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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복음주의 교회들을 빚어 낸 세 물결 (그리고 지금 일고 있는 네 번째 물결)

unsplash의 Tim Marshall

1940년대 후반에, 그러니까 칼 F. H. 헨리가 현대 근본주의의 불편한 양심(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 한국에서는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으로 역간)을 쓴 때이자 헨리와 해럴드 오켄가, 빌리 그레이엄이 이끈 신복음주의 운동이 기세를 올리던 바로 그 시기에 당신이 만약에 침례교, 장로교, 또는 감리교 교회를 방문했다면, 각각의 교회에서 눈에 띄는 차이점과 함께 몇 가지 유사점을 동시에 발견했을 것이다. 

모든 교회가 어떤 의미에서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장로교와 대부분의 감리교는 그 정도가 더 강한 “높은 교회(high church)”에 가깝고, 많은 감리교와 침례교(특히 남부)는 모닥불에서 나누는 간증 감성을 중시하는, 보다 더 부흥주의 문화를 보이는 “낮은 교회(low church)” 경향을 보일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설교단의 신학적 특징과 그것이 예배와 예배 형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것이다. 

오늘날 신복음주의 운동과 광범위하게 연계된 교회를 방문하면 그 교회가 속한 교단과 상관없이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 그룹은 종종 침례교와 감리교에서 빠져나온 “무교단(초교파)”으로서, 두드러진 성령 운동을 특징으로 한다. 보수적인 감리교 대형교회(메가처치)는 거리 건너편에 있는 남부 침례교 교회와 매우 흡사한 예배를 드리며, 이는 다시 마을 건너편에 있는 무교단 교회와도 어떤 점에서는 비슷하다. 

신학적 차이가 여전하다고 해도 그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건, 거의 모든 복음주의 교회가 해안에 부딪히는 순간 백사장 모양을 바꾸는 세 종류의 물결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를 휩쓰는 운동이 끼치는 영향은 워낙 근본적이라서 대부분의 교인은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는 이제 이 세 가지 물결을 설명하고 오늘날 속도를 내고 있는 네 번째 물결의 가능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물결 #1: 영으로 가득한 예배 

오순절주의에서 시작한 1960년대에서 1980년대의 성령 운동은 오늘날 예배 형태에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치유와 표적 은사를 강조했다. 이 물결은 점차 세를 키우면서 단지 오순절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나 거의 모든 교파, 심지어 주요 성공회와 영국 국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광범위한 은사주의 갱신 운동이 되었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더 깊고 개인적인 체험, 표현을 강조하는 예배 형식, 그리고 일상생활 속 성령의 인도를 갈구하는 모든 종류의 복음주의자를 포용하기 위해서, 성령 운동은 방언이 중생의 필수 요소라는 등의 일부 특징에 대한 주장을 최소화시켰다. 

성령 운동이 일으킨 과잉에 반발한 많은 교회 지도자가 강력하게 은사 중지(기적적인 표적 은사가 사도 시대 이후에 중단되었다는 견해)를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예배 전쟁”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교회를 뒤흔들었는데, 많은 이들이 찬양이 현대 음악 형태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멈추거나 늦추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오늘날 은사에 치중한 예배와 신학을 거부하는 교회와 교파에서조차도 성령 운동의 물결이 남긴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흔적은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눈을 감고 손을 들고 찬양하는 모습이 이상하지 않다면, 찬양의 스타일과 노래가 현대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해도 어색하지 않다면, 주변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방언으로 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면, 무엇보다 당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한 적이 있다면,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치유 기도를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성령 운동이라는 물결이 재형성한 교회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다. 

물결 #2: 구도자 중심의 교회 성장 

두 번째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교회 성장 운동에서 시작했다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들어서 “구도자 중심”이라는 교회 성장을 위한 특정 전략과 방법으로 채택되고 난 이후로 본격적으로 시작한 물결이다. 이는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필요”를 실질적으로 채워 주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복음을 제시함으로 불신자를 교회로 끌어오려는 전략이다.

피터 와그너, 엘머 타운스, 그리고 다른 주요 리더들은 교회 성장 철학의 틀을 제공했고, 빌 하이벨스, 릭 워런, 앤디 스탠리와 같은 리더들은 새로운 목회(doing church) 방식을 구축함으로 교회를 불신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다. 이 물결은 성령 운동의 측면을 최소화하면서(불신자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는 특정한 카리스마적 행동), 다른 특징(예를 들어 현대 음악 및 감정적 예배)을 각색하고 확대했다.

성령 운동과 마찬가지로, 구도자 중심 모델도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새로운 전도 방법과 예배 스타일은 준비가 되지 않은 교회에게까지 변화를 요구했다. 구도자에게 맞추기 위한 복음의 희석, 제자도에 대한 지나치게 프로그램적인 관점의 채택, 또는 예배에 끌어들이는 세속적 요소 및 목회 성공의 척도로 성도 수에 집착하는 행태 등이 비판에 포함된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철학을 전적으로 채택하지 않은 교회라고 해도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 이 물결이 미치는 영향은 어디에나 있다. 대부분의 교회는 성장이라는 암묵적인 목표 아래에서 운영된다(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성장이나 침체를 재는 척도는 거의 다 숫자와 프로그램이다. 예배 참석자 수, 소그룹 참여, 라이브 스트리밍 시청자, 봉사 및 선교 그룹 등이다. 

거의 모든 교회가 구도자 중심이라는 물결과 관련 있는 일반적인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명확한 표지판, 주차장이나 입구에서 만나는 안내원, 로비나 교제 구역의 커피 서비스, 현대식 예배, 매력적인 어린이 시설, 삶의 문제와 연결된 설교, 그리고 예배 중에 방문 교인이나 불신자를 인사시키는 것 등등이다. 구도자 중심이라는 물결은 교회의 목적뿐 아니라 목회의 효율성 판단을 판단하는 방식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물결 #3: 복음 중심

복음주의를 강타한 다음 큰 물결은 2000년대 중반과 2010년대에 걸쳐서 일어난 복음 중심이다. 콜린 핸슨은 그 물결을 이렇게 표현했다. “젊고 불안하며 개혁적이다(Young, Restless, and Reformed).” 이 물결은 부분적으로 교회 성장과 성령 운동이 초래한 지나친 실용주의와 신학 실종이라는 결함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되었다.

이 물결의 목표는 교회를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아서 핵심 메시지인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은혜와 자비가 도덕적 행동 개선 또는 정치적 이슈에 의해서 가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 중심이라는 물결은 교리로의 복귀, 실용적인 피상성보다 신학적 깊이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성경의 중심이 예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미했다.

복음 중심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타올랐는데, 여기에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고통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질문으로 재조정된 문화 풍경이 일조했다. 거기에 더해서 불안한 그리스도인으로 넘치는 교회 풍경도 한몫했다. “더 잘하라고!”라는 말 빼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만연한 도덕주의를 돌파하는 데 필요한 은혜라는 신선한 소식을 과연 교회가 제공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크신 하나님 신학을 주창한 존 파이퍼와 설교를 통해서 마음의 우상 숭배를 세밀하게 폭로한 팀 켈러는 젊은 세대로 하여금 죄와 슬픔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으로서 다시금 복음에 초점을 맞추도록 이끌었다.

복음 중심이라는 물결도 상당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재세례파들은 문화적 참여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승리주의를 표방한다고 질책했다. 비개혁주의 전통은 칼뱅주의 구원론에 미치지 못하는 선포는 열등하거나 사실상 진짜 복음이 아니라는 이 메시지가 내포한 의미 때문에 좌절했다. 지시적 요소(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를 강조하는 바람에 때때로 성경적 명령(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희생되기도 했다. 

그러나 애초에 이 운동이 시작된 개혁주의 분파를 넘어서 교파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친 모든 교회에서 우리는 복음 중심이라는 물결이 끼친 영향을 목격한다. 현대 찬송가를 부르는 교회에 속해 있거나, 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예배 곡을 즐기거나, 어린이를 위한 복음 프로젝트(The Gospel Project)를 사용하거나, “종교”와 “복음”을 구별하는 설교를 듣거나, 기독교 고전이나 재포장된 청교도 신학을 탐구하는 소규모 모임에 참석한다면, 당신은 지금 복음 중심 물결의 흔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물결 #4: 영적 형성? 

복음주의 교회에 영향을 미칠 또 다른 물결이 지금 세를 키워가고 있는가? 

온라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우파의 기독교 민족주의자든 좌파의 사회 정의 옹호자든 새로운 정치적 초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물결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은 교회에 다니는 대학생들이다. 다양한 교회에서 설교하고 또 다양한 교파의 지도자들과 교류하는 내 눈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다름 아니라 영적 형성에 대한 새로운 강조이다. 즉, 모든 삶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개인적 습관과 영적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물결과 마찬가지로 이 물결에도 반동적 요소가 있다. 성령 운동이라는 물결은 너무 얕고, 구도자 중심은 너무 프로그램적이며, 복음 중심은 삶의 규칙을 강조하는 데 너무 소심하다(그건 아마도 도덕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영적 형성이라는 물결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부정적인 측면이 아니라 긍정적 측면이다. 즉, 덕을 성장시키고 성격 발달에 도움을 주는 관행과 습관에 따라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도덕적 비전이 도전적이고 힘들지 않다면, 그들은 당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볼티모어의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목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대학생들과 관련해서 작년에 내게 한 말이다. 저스틴 휘트멜 얼리 또는 존 마크 코머의 책과 같이, 여러 베스트셀러가 지금 영적 습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건 별로 놀랍지 않다. 브래드 이스트 교수는 대학생의 독서 습관을 조사하면서, “지금은 존 마크 코머(John Mark Comer) 목사의 세상이다. 우리는 모두 그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과장된 표현일 수 있지만, 모든 추세가 진지한 영적 형성에 대한 강조로 향하고 있다는 현실을 드러낸다. 

이 물결에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다. 그것은 제자도에 대한 달라스 윌라드의 작업이 대중화되고 갱신된 비전으로서, 거기에 단지 A. W. 토저가 가미된 복음주의 신비주의가 결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때때로 종교 개혁을 넘어선 관행을 가리키면서 그 이전 처음 15세기 동안 교회의 모든 약속과 위험까지 언급한다. 종합적으로 적용할 때, 그것은 로버트 웨버가 수십 년 동안 이야기했던 고대-미래 비전과 일치한다. 

거기에는 고대 기독교 의식을 경건한 삶(글로 쓰는 기도, 성스러운 공간 만들기, 무릎 꿇기, 십자가 성호 긋기, 작정 금식, 고독 추구)에 통합하는 것, 그리고 고대의 신앙고백과 전례에 성령 운동의 물결에서 물려받은 강렬한 예배 스타일을 결합해서 새로운 예배 리듬을 창출하는 것이 추세이다. 

그럼 따라오는 질문은 왜 하필 지금 이런 물결이 일어나는가이다. 다양한 방법을 통한 개인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개혁된 복음 중심 신학과 함께 웨슬리주의의 부활이라는 신호로 볼 수 있을까(내가 아는 많은 젊은이가 켈러와 함께 코머를 읽고 있다)? 현재 문화적 상황의 혼란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개인 및 집단 영성에서 새로운 형태의 구조를 만들도록 유도하는 걸까? 아니면 현재를 넘어선 무언가에 뿌리를 두고 싶은 신앙에 대한 열망일까?

내 젊은 친구 중 몇몇은 세 번째와 네 번째 물결 사이에서 유익한 긴장을 느낀다. 그건 더 많은 구조와 전례에 대한 열망과 동시에 과열과 지나친 표현(performance)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다. 그들은 은혜와 받아들임의 급진적인 메시지를 붙잡는 한편, 도덕주의나 행동 관리의 사슬로 다시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신앙 여정에 더 많은 규칙과 의식, 즉 더 많은 영적 구조를 통합하고 싶어 한다. 

나도 조금은 그런 긴장감을 느낀다. 나는 영적 형성에 대한 추세를 응원하는(최선을 다해 그것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서 말씀을 활용해서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가이드를 참조하라) 동시에 교회가 수세기 동안 마주친 함정을 피하고 싶다. 영적 형성의 물결 속에서는 복음이 명확하게 전달되기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위험이 있다. 성경이 체험보다 뒷전으로 밀려나고, 교회가 개인의 영적 여정을 돕는 조력자로 전락할 수도 있다.

물결과 잔물결 위에서 

충분히 자세히 살펴보면 지난 반 세기 동안 복음주의에 영향을 미친 모든 물결에는 다 나름대로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가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물결을 통해서 주님께서 역사하신다. 그 어떤 운동도 강점과 약점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는 어렵다. 그리고 사역은 지저분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네 번째 물결에 대해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 십 년 또는 이십 년 후에 독자들은 이 칼럼을 돌아보며 내가 옳았는지, 반쯤 옳았는지, 아니면 완전히 틀렸는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모든 물결은 복음주의 풍경에 흔적을 남긴다. 나는 우리가 진짜로 이 네 번째 물결을 지나고 있는 건지, 그리고 그것이 다음 세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궁금하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3 Waves That Have Shaped Evangelical Churches (and a 4th on the Way

트레빈 왁스 TREVIN WAX | 트레빈 왁스는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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