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성서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설명하기 위해 지존무상(至尊無上)과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그 지존무상한 긍휼이 제한된 실체인 인간적 측면에서는 어떻게 보이는 걸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분의 긍휼은 재현 가능한 것일까?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경이롭고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긍휼하심을 다윗과 장애인이었던 사울 왕의 손자인 므비보셋의 예증을 통해 잘 보여준다. 인간적 견지에서 보면 므비보셋은 다윗이 친구가 되어주고 친절을 베풀어 줄 상대로는 생각지도 못할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그는 이 세상에 유일하게 생존해 남아 있던 사울의 단 한 명의 상속자였으며 왕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 생득권(生得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윗이 그를 찾았을 때 사람들에게 잊혀져 두려움에 떨며 어찌할 바 모르는 버림받은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호의를 구하지 않았고 다윗 자신 또한 그에게 아무 법적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므비모셋에게 어떤 의미로는 거룩한 긍휼함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크나큰 은혜를 베풂으로 곤궁한 이들을 위한 기독교 사역이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다윗과 사울은 너무나도 달랐다. 걸출하고 위풍당당하며 체격이 건장한 사울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스라엘의 왕이었으나 그는 비참하게 실패했고 엄청난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은 그를 거부하셨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울의 계승자(그리고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태어날 왕의 혈통을 세우시기 위해)인 다윗은 몸집이 작고 나이가 어리며 사무엘에게서 왕의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치는 양치기였다. 물론 사울은 하나님이 이미 자기를 거부하셨고 다윗을 축복하셨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사울의 다윗에 대한 살기등등함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그의 분노와 피해망상은 끝내 그 자신을 광기로 몰고 갔다.
그는 다윗을 죽일 목적으로 끈질기게 추격한다. 사울은 이렇게 하여 그의 권력과 왕권을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허비한다. 이것은 사울의 군대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배를 당하기까지 긴 세월간 계속되었다. 사울은 그 전쟁에서 치명상을 입고 마침내 자신의 칼을 취해 그 위에 엎드러졌다. “이와 같이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그 온 집안이 함께 죽으니라”(대상 10:6)
사울의 숨을 거둔 아들 중 하나가 요나단이었다. 비록 스스로 사울은 다윗의 철천지원수가 되었지만, 요나단은 세상에서 다윗의 가장 절친한 벗이 되었다. 블레셋과의 참담한 전쟁에 이어 다윗은 요나단뿐만 아니라 사울을 위해서도 애통해했다(삼하 1:17).
다윗이 사울이나 그의 가족에 대해 긍휼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사울은 오랜 세월 동안 다윗을 방랑하는 망명자로 내몰아 그가 도망 중에 굴속에 살게 하는 등 다윗의 삶을 극도로 힘겹게 한 사람이다.
게다가 중동지역의 왕들은 흔히 다윗과 같은 상황에서는 모든 반란의 위협을 막고 왕권 계승 주장이 가능한 모든 이를 제거하기 위해 이전 왕가의 일족은 모조리 죽이는 것이 일반이었다. 사울의 집을 향한 다윗의 행동이 이와는 정반대였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다윗은 오래전에 요나단과 언약을 맺으며 요나단의 자손들에게까지 그의 인자함의 손길을 뻗칠 것과 요나단이 다윗에게 한 것처럼 그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약속을 했다(삼상 20:15-17).
그로 인해 사무엘하 9장에서 우리는 단 하나 남아 있던 요나단의 아들인 불구자 므비보셋을 향한 다윗의 인자함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읽게 된다. 이 이야기는 다윗이 친구와 맺은 언약을 의식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삼하 9:1)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가 므비보셋을 밝히어 아뢰기를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삼하 9:3)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후 당황과 공포 속에서 므비보셋의 유모는 안전한 곳으로 그를 피신시키려 했다. 다급함으로 서두르다 어린 므비보셋은 넘어졌거나 아니면 유모가 그를 떨어뜨렸을 것이다. 성서는 그의 부상의 원인에 대해 상세하게 말하지 않는다(삼하 4:4). 어느 쪽이든 그 사고는 므비보셋에게 일생을 정상적으로 걷지 못하게 하였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영구적 장애자로 만들었다.
다윗이 사울의 자손에 대해 알아본 것은 그가 마침내 블레셋을 패배시키고 경쟁자 없이 왕위에 올랐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는 분명 수년이 흘렀을 것이고 므비보셋은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살고 있었다(삼하 9:4). 이미 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이 하나 있을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삼하 9:12). 로드발은 요단 동쪽에 있으며 다윗이 쫓아올 것을 우려해 므비보셋은 바로 그곳에 숨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위협하는 대신에 그를 데려오라 한다.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삼하 9:6)
다윗은 즉시 므비보셋에게 자신의 의도는 전적으로 그 젊은이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은 자비임을 분명하게 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삼하 9:7)
이것은 놀라운 환대(歓待)였다. 다윗은 므비보셋의 신체적 그리고 물질적 필요만 공급한(삼하 9:9~11) 것이 아니라 사실상 그를 입양한 것이었다.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삼하 9:11)
므비보셋의 답변은 그가 견뎌야 했던 수치감과 많은 세월을 사회적으로 버림받아 살아온 사람들의 특성인 비하적 태도를 반영한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삼하 9:8) “죽은 개”란 물론 극단적인 멸시감의 표현이다. 그 문화권에서는 사람을 “개”라고 부르는 것만 해도 용납될 수 없었다. 하물며 누군가를 “죽은 개”라고 부르는 것은 갑절의 부정(不浄)함을 암시했다.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조소적 표현을 므비보셋은 자신에게 적용했다. 필시 오랜 세월 고립되어 심한 부상과 버림받음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모든 존재가치를 잃었을 것이다. 그는 누군가로부터의 더구나 므비보셋 자신의 조부가 집요하게 박해했던 다윗. 이제는 권력과 인망(人望) 있는 왕이 된 다윗의 호의적인 대우에 므비보셋은 금방 익숙해질 수 없었다.
권리상, 다윗은 사울에 속했던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가 새로운 왕이었다. 대신에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사울의 모든 소유를 되돌려 주며 이전에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종들을 므비보셋을 위해 일하게 했다.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삼하 9:10)
이 절은 또한 시바에게 열다섯 명의 아들과 스무 명의 종이 있었으며 그 서른다섯 명은 즉시 사울의 땅을 갈고 거두었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므비보셋에게 유용한 수입원이 되었다.
우리는 13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미 3절에 언급된 바 있는 “그리고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삼하 9:13)는 놀라운 기록을 다시 발견한다. 이 반복적인 어조는 우리에게 그 사실의 놀라움을 전해 준다. 이미 버림받아 숨어 살며 자존감도 명예도 없고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원수의 손자가 왕에게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왕의 아들들과 나란히 최고 특권 지위에도 올랐다는 것은 우리들의 시각으로 볼 때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윗의 므비보셋을 향한 긍휼함, 사랑, 그리고 인자함은 본받을 만하다. 이것은 우리의 이웃인 버림받은 이들, 장애인들, 소외계층들, 그리고 낙오자들에 대해 모든 성도가 따라야 할 사역의 본보기다.
므비보셋에 대한 다윗의 긍휼함은 틀에 박힌 상투적인 형식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격려의 편지를 쓰거나 한 번의 구호 선물을 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므비보셋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와 궁전을 나누었다. 그를 위해 다윗은 자신의 재원(財源)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삶을 주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궁전으로 데려와 부귀를 누리게 했으며 왕자 중 하나처럼 대했다.
다윗이 이렇게 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요나단을 사랑한 연고만은 아니었다. 3절의 말씀이 중요하다.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그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예시(例示)하기 원했다.
그것이 정확히 다윗이 실천한 일이다. 다윗이 취한 태도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잘 보여준 예표다. 다윗이 요나단을 위해서 므비보셋에게 자비함을 보인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님 때문에 성도들에게 관대하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인자하심과 깊은 자비하심은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 누릴 자격이 없으나 그분의 사랑과 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람들이 되어 법적으로 예수님께 속한 은총의 수취인(受取人)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며 다음 글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은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삶이 본보기가 되었다. [복음기도신문]
존 맥아더(John MacArthur)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