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셨을 때 그가 사람을 부르셨던 이유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서였다(누가복음 13:24). 때로는 구원받도록 강권하셨다(요한복음 5:34). 그리고 어떤 때는 영생을 기업으로 물려받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마가복음 10:30).
이 모든 세 가지의 표현은 회심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가리킨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는 구원받아 영생을 기업으로 물려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믿는 자들의 육체가 천국에 거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믿는 자는 모든 영적 지각에 있어서 그리스도 통치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직 우리가 육체적으로 천국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천국의 영역에 우리의 영적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천국의 것들에 전념해야 함이 마땅하다. 사실상 우리는 천국을 주의 깊게 생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도성(都城)을 구하던 것과 같이 애써 추구하며 우리의 생각을 그곳에 고정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마음에서 세속적인 것을 뿌리 뽑아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이 삶의 집착에서 끊는 것을 배워, 영원을 향해 앞을 바라보며 확고한 기대감으로 살아야 한다. 이는 세속과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눈길을 돌려 천국의 주인이신 그분께 지속적으로 시선을 고정하는 것을 뜻한다.
천국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뜻하신 풍성한 삶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속적 안락함을 추구하는 이들은 사실 지구에서 가장 편치 않은 사람들이다. 청교도 신학자 리처드 백스터가 쓴 것처럼.
천국을 바라보는 마음은 기뻐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평안히 사는 진정한 지름길이며 이것 없이는 당신은 절대 평안할 수 없다. 사람이 불 가까이에서 따뜻하지 아니할 수 있는가? 햇빛 아래에서 빛을 받지 아니할 수 있는가? 마음이 천국에 있으면서 평안을 아니 가질 수 있는가? 반면, 천국으로부터 먼 삶을 사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그토록 얼어붙은, 즉 인생의 평안함이 없는 성도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오, 성도여, 일어나라. 그리고 믿어라. 천국은 세상보다 비교할 수 없이 따뜻하다는 것을…. [1]
백스터는 계속 이어 쓴다.
생활 방식을 천국에 고정한 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라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에 만약 이것이 우리에게 없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다. 자녀들이 짚을 먹고 누더기를 입으며 걸인하고만 어울린다면 아버지에게 치욕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항상 아버지 앞에 서 있어야 하며 그분 앞으로 이끌려져야 마땅한 그분의 자녀들이다. 하지만, 그저 이 세상에서 먹으며 우리의 영혼의 옷은 벌거벗은 세상과 같아 우리의 마음이 흙과 먼지로 뒤덮인 세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 아버지에게 치욕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그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분은 긍휼하심으로 왕의 홀(笏)을 내밀어 그에게 다가감을 허락하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매일의 삶 가운데 비천한 신분 또는 노예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절대 합당치 않다. [2]
천국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세속적인 기독교인을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다가올 세상의 기쁨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계시며, 우리를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빠지게 하는 것은 단지 반항적이고 비뚤어진 사고방식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에 대한 계약금을 이미 주셨다. 그분은 우리의 시민권을 그곳으로 옮기셨다.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의 영광을 사소한 가치로 여겨 무시할 수 없다. 백스터 자신의 글에서, “천국 만큼 우리의 마음에 새길 만한 가치 있는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3]
내가 생각하기에 진리의 말씀 중에 이보다 더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말씀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립보서 3:20-21).
우리의 마음이 있어야 할 곳은 천국이다. 이 세상에 대한 염려는 함정일 뿐이고 치명적인 구덩이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마가복음 4:19)라고 묘사하셨다.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한일서 2:16)고 기록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린도전서 2:16).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을 사라져버릴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닌 영원한 천국의 영광에 고정할 수 있다.(요한일서 2:17).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인하여 새 가족의 구성원들이다.(요한복음 1:12). 갈라디아서 4:26에서 말하기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빌립보서 3:20), 새로운 마음을 천국에 고정하여(골로새서 3:2), 우리의 보물을 새로운 창고에 쌓으라(마태복음 6:19-20).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미 천국에 속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또한 천국의 빛 가운데 살 수 있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천국을 미리 경험하며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믿는 자는 언젠가 영원히 거하게 될 천국의 은혜를 이 땅에서 또한 매일의 삶 가운데 누릴 수 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며 예수님을 경배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거룩함을 추구하며 다른 성도 간의 교제를 소중히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천국에 대한 몇 가지 요소일 뿐이다. 이와 같은 일과 특권이 앞으로 우리를 영원히 지배하겠지만, 이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을 보는 우리는 지금이라도 천국의 선을 즐기고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1] Richard Baxter, The Saints’ Everlasting Rest, abridged by John T. Wilkinson (1650; reprint, London: Epworth, 1962), 110.
[2] The Saints’ Everlasting Rest, 118.
[3] The Saints’ Everlasting Rest, 121.
존 맥아더(John MacArthur)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원문: https://www.gty.org/library/blog/B160929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