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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다음세대 목회자 훈련의 필요성

사진: Nicholas Safran on Unsplash

 TMAI  Korea 를 준비하며 The Master’s Seminary 의 졸업생들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글로 2022년에 TMS를 졸업하고 미국 엘에이에 소재한 Grace Bible Church 에서 섬기다가 귀국하여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고 있는 강 민구 목사의 글을 소개합니다. (관리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며 확신을 갖게 된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신학대학원은 목회자를 만드는 곳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다음세대 목회자 훈련의 필요성에 대한 글을 쓰는 서두에 왜 이러한 말을 하는지 의아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수준 높고 양질의 좋은 훈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한 사람을 목회자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훈련은 목회자를 만들 수 없다

목회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는 것이다. 목회자 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자 은혜로운 부르심의 결과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교회의 리더십을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 허락하신 것처럼(딤전 2:11-14; 3:1-13), 목회라는 사역은 하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다. 오직 남자 중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신 자만이 목회의 소명에 순종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으며, 살아낼 수 있다(딤전 3:1-7, 딛 1:5-9).

바울은 어떻게 말하는가? 그는 교회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한다(엡 4:15; 5:20, 고전 12:12). 몸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각각의 역할이 다르다(엡 4:16, 고전 12:14-21). 성령께서 각자에게 부어주신 은사가 다르다(롬12:3-8). 곧 맡겨진 일이 다르며, 감당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와 능력이 서로 다르다(고전12:23-25). 그 다름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지 않다. 그 원인은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부어주신 주권자 하나님께 있다(롬12:3-6). 그리스도께 있다(엡 4:7-8). 성령께 있다(고전 12:11).

그러므로 목회자는 똑똑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학식이 많아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인품이 훌륭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해, 더 많은 훈련을 받아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더 좋은 훈련을 받아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더 힘든 훈련을 받아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에 의해 태어난다.

나는 훈련의 필요성을 말하기 이전에 이 사실을 먼저 강조하여 말하고 싶다. 스스로에게 목회자로서 어떠한 근거와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고 계획하셨다면, 그는 목회를 해야 하고 소명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서게 된다. 베드로가 그러했고, 바울이 그러했다. 한 명은 그리스도를 부인했고, 다른 한 명은 그리스도를 핍박했다. 하지만 이 둘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 앞에 굴복하여 기쁨과 감사로 목회의 사명을 감당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나는 본래 재즈 색소폰을 전공했다. 음악이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했고,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목회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고, 그 길을 향해 나아간 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목회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그 소명을 나 자신에게 적용할 마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때에 놀랍게 역사하셨다. 음악 공부를 위해 떠난 미국 유학 길에서 전에 없던 목자에 대한 소망을 가슴에 불어 넣으셨다. 결국 목회의 길을 선택한 건 나 자신이지만, 배후에서 그 길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이 사실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 한다. 다음세대의 목회자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워진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신다.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어머니 뱃속에서 갓 태어난 아기는 부모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양육을 필요로 한다. 적절한 교육과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태어난 아이에 대한 양육권을 부모에게 허락하셨고, 그 영광스러운 책임을 그들에게 부여하셨다(엡 6:4). 부모로부터 올바른 훈련을 받고 자란 아이는 지식과 지혜와 인격에 있어서 마치 잘 자란 사과 열매같이 풍성하여,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덕을 끼친다(잠 19:18-20; 19:27-8; 22:6,15). 좋은 훈련으로 양육된 아이는 결국 다른 사람의 마음을 건설시키는 복된 삶을 살아낼 가능성이 높다.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남자(딤전 3:2) 또한 마찬가지이다.

  1. 성경 말씀은 훈련을 지지한다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훌륭한 목회자는 누구일까?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영적 리더의 원인이시고 기준이시며 본이시다. 그분의 모든 목자의 목자장이시다(벧전 5:4).

목자장이신 우리 주님은 3년의 공생애 사역의 첫 출발을 제자를 부르시는데 할애하셨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전도하셨다(막 1:15, 마 4:17; 23; 5-7).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사셨다. 말씀과 삶으로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당신은 기억하는가? 부활 뒤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 주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대사명”을 말이다. 그 사명은 제자 낳는 삶의 필요성이었다. 제자훈련을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많은 신학자가 존경하고 롤모델이라고 말하는 바울은 또한 어떤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담대히 외쳤던 그의 삶은 어떠했나? 나는 바울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싶다. 다음세대 목회자 훈련에 전 인생을 바친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는 모든 전도여행을 그의 제자들과 동행했다(행13-20).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 진리와 삶과 인격으로 후배 목회자들을 훈련시켰다.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때는 바울이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이다. 그 때 그는 영적 아들이자 에베소 교회 목회자였던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딤후 3:10-11)

바울은 목회자 직분의 원인은 하나님이시며, 주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 역설했던 자였다(엡 4:11; 딤전 3:1-7). 주권적 은혜의 교리를 선포했던 자였다(엡 2:8-9).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하지 않았다. 악용하지 않았다. 은혜받은 자로서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이 부모에게 양육의 책임을 부여하시듯, 영적 아버지로서 후배 목사인 디모데를 아들과 같이 양육하고 훈련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범사에 영광을 받게 하시기 위해 그분이 공급하시는 힘과 지혜로 디모데를 훈련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벧전4:11). 그의 삶을 바쳐 디모데를 키웠다.

예수님과 바울의 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훈련은 옵션이 아니다. 필수다.” 이 원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된다. 하지만 목회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디모데가 그러했듯이, 우리는 좋은 리더로부터 양질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훈련은 목회자를 진리의 일꾼으로 성장시킨다

하나님이 목회자의 조건을 남자로 제한하신다(딤전 3:2, 딛 1:6).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신 남자는 합당한 목자/감독이 되기 위해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태어난 아기가 성장을 멈추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목사의 은사를 받은 사람 또한 그렇다.

목회자의 소명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을 꼽자면 그것은 “말씀 선포”일 것이다.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이며, 말씀 선포를 통해 성도를 죄악에서 돌이켜 빛 되신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하는 자이다. 설교는 목사의 핵심 사역이며, 가장 우선적 사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고 성화시키시기 때문이다. 설교는 모든 영적 사역의 핵심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물론 바울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은 “강단에서 설교하라”는 의미로 제한할 수는 없다. 공적이든 개인적이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의미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 모두는 그들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킨 십자가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 하지만 목회자는 더욱 그 일에 힘을 써야한다. 특별히 설교 강단에서 담대히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의 설교 강단은 어떠한가?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잘 선포되고 있는가? 진리의 대변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성경 말씀에 계시된 주의 음성을 성도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함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가?

20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자로 평가받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유럽 교회가 쇠퇴한 원인과 책임을 설교자에게 묻는다. 그의 책 “설교와 설교자”에서 그는 말한다.

“영국 교회들을 텅 비게 만든 책임은 대부분 ‘사회복음적인’ 설교와 ‘복지시설 교회’에 있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거기에 무엇보다 큰 책임이 있다. 교회의 사명이 단지 정치, 사회적인 개혁과 평화주의를 전하는 것이라면 굳이 교회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당연히 대두되었다. 그런 일은 정치 단체에서도 능히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굳이 교회까지 가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는 신문에서도 매일 읽을 수 있고, 바로 그런 목적으로 세워진 정치 기관이나 사회 기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설교가 언제나 첫 자리에 와야 하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교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가 그들이 원하는 말씀을 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며, 교회의 메시지가 세상의 뜻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점 교회에게 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의 본질은 구별되지 않음에 있다.

목회자는 먼저 성경 말씀에 대한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 말씀의 권위에 대한 영적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영안이 열려야 한다.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으로 성도를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말씀의 대리인으로서 목회자는 먼저 진리 앞에 엎드려야 한다.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자와 불신자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또한 말한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옳게 분별”이라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여행자가 목적지에 직접 갈 수 있도록 ‘직선 방향으로 길을 자르다’라는 의미이다.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의 말처럼, 설교자는 성경을 해석하고 강해할 때, “한편으로는 정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명해야 한다.” 영적 목표, 즉 성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목사는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 양육해야 한다.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파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말씀을 올바로 관찰하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을 옳게 분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목회자나 신학교 교수의 지도와 도움이 필요하다. 건강한 배움이 필요하며 건전한 훈련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며,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성경해석의 원리를 추구하는 훈련 센터나 신학교/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한 목회자를 성숙한 설교자와 신학자로 성장시키신다.

먼저 올바른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먼저 복음의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복음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먼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건강한 성경적 원리를 제시할 수 있다. 적용시킬 수 있다.

교회에서 성도와 대화를 나누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구원받은 성도는 설교 강단에서 인본주의적 사상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 복음을 듣기를 원한다. 생명의 떡과 물이신 그리스도를 영의 양식으로 먹고 마시기를 원한다. 만약 복음이 아닌, 인간의 사상을 양식으로 제공한다면 그들은 분명 병이 들 것이다.

당신은 오직 복음의 능력만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고 가르치는 신학교/신학대학원을 찾으라. 성경 교사를 찾으라. 구하라. 두드리라.

포스트모더니즘(절대 진리는 없다는 사상)과 자유주의(성경의 권위를 부정), 극단적 은사주의(하나님의 직통계시가 오늘날 존재한다고 주장)가 범람하는 이 때에, 성경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간구하라. 요청하라. 주의 뜻대로 구하는 자에게 넘치는 은혜로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의뢰하라(요일 5:14). 은혜의 주인께서는 분명 놀랍게 응답해 주실 것이다.

훈련은 목회자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킨다

나의 삶에서 힘든 순간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신학대학원에서의 5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곳에서의 훈련은 두 개의 선물을 내게 안겨주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의 죄악과 무가치함을 아는 지식’이었다.

내가 경험한 신학 훈련은 하나님의 계시, 즉 말씀의 렌즈로 그리스도 예수를 보고 느끼고 맛보도록 인도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했다. 그분의 찬란한 영광에 압도되어 감히 그분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나라는 존재됨을 더 자각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가장 직면하기 힘들었던 게 무엇인 줄 아는가? 복음을 잘 알고 있노라 굳게 믿던 나의 신념이 부서진 것이었다. 실상 나는 그리스도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복음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할수록 나의 교만과 오만이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라는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는 오직 주권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만 영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압도했다. 하지만 그 연단의 훈련이 너무도 보배롭고 귀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판명날 때, 예수께서 나의 지혜와 능력으로 드러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어짐의 훈련은 목회 현장에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 내가 상하고 부서진 심령으로 성도에게 다가갈 때, 오히려 감동하고 격려를 받았던 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다. 참된 신학 훈련은 결코 지식적인 깨달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참된 훈련은 하나님을 알고 나 자신을 알게 한다. 그래서 인격과 삶이 변화한다. 성도에게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말씀을 먹고 적용하는 자리에 선다. 설교 강단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말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그 아가페 사랑에 감동하여 아내를 사랑하는 자리에 선다. 때로는 사랑에 실패하여 낙심의 눈물이 얼굴을 덮을 때에도, 실패하지 않으시는 예수께 도와달라 간청한다. 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훈련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훈련은 의존하지 말아야 할 대상과 의존해야만 하는 대상을 깨닫게 한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여. 사랑하는 목회자 지망생들이여. 훈련을 사모하길 바란다. 우리는 주께 받은 은사를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할 소명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옳게 분별하기 위해, 인격과 삶이 변하기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 주의 부르심을 확인하기 위해,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제자가 되기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히 4:12) 진리의 말씀으로 마음을 점검하기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 에스라와 같이 올바른 신학을 공부하고 연구하여 삶에 적용함으로 인격과 삶이 성화하기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

복음의 영광 앞에 엎드려 그리스도의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힘입어 성도를 향기로운 제물로 아버지께 드리기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성경 한 구절을 나누고 글을 마치기를 원한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1-2)

[복음기도신문]

강민구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GTK 칼럼] 강해 설교란? 왜 강해 설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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