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 안에서만 결혼해야 하는 직접적인 이유를 성경의 명백한 명령을 통해 알게 됐다(고전 7:39; 고후 6:14). 주 안에서만 결혼해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도 성경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세 가지 목적—1) 결혼의 목적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친밀한 관계를 세상에 선포하기 위하여(엡 6:22-33), 2) 자녀 양육의 목적인 주의 교훈과 훈계로 다음 세대를 길러내기 위하여(엡 6:4), 3) 구원의 목적인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서로를 권하기 위하여(히 10:24-25)—을 성취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다. 또한 하나님이 설계하신 결혼과 가정과 구원의 목적을 함께 성취하는 일에 무지하고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무능력한 대상과 평생 함께 하겠다고 결단하는 행위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신자의 진정한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이와 같은 일에서 돌이킬 것을 겸손과 온유한 마음으로 힘써 권해야 한다.
이 죄에서 어떻게 돌이킬 수 있는가?
거짓말하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거짓말을 그치고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엡 4:25). 도둑질하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엡 4:28). 우리가 살펴본대로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이 명백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라면, 그 죄에서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
먼저, 이혼은 올바른 회개의 방법이 아니다. 성경은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라고 명령한다(고전 7:12-13). 성경에서 이혼은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함부로 나누는 죄로 다뤄진다. 그러므로 불신자와 결혼한 죄에서 돌이키기 위하여 이혼이라는 또 다른 죄를 범하는 것은 올바른 회개의 방식이 될 수 없다(마 5:32). 성경이 이례적으로 허락하는 이혼의 조건은 1) 배우자의 간음(마 5:32), 2) 믿지 아니하는 남편/아내가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을 때뿐이다(고전 7:15). 각각의 경우에도 이혼의 권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완강히 갈라서기를 원할 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는 것으로 그만큼 성경은 신자에게 결혼 언약을 절대로 깨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간음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부부 관계를 깨려고 하지 않는 이상, 신자는 믿지 않는 배우자와 이혼할 수 없다(가능성이 아니라 당위성).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불신자와 결혼한 죄에서 돌이키는 것인가? 이미 맺은 부부 관계를 깨는 것이 아니라면, 평생 이어질 그 관계 속에서 어떻게 회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성경은 모든 죄에 관하여 신자가 가져야 하는 순전한 마음을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범죄한 다윗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그분이 요구하시는 제사의 중심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신자는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일이라는 사실에 진심으로 슬퍼하고 뉘우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뭐 일이 이렇게 됐어요.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죄라는 거 잘 아는데, 그 죗값 내가 받으면 되잖아요’, ‘신자끼리 결혼해서 저렇게 싸우는 것보다 불신자와 행복하게 사는 내가 더 낫지 않나요?’ 등등의 반응에서 안타까운 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자백한 죄에 대하여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라는 말이 아니다. 주님은 미쁘셔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다시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허락하신다(요일 1:9). 그러나 먼저는 자백의 진정성 곧 상한 심령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변질돼서는 안 된다. 어떤 신자는 불신자와 결혼할 때 깊은 후회와 죄책감을 보이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솔직히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여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라고 말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전에 보였던 회심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바울이 자기 죄를 어떻게 돌이켰는지 생각해 보자. 바울만큼 주 안에서 수고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는 다른 사도들보다 자신이 더 많이 수고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전 15:10). 그러나 그는 과거 교회를 비방하고 박해하고 성도를 폭행한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 분명했지만, 그 죄는 바울에게 너무 큰 것이어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할 정도였다(딤전 1:15).
신자가 죄를 대하는 태도가 이와 같아야 한다. 모든 죄가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그 죄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평가에 계속해서 진심으로 동의해야 한다. 죄는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죄가 아닌 것이 되지 않는다. 동시에 신자는 이미 용서받은 죄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고, 성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시들시들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부단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교회는 이미 용서받고 화목을 이룬 지체의 과거 죄를 들춰내거나 낙인을 찍고 계속해서 죄인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불신자와 결혼이 현재진행형이라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문제, 가령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를 형제자매라고 부르지 않아서 이질감이 느껴진다거나 부부로서 믿는 가정의 본이 되어야 하는 자리에서 섬기지 못하는 것의 문제 등을 죄에 대한 징계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는 과거 용서된 죄의 결과이지 현재 내려지는 징계가 아니다. 이 둘을 엄밀히 구분할 수 있어야 불필요한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을 수 있다.
목회 현장에서 불신자와 교제하는 성도를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안타깝게도 교제를 고민하는 시점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된 상태에서 알게 된다.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의 문제를 장로(목사)에게 얘기하는 시점도 상당히 늦다. 이미 양가 부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결혼 날짜까지 잡고 나서야 통보한다. 이럴 때 목사의 머리는 굉장히 복잡하다. 이혼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분명하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불신자와의 교제는 언제든 끝내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어떤 대형 교회 목사가 유튜브에서 대담의 형태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믿지 않는 자와 교제 또는 결혼하는 것은 복음 전도 차원에서도 유익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나는 믿는 배우자를 만나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진심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리기 원한다. 하지만, 그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짓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성경은 분명히 못 박았다(롬 6:1-2).
불신자와 교제하거나 결혼을 준비하면서 그/그녀의 회심을 기대하고 복음 상담을 요청하기도 한다. 다행히 믿지 않는 자가 복음 듣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놀랍게도 구원에 이르는 지식과 은혜를 입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억지로 복음 듣는 자리에 끌려오거나 아예 거부할 수도 있고, 열심히 전달해 줬지만, 영적으로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에 인생을 거는 도박을 하지 말라. 결국엔 똑같은 선택의 기점에 놓이게 된다. 나는 불신자와 계속 교제를 이어 나갈 것인가? 나는 불신자와 평생 함께 하기를 선택할 것인가?
실제로 이 압박감은 불신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래서 복음을 들으면서도 ‘여기서 뭔가 획기적인 변화 곧 이들이 말하는 구원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 교제/결혼은 끝나버릴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자기 영혼의 구원에 진정성 있게 접근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속이거나 남들 앞에서 믿는 자처럼 가장하여 억지로 관계를 이어 나가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죄는 항상 우리를 복잡하고 어렵게 만든다.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갈수록 점점 더 깊어진다. 그 깊어진 관계가 믿지 않는 친구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신자의 선택을 더 어렵게 만든다(그리고 불신자의 회심도 더 어렵게 만든다). 정리할 수 없는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와 이성 교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애쓰지 말라.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순종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와 이성 교제를 하는 신자를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그 죄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그 관계를 정리하고 주 안에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만일 신자가 믿지 않는 자를 배우자로 삼아 결혼 관계를 이어 가려고 한다면, 교회는 분별에 따라 죄를 다뤄야 한다. 죄는 신자 개인의 거룩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거룩에 영향을 미친다. 죄를 적절하게 다루지 않는 것은 다른 지체들에게도 심각한 손해를 끼친다: ‘아, 저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구나. 저 정도라면 나도 해야지.’ 죄가 교회 안에서 만연해지는 것이다. 죄를 다룰 때, 신자와 불신자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다뤄야 한다. 신자의 죄를 징계하면서 불신자에게는 교회가 하는 일의 근거와 동기, 목적을 오해하지 않도록 전달해 줘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들을 때 벽을 세우고 귀를 막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교회의 다른 지체들도 노력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어쨌든 축하해줘야 할 일 아닌가? 나중에 잘 살면 그만이지’ 등. 반대의 극단으로는 죄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있다: ‘불신자랑 결혼한 사람이잖아,’ ‘얼마나 행복할지/불행할지 지켜봐야지’ 등.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롬 8:28).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죄 외에도 모든 죄를 비롯한 우리의 실수와 허물까지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신다. 그런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와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리기 원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넘어져도 계속해서 넘어진 상태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 복음의 은혜와 능력은 우리를 일으켜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고 친밀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신자와 결혼한 신자에게도 다른 죄로 고군분투하는 신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한 용서와 회복의 약속이 주어져 있다. 계속해서 죄책감과 수치심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번 칼럼 시리즈, 세 편의 칼럼을 통하여 분명하게 정립하기 원한 것은, 죄는 죄고 그 죄를 진정으로 회개할 때 용서와 회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말하는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불신자와 교제하는 것, 결혼하는 것은 죄다. 그리고 그 죄에 관하여 진정으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이미 결혼 관계를 맺어 이혼만이 관계를 정리하는 길이 아니라면 불신자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용서와 회복을 허락하신다.
결혼은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라고 믿고 불가침 영역으로 날을 세우는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르치고 순종하는 교회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개인의 생각, 공동체의 판단이 아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이 신자 개인의 행복과 그들이 맺는 관계의 참된 유익 그리고 교회의 거룩을 추구하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주님은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교회를 맡은 자들이 자기 생각과 세상의 조언을 따라 수많은 무리를 이끌어간다면 이보다 무책임하고 무서운 일이 어디 있을까? 목자장이신 분이 분부한 모든 것을 지켜 행하게 하는 것이 목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