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기에,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는 성경 속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기이하게 느껴진다. 소돔의 멸망을 두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흥정하고 있다. 아니, 하나님이 심판이라는 문제를 놓고 사람과 협상하신다고? 나라면 결코 만들어 낼 꿈도 꾸지 못할 놀라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성경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 장면도 특히 기도라는 분야와 관련해서 의로움의 훈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데에 유익하다. 하나님께 말로 나아가는 것을 “기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게 바로 지금 아브라함이 하고 있는 일이다(대부분의 기도와는 달리, 여기에서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임재한 상태이다). 아브라함의 기도에는 참고할 수 있는 최소한 네 가지 특징이 있다.
1. 구체적이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기도할 수도 있었다. “주님, 거기에 의인이 여러 명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다지 많지는 않겠지만도 말입니다.” 아니,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정확한 숫자를 말한다. “쉰 명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마흔다섯, 마흔, 서른, 스물, 열….”
이 기도는 고아원 운영으로 유명한 19세기 성인 조지 뮐러를 생각나게 한다. 그는 “아버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세요”처럼 모호하게 기도하지 않았다. “아버지, 내일 아침까지 빵 110덩이와 신발 75켤레가 필요합니다”처럼 기도했다. 한번은 설교 집회를 위해 미국으로 항해하고 있었는데, 배가 짙은 안개에 갇혔고, 여행 전체가 좌초할 위험에 처했다. 선장에 따르면 뮐러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당신의 뜻과 일치한다면 오 분 안에 이 안개를 제거해 주십시오.” 뮐러는 얼마든지, “주님, 이 안개를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전능자에게는 오 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구체적으로 기도하기를 꺼린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선장 앞에서 얼마나 비참해 보이겠는가? 그리고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실망할 게 두렵기도 하다. 포춘 쿠키 속 글귀처럼 막연하게 기도한다면야 실망할 가능성은 훨씬 적어진다. 그러나 나중에 일어난 결과가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는지 아닌지 궁금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더 커진다. 실망감을 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오 분 안에 안개가 걷혔을 때 뮐러가 느꼈을 감격은 결코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소돔은 구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불타는 소돔을 보고 아브라함은 최소한 “차마 믿을 수가 없구나! 의인이 열 명도 없었다는 거 아닌가?”라며 결론내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기도가 그만큼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2. 긍휼의 마음
아주 뛰어난 교회 또는 조직이지만, 단지 몇 명의 문제 되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교회 또는 조직 전체를 깎아내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정반대였다. 그는 악한 도시 안에 있는 의로운 몇 명 때문에, 악으로 가득한 그 도시 전체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한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심판의 날을 오늘도 연기하신다(벧후 3:9).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내가 어찌 기뻐하겠느냐. … 오히려 그 길에서 돌이켜 살려고 하지 아니하겠느냐? … 나는 사람이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는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다. 그러므로 돌이켜서 살아라”(겔 18:23, 32)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아브라함은 원수를 사랑하고 감사하지 않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를 베푼다(눅 6:35). 그의 기도는 세상의 소금으로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미국을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이유는 아마도 이 나라의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아브라함처럼 기도하는 의인이 열 명 넘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 믿는 자들이 더 늘어나게 하소서.
3. 끈질기다
Importunity, 이건 내가 철자를 잘못 쓴 게 아니다. 이건 “특히 성가시거나 방해가 될 정도의 끈기”를 의미하는 오래된 킹 제임스 단어이다. 그렇다고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짜증을 냈다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 대화를 읽으면서 ‘와, 아브라함, 이 친구 배짱이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계속 오케이를 하시고, 아브라함은 거기에 감사하거나 만족하는 대신 오히려 더 밀고 나가라는 격려로 받아들인다.
이건 뭐 거의 다니엘이 “주님, 들으소서. 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여호와여, 제발 주목하시고 행동하소서”(단 9:19), 혹은 시편 기자가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부르나이다. 제발 서두르소서…”(시 141:1)처럼 무례하게 들리기도 한다.
누군가가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면(그러나 그런 기도가 성경에 나오는지 몰랐다면), 당신은 어쩌면 꾸짖고 싶다는 유혹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우리에게 본보기로 제시된 것이다.
늦은 밤 친구의 집 문을 끈질기게 두드리며 빵 세 개를 달라는 사람의 비유와 같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의 간청 때문에”(KJV, ESV에 따르면 “뻔뻔함” 때문에), 친구는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것을 준다”(눅 11:8; 참조 18:5)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차이가 있다면, 누가복음 속 사람이 ‘거절’의 대답을 거부한 반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거절’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화를 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기”를 원하신다(눅 18:1). 때때로 우리는 구하지 않아서 얻지 못한다(약 4:2). 어떤 때는 너무 빨리 포기해서 빈손으로 끝난다. 만약 아브라함이 쉰 명에서 멈췄다면, 그는 쉰 명이라는 약속을 가지고 떠났을 것이다. 대신에 매튜 헨리(Matthew Henry)가 말했듯, “그는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조건을 낮추었다.”
아브라함의 뻔뻔스러운 끈기보다 더 눈에 띄는 하나가 있다면, 그건 그의 요청을 계속 들어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한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사용해야 하는 끈질김을 인간관계에서 그대로 가져다 쓴다면, 당장에라도 상대편의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기도는 그 정도로 강력해야 한다. 우리가 관계를 맺는 분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기도에 진노하지 아니하시는 건(시 80:4) 그것이 그에게 기쁨이기 때문이다(잠 15:8). 하나님은 끈질기게 기도하는 신자를 기뻐하신다.
자, 우리도 끈질지게 기도하는 법을 배우자.
4. 경외의 마음
아무리 대담하게 보이더라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겸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하나님께 “만약에 소돔을 멸망시키면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친구가 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의 말은 “티끌이나 재밖에 안 되는 주제에,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창 18:27)라는 표현으로 가득하다. 또 “여호와는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말하리이다”(30, 32절)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예민해서 두려워했던 게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위대한 왕이시며, 현재 자신이 친숙함의 경계를 뛰어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조심해야 한다.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서두르십시오” 또는 다니엘처럼 “주의를 기울이십시오”라고 간구하려면 우리가 누구인지,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똑바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간구할 만큼 대담해야 하며, 또 하나님이 ‘그래’라고 대답할 때조차도 계속 압박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
주님, 제가 무엇을 압니까? 단지 먼지와 재일 뿐입니다. 나는 당신의 상담자가 아니며 당신에게 무엇을 하시라고 지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소원을 아뢰는 이유는 당신이 믿는 자에게 기도하라고, 요청을 말하라고 초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궁극적으로 소돔을 어떻게 처리하시든, 그건 당신의 몫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신다면, 이것이 바로 지금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뭔지 안다고 자신하지 말자.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서 지금 내가 하는 기도의 지경을 더 넓히도록 하자. [복음기도신문]
원제: Holy Haggling: Learn to Pray like Abraham
저스틴 딜리헤이 Justin Dillehay | 저스틴 딜리헤이는 The Gospel Coalition의 협력 편집자로 미국 테네시주에 있는 Grace Baptist Church의 목사로 섬기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제보 및 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