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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자살 전염병에 주목하자

사진: Unsplash의 Alex Ivashenko

지난 몇 년 동안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자살에 관해서도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주저했다. 주제가 주는 심각성과 민감성 때문에 거부감과 의무감 속에서 갈등했다.

내가 망설인 이유는 자살로 사람을 잃은 사람이 행여라도 내 글을 무감각한 소리로 받아들이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전혀 나의 의도가 아님을 강조한다. 나 역시 가족과 친구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다. 뉴스에서든 개인 관계에서든, 자살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언제나 마음이 요동친다. 자살은 파괴적이고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 나는 고통받을지도 모를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자살률은 나날이 치솟고 있고, 교회라고 이 전염병에 면역력이 있는 건 아니다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미국에서 자살은 “10-34세 인구 사망 원인 2위, 35-54세 인구 사망 원인 5위”이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2023년에 미국 외과의사협회는 정신 건강을 “우리 시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건강 위기”라고 말했다. 같은 해에 무려 오만 명이 넘는 미국인이 자살했는데, 이는 “역사상 어느 해보다 높은 수치이다. 하버드의과대학의 ‘자살은 전염병이다’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건 쉽지 않다.”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가 다양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나는 어떤 묘책이 있다는 식의 접근 방식으로 자살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자살이 전염병처럼 퍼지는 현실이 위험한 이유 중 하나가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거기에 관해서 다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로움, 패배감, 절망감을 느낀다. 이런 간단한 상호 작용을 열거하는 것은 대화를 위한 최소한의 발판 곧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만약에 지금 당신이 자살을 생각한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의 대화 상대가 되어줄 수 있다. 내가 도움이 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내 마음이 받아들여지기를 기도한다. 

자살이 무엇인가? 

최근 몇 년 동안 자살에 관한 표현이 일부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과거에 누군가가 “자살을 저질렀다(committed suicide)”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살로 죽었다(died of suicide)”라는 글이 나온다. 바뀐 이유가 뭘까? 과거의 표현은 자살의 책임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살한 사람의 책임을 제거하고 대신에 그들이 겪고 있던 질병이나 장애에 대해 논의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이유로 “자살에 의한 사망(died by suicide)”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표준이 되었다

아마도 그 동기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지 싶다. 이는 중요한 마음 씀씀이이다. 바라건대, 그런 표현 하나라도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고통이나 정신 건강의 복잡성과 고통을 최소화하지 않고도 이러한 변화는 자살에 대한 성경의 이해와 더 넓은 매체에서 자주 논의되는 내용 사이에 어느 정도의 연관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쁜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정신 건강을 이해하고 치료할 때 사회가 이루어 내는 상당한 진전을 기뻐해야 한다. 동시에 어떤 결론을 내릴 때 성경이 가르치는 도덕성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살은 살인이기 때문에 죄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살인은 죄이다. 자살은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이다. 내가 나를 죽이는 행위이다. 모든 정신 건강 문제가 다 자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동시에 모든 자살이 다 정신 질환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자살은 예외 없이 살인이다.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도덕 범주를 제거하는 것은 성경에 비추어서도 정확하지 않고 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성경의 관점에서 우리는 죄가 우리의 생각을 어둡게 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거짓됨을 깨달아야 한다(렘 17:9롬 1:22). 자살이라는 심각한 주제를 논의하는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존재하는 여러 복잡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성경의 틀에 충실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예민하고 짓눌린 영혼이 잘못된 선택을 범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데 필요한 명확한 빛을 드러낼 수 있다. 

자살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아니라는 것은 진리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결코 자살이 우리가 고통에서 구원받는 길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길이 있다. 하나님은 더 나은 길을 주신다. 인류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주권은 내가 나를 죽이는 행위가 결코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살이라는 죄가 결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죄의 범주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자살을 자기 살인의 범주로 보는 것은 오늘날 사회적 시각과는 차이가 크지만, 그럼에도 성경의 관점과는 일치한다. 주님의 교훈이 우리가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는 경우는 이것 말고도 많이 있다. 아마도 자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게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더 명확하게 할수록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분명한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절망에 빠져 자살을 고려하는 사람에게 자살이 무엇인지에 대한 도덕적 명료함을 보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왜 살아있는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죽고 싶은 이유에 대해 생각하면서 우울함의 어두운 구름 속에서 괴로워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일단 이런 생각이 머리에 단단히 자리 잡은 이상, 건전한 추론을 통해서 그 어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자살학자이자 스탠퍼드의과대학 자살 예방 연구실의 소장이자 설립자인 레베카 베르너트(Rebecca Bernert)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살이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미칠 심리적 영향에 대한 심각한 과소평가가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비합리적인 인식까지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왜 계속 살아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서 그래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고통과 깊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했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Man’s Search for Meaning(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서로 눈에 띄게 유사한 두 가지 자살 가능성 사례를 기억한다. 두 사람 모두 다 자살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전형적인 주장을 펼쳤다. 내게 중요한 문제는 그 두 사람이 삶이 여전히 그들에게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도 기대할 수 있는 미래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가 그중 한 사람에게서 발견한 건, 그에게 중요한 미래는 그가 사랑하고 또 외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녀라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었다. 이 사람은 과학자였으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일련의 책을 쓰고 있었다. 첫 번째 사람의 경우, 자녀의 마음에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책을 쓰는 이 사람에게도 그의 일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 또는 미완의 작품에 대해 자신이 짊어진 책임을 똑똑하게 의식하는 경우에, 사람은 결코 자신의 생명을 버리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거의 모든 ‘어떻게 그걸 견뎌?’라는 상황까지 이겨낼 수 있다.”

프랭클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미묘한 관점의 변화를 통해 그는 개인적인 의무를 강조함으로 발휘되는 힘을 보여준다. 프랭클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절망을 느끼거나 죄책감의 바다에 빠져드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책임, 그들에게 의존하는 사람들, 그들 앞에 놓인 기회를 보도록 격려한다. 이런 말은 누구의 입에서 나와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조언이겠지만, 그 사람이 나치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이라면 말할 나위가 없다. 

마찬가지로, 친구들에게 하나님, 가족, 친구, 그리고 교회 및 사회에 대한 책임과 기회를 알려주는 데 그리스도인처럼 적절한 사람도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죄책감의 그림자 아래 살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죗값을 치르셨고(골 2:13-14), 죄인들은 이제 의롭다고 선언되었으며(고후 5:21), 원수들이 물러났고(롬 5:10-11), 이방인은 자녀가 되었다(골 1:21롬 8:15-16). 우리는 더 이상 죄책감과 수치심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살 필요가 없다. 우리의 손에는 임마누엘 땅으로 들어가는 티켓이 들려있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베풀고, 행하고, 또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인생은 지금 우리에게 실로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 많은 것을 갖고 계신다! 좋은 친구가 어떤 사람인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다. 

누가 당신을 도울 수 있는가?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다. 누구라도 삶의 짐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우리에게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절망의 구름이 당신 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라. 친구나 가족에게 전화하라. 마음을 열라. 힘들다고 얘기하라. 기도를 요청하라. 도움을 요청하라. 절망의 탁한 공기가 당신을 질식시키도록 놔두지 말라. 무슨 일이 있어도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드는 고립 속에 머물지 말라.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라.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아예 이런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친구, 가족, 교인은 내가 행여라도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 가서 그들의 마음을 확인해야 한다. 실제로 대화를 나누라.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라. 형식상이 아니라 진짜로 잘살고 있는지 확인하라. 우려를 표현하고, 필요하면 후속 조치를 위해서 자원하라. 정죄하지 말고 그들에게 나아가라고 당신 자신을 독려하라. 

이 문제에서 흔히 간과되는 이들이 목회자이다. 정기적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고 다양한 부담을 짊어지는 사람들은 쉽게 고립감을 느끼고 쉽게 마음을 열 친구가 없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답을 주는 사람이지 조언을 듣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자에게도 친구가 필요하다. 전화하고 이야기를 나눌 형제가 필요하다. 동시에 그들의 상태를 확인해 줄 사람들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또 내가 도움을 요청해야 할 사람도 다 알고 있어야 한다. 정말로 정신 건강이 우리 시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건강 위기라면, 그리스도인이 나서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격려의 말을 전하는 데에 열심을 내야 한다. 도덕적으로 명확하고 복음의 희망을 품고 말해야 한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천상의 도시 해안에 도달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우리 자신도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란다. [복음기도신문]

에릭 레이몬드 Erik Raymond | 보스턴 도심에 위치한 Redeemer Fellowship Church의  담임 목사이다. 블로그 Ordinary Pastor에 글을 올리고 있다.

원제: The Suicide Epidemic Deserves Our Attention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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