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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강해 설교란? 왜 강해 설교인가?

▲ 사진 : Amonwat-Dumkrut on Unsplash

TMAI Korea를 준비하고 있는 The Master’s Seminary의 졸업생들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로 2023년에 TMS를 졸업하고 현재 새 삶 침례교회에서 섬기고 있는 김도련 형제의 글을 소개합니다. (관리자)

설교의 역동성은 설교자뿐만 아니라 성경, 성령, 그리고 청중(신자와 비신자 모두 알곡과 가라지)을 포함합니다. 역사를 주목해 보면 지난 수천 년 간 수많은 설교자들이 다양한 문화와 현실 속에 살아가는 청중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권위 있고 영감으로 쓰인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다른 하나는 이 말씀의 저자이자 성자들의 마음 가운데 진리를 살아내게 하시는 성령님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변할 수 있는 요소들(설교자와 청중)에 의존하기보다는 불변하는 요소들에 집중해야 합니다. 따라서 설교자와 청중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가까운” 설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기쁨과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설교가 가장 합당한지 이해해야 합니다.

강해 설교가 무엇이며 왜 교회의 강건함에 필수적인지 논하기에 앞서, 먼저 강해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깊은 영적 유익을 제공한 신실한 목회자들의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영국에서는 마틴 로이드 존스와 존 스토트, 미국에서는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S 루이스 존슨, 존 맥아더와 같은 목회자들이 강해 설교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옥한흠 목사님이 매주일 강해 설교를 하셨고, 그분의 설교는 강해 설교 연구의 중요한 사례로 다뤄지기도 했습니다. 이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각기 다른 목회 철학, 교리, 교단에 속해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평생 강해 설교를 통해 말씀을 전파하는 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들의 노고 덕분에 수많은 교인들이 풍성한 축복과 은혜를 받았으며, 그 열매는 오늘날까지도 교계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렇듯, 교회의 건강은 목사-교사의 설교에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 떼를 먹이고 성도를 봉사의 일에 온전하게 하시는 수단으로 설교를 택하셨으며(엡 4:11-12), 참된 변화는 성경적인 설교를 통해서, 즉 진리가 성도들의 내면 속에 깊이 스며 드는 설교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목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에게 먹일 때, 그 양 떼는 행복하고 건강한 무리가 됩니다. 반면, 이러한 선한 목자를 잃은 양은 건강을 잃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목자는 양들이 “패스트푸드”를 섭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파이프를 통해 흐르는 생명수를 마시도록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물을 지속적으로 깨끗하게 공급해 줘야 합니다.

강해 설교의 정의

첫째로, 강해 설교는 가장 간단한 정의로 “본문에 충실하고 삶에 적합한” 설교입니다. 이러한 설교에는 “두 다리”(legs)가 있습니다. 첫째, 본문의 해석이고 둘째, 본문의 적용입니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으로 첫 번째 단계는 구절을 설명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그 진리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 두 다리/단계 사이에는 시간, 문화, 언어 등의 큰 간격이 존재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 두 세계를 지혜롭고 충실하게 연결해야 합니다. 그는 옛것을 보존하면서도 새것을 구축해 나가기 위해 고대 세계와 현재를 연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자신의 기질, 성향과 목회 철학에 따라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두 요소 간의 올바른 균형을 찾는 것도, 적절히 섞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에 충실하고 성도가 현재 겪고 있는 영적 삶에 적합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설교자에게는 중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성과 능력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야 합니다. 본인-중심이 아니라 말씀-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성경은 양을 먹이지 않고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목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예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겔 34:1-6). 참된 목자-교사는 무리를 먹이고 양육하라는 주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온전히 전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양 떼의 삶에 적용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요 21:15-17). 첫 단계에서 본문에 충실할수록, 다음 단계에서 성령의 열매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인 “설명하기”에서 해석은 필연적입니다. 본문의 올바른 해석 없이는 저자가 전달하려는 의도를 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먼저 본문의 저자가 의도한 뜻과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을 적용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합니까?’, ‘본문의 뜻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들리지만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진리는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설교자 외부에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자의 의도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 그의 생각은 무엇이었는지- 그가 어디에 있었고, 그의 상황은 어땠으며, 대상은 누구였는지, 왜 썼는지, 그의 톤과 언어는 어떠했는지 등이 중요합니다. 즉, 강해 설교는 깊은 주해적 이해에 기초합니다.

신학교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는데, “문맥(text) 없는 본문(context)은 위장(pretext)에 불과하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추출하기 위해 성경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숙해야 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추측을 본문에 투입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나무에 박힌 못 하나가 성경의 원 의미라 생각하고 비교하자면, 그는 나무에서 그 못을 빼내야 하며, 자신의 못(들)을 나무에 박아서는 안 됩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전자는 주해(exegesis-본문의 의미를 끌어내는 것)라고 하고, 후자는 자기 해석(eisegesis-본문에 자신의 의미를 넣는 것)이라고 합니다. 못을 박는 것이 박힌 못을 빼내는 것보다 훨씬 쉬운 것처럼, 본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단계에서 많은 노력이 요구됩니다. 실제로, 존 맥아더와 옥한흠 목사님은 주일 단편 설교 준비를 위해 평균 25시간 이상을 투자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강해 설교에서 본문의 의미, 즉 저자의 의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모르는 설교자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대언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지만 어떠한 주제를 대응하게 되더라도 그는 하나님을 대언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기록된 계시로 주어졌으며, 우리는 그분의 정경화 된 말씀(신구약)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또한 설교자가 자신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의도하신 것이란 확신이 없다면, 그의 메시지는 어떠한 권위와 확신으로 전달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강해 설교자의 최우선순위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딤후2:15).

이 첫 번째 단계의 어려움 때문에 이를 건너뛰고 다음 단계인 “적용하기”로 넘어가려는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그 반대로 설명만 하고 적용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균형한 상황을 태양으로 비교하자면 ‘열기만 있고 빛은 없는’ 본문과 동떨어진 설교가 되거나, 또는 ‘빛만 있고 열기는 없는’ 단순한 강의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본문의 적용은 본문의 해석에 직접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 단계를 생략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의미를 철저히 연구하고 이해해야 하며, 그 진리를 성도에게 명확히 전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첫 번째 단계인 “본문 설명하기”는 설교자가 매우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부분입니다. 목회자가 성경을 더 연구하고 본문의 의미에 더 충실할수록 적용 또한 더 정확하고 성경적이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4장 13절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처한 상황과 이 말의 의미를 더 깊이 탐구하고 이해할수록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말하고 있는 것), 적용 또한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설교자는 본문을 잘못 해석하거나 오용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가르쳐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적용하기”입니다. 이 단계는 본문의 진리를 청중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입니다. 성경이 현재 성도들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었으며, 구절들이 그들의 신앙생활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연결시켜야 합니다. 성경 교리와 성도의 삶을 연결하는 ‘경첩’과 같은 역할인 것입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나 ‘행동 지침’(how-to)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본문의 진리가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도록 적용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이 말씀을 단순히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에 반응하여 인격과 삶이 변화되며, 주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강해 설교는 성경 이야기나 지식적인 사실로만 끝날 수 없습니다. 강해 설교는 청중이 메시지를 듣고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리도록 촉구합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진정한 강해 설교란 기술적인 사항들을 원리나 교리로 변환하여 적절한 적용이 가능한 신학적인 설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강해 설교는 성경적 교리를 통해 성도의 지성, 감성, 의지 등 전인격을 다룹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기록된 “가르침,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함”을 개인의 삶에 적용합니다. 이는 단순히 바른길로 인도하는 가르침뿐만 아니라, 잘못된 길로 벗어난 자들을 꾸짖는 책망과, 그들을 다시 바른길로 되돌리는 바로잡음, 진리를 마음에 깊이 새겨 계속해서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훈련까지 포함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설교는 항상 “여러분”이라는 2인칭의 개인적인 호소를 통해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삶에 대한 적용을 촉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적용은 이 단계에서 이루어집니다. 목자는 자신의 양 떼에게 알맞은 격려와 책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하기에, 그들의 영적 건강과 연약함을 잘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설교는 아주 친밀하고 관계적인 것이므로 설교자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상처받은 영혼들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까지 포함한 ‘대병원’입니다. 따라서, 설교는 치유를 위해 청중의 마음을 깊숙이 찔러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청중의 “마음을 찔러” 합당한 회개에 이르게 한 것처럼(행 2:37), 정반대인 “수술은 성공했지만 환자가 사망했다”란 상황이 절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생사 여부가 방금 들은 설교의 적용에 따라 결정되므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이 적용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강하게 적용을 촉구했던 강해 설교자의 한 예로 사도 야고보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그 당시 억압받고 있던 형제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이 고난을 참을 이유라고 격려하며(약 5:7-12), 그 재림을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7절에서 그는 농부가 다가올 수확을 바라는 것처럼 인내하라고 예시를 제시하고 8절에서는 “너희도 길이 참고…”라며 바로 적용합니다.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실천적이며, 야고보는 계속해서 형제들과 불신자들을 향해 가장 필요한 핵심을 찌르고 격려/책망합니다. 그의 적용은 믿는 자뿐만 아니라 비신자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행함을 권하는 명백한 위로이지만, 불신자에게는 “난 할 수 없다. 난 그리스도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깨달음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기반으로 한 성경 교리는 시대를 초월하며, 이를 토대로 건강하고 합당한 적용이 우리 삶에 이루어집니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 또한 이 영적 양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따라서 강해 설교자는 단순한 “통역자”에 그치지 않습니다. 통역자는 스피커가 말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고 전문적으로 전달하는 데서 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피커가 말하는 메시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의 말을 자신의 삶과 사랑하는 영혼들, 즉 양 떼의 삶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 중 설교자는 본인과 청중 모두를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어 말씀을 사모하고 순종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신 6:5). “사랑의 하나님”을 알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편 23편을 읽는 것과 그 시편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는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듯이, 강해 설교자는 사랑의 하나님과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깊이 알아야 합니다.

강해 설교의 중요성

마지막으로 강해 설교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누군가는 “강해 설교가 아니어도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축복을 누릴 수 있는데, 왜 꼭 강해 설교가 필요합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강해 설교가 아니더라도 주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글의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의미에 충실하려면, 우리는 가능한 모든 수단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기쁨에 “가장 가까이” 거해야 합니다. 설교 스타일은 설교자의 기질과 성향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은 변하지 않는 요소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가깝고 충실한 설교인 강해 설교로부터 얻는 유익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1. 성경을 유일하고 충분한 권위로 받아들이며,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권위로 세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주권을 교회 전체가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 성경 본문에 근거해 말하는 것을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본문에서 시작하여 본문으로 이어지고 본문으로 마무리됩니다. 설교자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하는 대신, 성경 자체에 충실하기 때문에 해석이나 적용의 오류가 줄어듭니다.

3. 성경 안의 진리를 신중하면서도 부지런하게 연구하도록 장려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순환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고, 직선적이며 객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는 높은 기준의 자기 절제와 개인의 경건을 요구합니다.

4. 성도의 생각을 인도하고, 마음을 뜨겁게 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르도록 의지를 재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감사하며 경배하도록 이끕니다. 성경의 이해가 깊어질수록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정도 또한 높아집니다.

5. 구약과 신약 설교자들의 예를 따르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강해 설교를 했고, 예수님 또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율법과 선지자와 성경 전체를 강해하셨습니다(눅 24:44).

6.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책임을 성령님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넘기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옵니다(롬 10:17). 설교자는 감정적인 영감을 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명확히 전하기 위해 있습니다.

7. 교리와 삶 사이에 강력한 연결을 구축하고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는 것’들을 삶으로 살아냅니다. 강해 설교는 진리를 알고 (지식), 진리를 믿고 (확신), 진리를 사랑하여 (애정) 진리를 실제로 살아가는 것을 돕습니다.

그러므로 강해 설교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 시대, 종교 개혁 때나 불과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필요합니다. 성도의 믿음과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의 전파함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고 가르쳐지지 않는다면, 성도는 멸망할 것입니다(호 4:6).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리고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먹이는 것이 목사의 책임입니다—모든 인내와 교훈으로 설교하는 것입니다(딤후 4:2). 성도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닌, 그들이 들어야 하는 말을 사랑과 진리로 전해야 합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 강단에 서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구로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침묵하거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귀에 부드럽고 달콤한 말만 전할 수는 없습니다. 강해 설교자에게는 오직 “하나님께서 내가 무엇을 말하기 원하시는가?”라는 질문만 있어야 합니다. 본문을 충실히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능력을 끊임없이 가꾸어, 성도들이 강건해져 교회 사역에 준비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강해 설교가 올바르게 이루어질 때,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고 다른 이들을 제자화하며, 경건과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고, 주변 세상에 영향을 미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복음기도신문]

김도련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GTK 칼럼] 기독교 신앙의 근간: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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