서 쾌락을 느끼는 어떤 가학적인 욕정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영광과 고난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영광의 상급을 바라는 사람들은 기꺼이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고난은 영광의 대가이다.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예수님은 이 진리를 거듭해서 가르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고난은 영광의 전주곡이다. 믿는 자로서 겪는 우리의 고난은 장차 임할 영광에 대한 확신이다(벧전 1:6~7).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 그러므로 영광에 목마른 사람들은 기꺼이 고난을 받으려는 자세로 그가 바라는 것과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모든 제자들이 이 사실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 모두가 하늘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직책을 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자리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겸손한 자를 위해 마련된 자리가 있지만, 그 영예로운 자리에 앉는 사람은 고난의 굴욕을 견딤으로써 먼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어떤 보좌라도 받기 전에,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막 10:38).

얼마나 열성적으로, 그리고 얼마나 순진하게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이 주님이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확답을 드렸던가? 그들은 주님께 “우리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말씀드렸다(마 10:39). 그 순간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자원하고 있었는지 도무지 실마리조차 알지 못했다. 그들은 베드로처럼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자부했지만, 그런 기회가 왔을 때 모두 주님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는 그런 잘못과 실패를 마지막이라 여기지 않으셨다. 열한 제자 모두가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줄행랑을 쳤지만 그들 모두 회복되었으며, 결국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당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실제로 요한을 제외한 모두는 훗날 믿음 때문에 고난과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인생의 전성기 때에 각각 순교를 당했다. 요한은 늙기까지 살았던 유일한 제자였지만 다른 이들이 당하지 않았던 고난을 당했다. 그는 다른 사도들이 이미 영광 가운데 들어가 있을 때 이 땅에서 오랫동안 괴로움과 박해를 견뎌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요한은 자신이 앞으로 마시게 될 잔의 쓰라림을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재판에 대한 요한의 기록을 보면, 그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에까지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을 알 수 있다(요 18:15). 그곳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포박당하여 매질 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실제로 목격했던 유일한 제자였다. 그는 예수님이 그를 보실 수 있을 정도로 십자가에 가까이 서 있었다(요 19:26). 아마도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못 박는 것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한 군병이 마지막으로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를 때에도 그는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이것과 똑같은 고난의 세례를 받겠다고 동의했던 것을 기억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가 쉽게 마시겠다고 자원했던 그 잔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을 때, 요한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개인적인 상실을 감당해야 했다. 다른 사도들이 한 사람씩 순교를 당하면서 요한이 겪는 상실의 슬픔과 고통은 더했을 것이다. 이들은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다. 곧 그만이 홀로 남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이 모든 고난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이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믿을만한 모든 자료들은, 요한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세운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고 증거한다.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치하의 엄청난 박해 기간에, 요한은 오늘날의 터키 서해안의 에게해에 자리 잡은 작은 도데칸 군도의 하나인 밧모섬 감옥에 유배되었다. 그는 동굴에 살면서 계시적인 환상을 받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계 1:9 참조).

나는 직접 그가 살았고 계시록을 기록했다고 믿는 그 동굴에 가보았다. 그곳은 나이 든 노인이 지내기에는 참으로 가혹한 환경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단절된 채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바위 하나를 베개 삼고 넓적한 바위를 침대 삼아 잠을 잤다.

그러나 요한은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는 법을 배웠다. 그의 편지들이나 요한계시록 어디에서도 자기의 고난에 대한 불평이 전혀 없다. 그가 극도로 힘들고 궁핍한 가운데 계시록을 기록했음이 분명한데도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티끌 만큼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을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했다(계 1:9).

그는 “환난”을 언급하는 중에, 그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도록 만든 인내(“참음”)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균형이며 건강한 관점이다. 그는 하늘의 영광을 대망하며 이 땅 위에서의 고난 너머를 바라보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이 시리즈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요한이 성숙해 가는 변화는 우리의 삶에 적용할 가치가 있는 모형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가지는 진리를 향한 열심은, 반드시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함께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야심은 그리스도와 같은 겸손으로 완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고난이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게 해야 한다. 오히려 다가올 영광에 대한 신성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

요한의 가르침과 그의 삶을 주의 깊게 연구한다면 얻을 것이 매우 풍성하다. 그의 신학은 풍성하고, 그의 삶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하여 완전히 변화된 사람의 증거가 되고 있다. [복음기도신문]

원문: https://www.gty.org/library/blog/B150702/john-willingness-to-suffer-for-gods-glory

존 맥아더(John MacArthur)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제보 및 문의: 

[관련기사]
[GTK 칼럼] 사도요한(3): 겸손했던 사랑의 사도

Print Friendly, PDF & Email

관련 기사

Katharina-v-Bora-241118
[TGC 칼럼] 카타리나 폰 보라: 진정한 자유를 누린 여인
20241118_Greece1
[김수길 칼럼] 이스트미아에서 네로, 바울의 흔적을 떠올리다
20240812_Guinea-Bissau1
[원정하 칼럼] 서아프리카 기니비사우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20241117_KJI_Column
[김종일 칼럼] 모든 무슬림 형제자매에게 보내는 복음편지(16): 기독교에 대해 궁금해할 핵심 질문 6가지

최신기사

[TGC 칼럼] 카타리나 폰 보라: 진정한 자유를 누린 여인
"한미동맹 70주년, 한국교회는 복음주의 신앙과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위해 기도해야"
[김수길 칼럼] 이스트미아에서 네로, 바울의 흔적을 떠올리다
[원정하 칼럼] 서아프리카 기니비사우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우승트로피 들고 기뻐하던 난민 청소년 얼굴을 잊을 수 없어요"
2023년 유럽 35개국서 반기독교 증오 범죄 2400건... 프랑스, 영국이 최다
엠폭스 변종, 콩민공과 부룬디 어린이에 빠르게 확산
Search

실시간최신기사

Katharina-v-Bora-241118
[TGC 칼럼] 카타리나 폰 보라: 진정한 자유를 누린 여인
20241117_ROK-US alliance
"한미동맹 70주년, 한국교회는 복음주의 신앙과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위해 기도해야"
20241118_Greece1
[김수길 칼럼] 이스트미아에서 네로, 바울의 흔적을 떠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