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모호하지 않다.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라는 명령처럼 오해하기 힘든 요구도 없다(고전 7:39). 하나님은 신자가 신자와 결혼하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의 풍조나 요구와 많이 달라 보여도 신자끼리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다.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 외에도 우리는 여러 가지 성경의 가르침으로 분별하여 같은 결론에 실질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
1. 결혼의 목적: 그리스도와 교회의 친밀한 관계를 불신자가 추구할 수 있는가?
결혼은 단순히 개인의 행복을 위한 관계가 아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홀로되는 것을 ‘좋지 않다’고 여기셨고, 계획하신 그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셔서 부부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결혼을 창조하시면서 그 첫 번째 부부인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이후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육체가 된 모든 부부 관계의 목적을 규정하셨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과 바꿔버린 죄인에겐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을 다시 아버지라 부르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신자는 이제 부부 관계를 통해서도 다시 회복된 원래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남편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하여 남편 역할을 하는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아내 역할을 하는 방법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처럼 사랑으로 남편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결혼의 목적이라면 신자는 마땅히 이 목적을 함께 추구할 수 있는 배우자를 찾아야 한다. 불신자도 배우자를 사랑할 수 있고 때로는 (부끄럽지만) 신자보다 나은 배려와 공감과 용납과 신실한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혼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갈망이 없다. 배우자와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하거나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의 목적을 이루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자원 곧 그리스도와도 단절되어 있다.
배우자가 믿지 않더라도 신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역할에(남편이나 아내의 역할) 충성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보여주어야 할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다운 그림은 한 사람이 혼자 완성할 수는 없다. 둘 다 불신자로 있다가 먼저 구원받은 남편 혹은 아내가 홀로 결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힘겨워하는지 그들에게 물어보라. 왜 처음부터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배우자를 선택하는지 그 이유를 진지하게 물어볼 것이다.
2. 자녀 양육의 목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을 불신자가 원하는가?
‘누구와 결혼하는가’의 문제는 ‘자녀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와 직결된다. 배우자와 나 사이에 태어난 아기는 아빠와 엄마의 사랑과 양육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라고 모두 완벽한 부모가 되는건 아니다(사실 완벽한 부모란 없다!). 하지만 신자는 성경이 요구하는 명백한 자녀 양육의 목적을 수용한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신자는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길러낸다. 주의 뜻에 반하는 세상의 가르침을 배척한다. 자녀를 양육하는 목적도 분명하다: “믿는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다(딛 1:6).
이것은 단순히 같은 종교를 갖는 자녀로 키우는 것 이상이다. 신자는 인생의 결말이 영원한 심판이거나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소망이 없는지 알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인생이 얼마나 즐겁고 복된지 진실로 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하나님을 알려주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고 최선을 다해 영생의 길로 인도하고 또 구원을 위해 밤낮 부르짖는 것이다. 바울은 불신 남편을 둔 여자 성도에게 그들이 원할 경우 결혼을 유지하여 남편과 자녀를 구원하라고 명령한다(고전 7:14).
아마도 바울의 권면은 뒤에 나오는 “주 안에서만 (결혼)할 것이니라”의 명령에 비추어볼 때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아내만 구원받은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구원받은 남자와 결혼한 경우엔 두 사람이 함께 자녀를 구원하는 일에 힘을 합칠 수 있다.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달려 있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고 보호하고 무엇이든 주고 베풀고 마음을 쏟는 부모를 통하여 자녀는 가장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
하지만, 믿지 않는 배우자는 자녀가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관심이 없다(허용해 주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 심지어 자녀가 주를 알게 되는 일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녀는 아빠 혹은 엄마에게 신앙 상담을 하기 힘들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장성한 남성이나 여성의 모델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다. 세상의 거센 풍조와 가르침을 거스르면서 오직 주의 교훈과 뜻을 가르치려는 자녀 양육 방침에 믿지 않는 배우자는 반기를 든다. 자녀를 양육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필요할 때, 믿지 않는 배우자는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물론, 기복신앙의 방편으로 기도할 수는 있다). 물론 위로하고 공감하고 배려하고 섬겨주는 착한 남편 혹은 아내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배우자가 복음의 능력 안에서 더 힘을 얻도록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남편 또는 아내 홀로 믿지 않는 배우자와 그사이에 태어난 믿지 않는 자녀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하는 자녀에게 필요한 지혜와 힘과 은혜를 풍성히 베풀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결혼을 결정할 때, 왜 믿음 안에서 함께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함께 협력하며 기도하고 서로 위로하며 격려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나려 하지 않는가?
3. 구원의 목적: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에 불신자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가 함께 모여야 할 이유를 들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히 10:24). 주가 오시는 날이 가까울수록 신자는 돌봄이 필요하다. 세상이 가는 방향과 완전히 다른 방향, 세상이 추구하는 목적과 완전히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사는 신자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여 같은 방향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지속적인 교제를 통하여 돌봄과 격려와 위로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함께 자주 모여야 하는 이유이고,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습관적으로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행위를 진지하게 비판했다. 단지 교회 출석에 신경 쓰라고 한 말이 아니다.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로서 그 믿음대로 살도록 돕기 위해 반드시 친밀한 대면 교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정은 어떤 면에서 작은 교회와 같다. 대면 교제가 항상 이루어지는 곳이다. 물론 현대인은 부부가 각자 출퇴근하는 바람에 서로 얼굴을 보고 대화할 시간이나 여유가 없기도 하다. 하지만, 남편 혹은 아내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사람은 여전히 배우자다. 그들은 서로에게 민낯까지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친밀하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눌 수 있으며, 오래 같이 지낼수록 서로의 장단점을 잘 알고, 느끼는 것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이해한다. 신자에게 있어서 신앙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다.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가치관이 신앙에서 비롯되고, 믿고 바라고 추구하는 모든 것이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만일 배우자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돌보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에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지만, 만일 한 사람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한 사람은 우상을 섬긴다면(다른 종교뿐만 아니라 무형의 존재 즉 자신, 돈, 명예, 쾌락 등)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신앙에 관하여 배우자에게 얻을 수 있는 공감을 비롯한 유익이 전혀 없다.
물론 종교활동의 자유를 허락하고 주말마다 시간을 내지 못하는 배우자를 이해해 줄 수는 있다. 모이는 곳에 같이 가줄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주가 오심을 기다리도록 돕는 일은 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더욱 사모하게 하고 하늘에 쌓인 복을 헤아리게 하는 일은 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갈 수 있도록 넘어질 때 일으켜주고, 낙심할 때 말씀으로 힘을 주고, 반항할 때 주의 교훈으로 바로잡아주고, 한계에 부딪힐 때 중보기도 해줄 수 없다. 그래서 엘리스 프라일링은 <비그리스도인과의 결혼>이라는 책에서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할 때 이런 각오를 하라고 했다: “나는 나의 삶을 당신께(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당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를 맡기고자 합니다”(IVP, 2011).
우리는 결혼을 할 때 매우 신중하다. 어마무시한 빚을 가진 상대와 결혼하기로 결단한 경우, 우리는 적어도 그 빚을 갚기 위해 많은 세월 고생할 것을 각오한다. 그리고 웬만하면 감당할 수 없는 빚이 있는 사람은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복잡한 이성관계를 가진 상대는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으면 여간해서 만나지 않는다. 이어질 결혼 생활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박이나 음주 등 중독되기 쉬운 무언가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혼 생활 내내 어려움을 끼칠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피하는 게 지혜롭다. 키나 몸무게, 재력이나 인기 등 지나치게 조건을 따지는 사람은 문제가 있지만, 위에 진술한 것처럼 신중하게 결혼을 결정하려는 사람에게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혼은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칠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마무시한 죄의 빚을 탕감받지 못한 사람을 선택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상대를 만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을 때까지 죄에 중독되어 헤어 나올 수 없는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인생을 걸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그녀와 한 몸을 이루어 홀로 결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애쓰려고 하는가? 자녀 양육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홀로 수고하려 하는가? 왜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대상을 옆에 두고 구원을 이루는 믿음 생활을 하지 않고 홀로 구원함에 이르는 길로 힘들게 나아가려 하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행복을 위하여 신자와 결혼하라고 명령하셨다. 당신과 함께 그리스도와 교회의 아름다운 그림을 세상에 선포할 수 있는 사람, 당신과 함께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여 믿음에 이르도록 가르칠 수 있는 사람, 당신 곁에서 당신을 격려하고 위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줄 사람, 그런 사람이 당신의 배우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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