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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하나님의 거룩(3): 은혜와 거룩

Unsplash의 Arifur Rahman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큰 위험들 중의 하나는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자들이 성경의 하나님을 그들이 만든 낮은 수준의 신적인 존재, 즉 자신들의 가치관, 자신들의 도덕, 자신들의 우선순위에 맞춘 존재로 대체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들 중 자신들의 세계관과 기호에 맞지 않는 부분을 경시함으로써 교묘하게 변질시킨 탓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그분의 속성들 중 자신들이 더 선호하는 속성을 강조하거나 자신들에게 찔림이 되거나 자책이 되는 속성을 회피할 때, 이러한 변질의 경계선에서 모험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지난 칼럼에서 살펴본 대로,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 그분을 우리가 편리한 대로 친절하고 베푸시는 것을 좋아하는 분으로만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경배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신학적인 불균형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의 거룩함을 폐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잃은 것은 아마도 그분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그 열매를 먹었을 때, 그들은 그 자리에서 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들의 육체적인 삶은 바로 그날 끝난 게 아니라 수백 년을 더 살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율법은 간음한 자나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한 자, 심지어 반항적인 자녀들에게 죽음의 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지만 율법이 정한 죽음의 징벌을 받지 않았다. 다윗은 간음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보다 크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당신과 나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에 대해 즉각적으로 벌을 내리는 대신,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과 은혜로 우리를 대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회개해야 마땅하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그러나 우리 마음은 심히 악하고 부패하므로 통회하는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감사함으로 받기보다 그분의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구심을 표시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너무 폭력적이므로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왜 하나님이 가나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멸하라고 명령하셨는지 힐문한다. 또한, 한 사람의 생명을 단지 언약궤를 만졌다는 이유만으로 취할 수 있는지, 친절하고 사랑이 많으신 아이들이 선지자를 대머리라고 놀렸다고 어떻게 곰을 보내 죽일 수 있는지, 하나님이 정말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들을 땅이 갈라져 죽게 했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온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질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분노하실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3:18은 세상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왜 성경에서 어떤 사람들의 생명을 취하셨는지 아는가?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죄를 범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은혜와 긍휼의 섭리의 어느 한 과정에 속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공의의 심판이 내려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본을 보여주실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은 롯의 아내를 소금 기둥이 되게 하셨는데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죄의 중대함에 대한 기념물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고린도전서 10장에는 구약시대에 죄로 인해 멸망을 당한 사람들의 예를 언급하면서, 11절에서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인류가 걸어온 길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길에는 하나님이 언제든지 그들의 생명을 취할 권리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가 있다.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지만 그분의 은혜를 그분의 공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 거룩한 방식으로 대응하실 때 그것이 우리가 보기에 불의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결코 불의하지 않으시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익숙한 나머지 계속 범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남용하는 자리에 이르지 말라. 죄를 심판하시는 모든 권리를 가지고 계신 그분이 심판을 행하실 때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여긴다면 그분은 당신도 심판하실 것이다. 그분은 거룩하시며 우리가 두려워해야 마땅한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올바른 질문

우리가 해야 할 올바른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들은 갑자기 심판하시느냐가 아니라 왜 우리는 살려두시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실 전적인 권리를 갖고 계시며,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예레미야애가 6:23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우리 죄에 대한 그분의 축복은 아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위선적인 죄를 어느 정도 다 범하고 산다(행 5:1-11). 또는 합당치 않은 태도로 주의 성만찬에 참여했다가 그들의 죄로 인해 죽은 고린도인들처럼 주의 상 앞에 올 때도 있다(고전 11:30). 우리는 또한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세상적으로 행동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하나님이 그들은 그렇게 즉시 엄중하게 심판하셨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에게는 동일한 심판을 즉시 행하시지 않는가 이어야 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이끄시고 계시다는 점이다. 로마서 2:4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인자와 긍휼을 통해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회개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

C.S. 루이스의 나니아연대기는 일부 성경적인 진리에 기초를 둔 판타지 아동소설 시리즈이다. 금 사자 아슬란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사나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사자를 묘사하면서 루이스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비버가 나니아의 영역에 처음 들어온 루시와 수잔 그리고 피터에게 아슬란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에서 그들은 아슬란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는 질문을 던진다.

“오! 난 그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를 만나도 정말 괜찮을까? 난 사자를 만나는 것이 어쩐지 두려워”(수잔)

“두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해. 만약 무릎이 덜덜 떨리지 않고 아슬란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용감하거나 그냥 바보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비버부인)

“그럼 안전하지 않다는 거잖아”(루시)

“안전? 너희 방금 비버 부인이 한 말 듣지 못했니? 안전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는 절대 안전하지 않아. 하지만 그는 착해. 내가 말하잖아. 그는 왕이라고 말이야.” (비버남편)

어린이들이 아슬란을 만났을 때, 루시는 아슬란의 발이 매우 부드럽거나 반대로 무시무시할 거라고 예상했다. 발톱이 안 보일 때는 벨벳처럼 부드럽지만, 감추어진 발톱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면 날카로운 칼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기독교는 이 진리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고 즐기기를 원하지만 그분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진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불균형이 우리의 예배의 핵심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영원하시며, 영광스러우시고, 은혜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다. 그분의 예배자들은 통회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 그리고 그분의 거룩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봄으로써 죄인임을 자각하고 부서진 마음으로 그분 앞에 나아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의 용서의 선물에 대한 우리 마음의 감사와 즐거움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우리는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죄에서 돌이키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의 예배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면서 그분의 임재 앞으로 겁 없이 나아가서는 안 된다. 진정한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이 없이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우리의 예배는 거룩한 아름다움으로 준비되어야 하며, 또한 참된 예배의 특징인 감사와 겸손으로 가득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거룩하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기도신문]

원문 : https://www.gty.org/library/blog/B160812

존 맥아더(John MacArthur)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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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GTK 칼럼] 하나님의 거룩(2): 하나님과 대면하게 될 때 일어나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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