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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칼럼] 사랑과 용서

ⓒ 김현의

이상규의 성경묵상4

빌레몬서 8-19

빌레몬서는 바울의 13권의 서신중에서 가장 짧은 책입니다. 한글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25개 구절로 구성되어 있으나 헬라어로 볼 때 334개 단어로 구성된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바울의 복음 이해 혹은 바울의 사회관을 보여주고 있고, 1세기적 상황에서 기독교 복음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입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골로새에 사는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인데, 빌레몬은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인물로서 부유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택을 예배처소로 제공하였고, 그의 집이 ‘가정교회’(domus ecclesiae)였습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가 2인칭 단수이기 때문에 이것이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의 아들로 보이는 아킵보는 그 가정교회의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골4:17). 이런 점을 보면 빌레몬은 자신의 주택을 소유한 헌신된 그리스도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노예가 있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나 당시 그리스도인들도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바울이 노예에 대해 말한 여러 규정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고전7:20~24, 골3;22~4:1, 엡6:5~9). 다소 황당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5세기 초의 기독교인인 귀족 여성 멜라니아(Melania)는 무려 2만 4000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자들도 노예를 거느렸는데 빌레몬 집의 노예 중 한 사람이 오네시모였습니다. 오네시모라는 말은 ‘유익’이라는 뜻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쓸만한 놈’이란 의미인데 노예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도망을 갔는데, 주인의 돈이나 보석, 아니면 이 둘을 훔쳐 달아난 것입니다(18).

도망간 오네시모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골로새에서 1400여km 떨어진 로마까지 도망 갔는데 이곳에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만 오네시모로 볼 때는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혹자는 두기고가 오네시모를 바울에게 인도하여 신자가 되게 한 것이 아닌가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점을 분명하게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신자가 된 오네시모는 갇힌자 된 바울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 노예였다는 점을 알게 된 바울은 그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마음 먹고 그를 신원(伸冤)하는 한 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빌레몬서입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더 이상 노예로 생각하지 말고 형제로 받아드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도망한 한 노예를 위해 이처럼 한 통의 편지를 쓰고, 진심이 깃든 애정으로 오네시모를 변호하며 그를 영접하라는 이 한 통의 편지는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만 돌아가게 한다면 노예잡이꾼에게 잡혀갈 수도 있고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은 옥중에서 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전달하기 위해 아시아로 가는 두기고에게 오네시모를 데리고 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고대사학자인 핀레이(M. I. Finley)가 주장하는 바처럼 로마는 기원전 3세기부터 노예제 사회였고, 기원후 1세기까지 노예 인구가 가장 많았습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노예는 ‘물건’(res, thing)이었지 인격이 아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도 노예를 ‘살아 있는 재산’(living property)이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노예는 일종의 부동산이었고,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노예들은 잔혹하게 취급되었는데, 도망가다가 잡힐 경우 가장 일반적인 체벌이 채찍질이었고, 낙인찍기, 감금, 신체절단, 살인 등 다양한 방식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도망가는 노예가 있었기에 ‘노예잡이꾼’(fugitivarii)이라는 직업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점을 알고 있던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그를 더 이상 노예로 간주하지말고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드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하나님과 화해시킨 다음 주인과 화해시키고 있음을 봅니다. 바울은 사도적 권위로 명령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에 기초하여’ 정중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도망간 노예를 배려하는 바울의 권면을 보면 감동적입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라고 말하고 그를 위해 간구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나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사람은 디모데와 디도뿐이었습니다(딤전1:2, 딤후1:2, 딛1:4). ‘오네시모’라는 이름이 10절에서 처음 언급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바울의 세심함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오네시모’를 말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 이름만 듣고도 빌레몬이 크게 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 있다. 내가 그를 위하여 간구한다. 그리고 나서 그가 오네시모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전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빌레몬의 마음을 누구려뜨리기 위해 오네시모라는 이름을 10절 마지막에 언급한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흥미로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라는 말의 뜻이 ‘유익’이라는 말인데, 그가 전에는 이름과는 달리 ‘무익’했으나 이제는 그 이름처럼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빌레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에서는 그를 돌려보내면서 “그는 내 심장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탄원한 후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더 이상 노예로 대하지 말고 형제로 대하라(16)고 권면합니다. 여기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노예제도를 없이하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런 제도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17절에서는 그를 ‘동역자’라고 말하면서 마치 나를 영접하듯이 그를 영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를 향한 바울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줍니다. 심지어는 오네시모가 금전적으로 손해를 끼친 것이 있다면 자신이 갚아주겠다고 말합니다(18). 19절에서는 이 편지는 대필하지 않고 친필로 쓴다고 말하면서 빌레몬이 바울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위해 탄원하는 바울의 이 말씀 속에는 죄인인 우리들,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도망갔던 우리들을 탄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오네시모는 사실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오네시모를 향한 바울의 간절한 탄원에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대도(代禱)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한 사람의 노예를 향한 불타는 사랑, 정중한 예의, 세심한 배려, 그리고 치밀한 권면은 사실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호소입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시며 우리 대신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상규 교수 | 전 고신대 교수. 현 백석대 석좌교수. 교회사가로 한국교회 사료 발굴에 기여했으며, 한국장로교신학회 회장과 개혁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교회와 개혁신학> 등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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