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김종일 칼럼] 부활에 대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근본적 차이

사진 : 김종일

밖에서 보는 이슬람(102)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

우리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가장 커다란 주제이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확실하게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빈 무덤과 남아 있는 세마포가 그 증거이다. 우리 교회는 사순절 기간을 끝내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셔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하게 용서받았다는 사실은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커다란 사건이다. 거기에다 예수님의 죽음에서의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인류 최대의 사건으로서 우리에게 죄 용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정말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에서 기록된 대로 진정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말씀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로마서 6:5~9)

이제 부활의 시간을 맞이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시 한번 스스로 진지하게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진짜로 믿으며 살아가고 있나?”, “예수님의 부활은 정말 나의 부활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진실은 오직 하나뿐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면, 사실이 아니냐? 둘 중 하나뿐이 없다.

논리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증거와 증인이 존재한다. 그래도 만약 부활이 거짓이라면, 성경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도 모두 진실이 아닐 것이며, 우리의 믿음도 전부 헛것이 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눅 24:1~12)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부활도 없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부활도 있다. 당시에도 예수님의 부활 이전과 이후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예수님의 부활로 십자가 죽음의 진정한 의미와 부활 전에 하셨던 모든 말씀이 사실임을 깨닫게 되었고, 사람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이들은 안팎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의 모든 말씀이 사실이었고, 하나님이셨던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되면서 모든 이는 변했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고,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바뀌었으며, 죄용서의 기쁨과 부활 천국 소망으로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었다.

이슬람교의 부활

이슬람교에는 예수(이싸)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이싸)의 부활도 당연히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꾸란에서는 ‘부활’에 관해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꾸란 75장은 ‘부활’ 장으로 부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꾸란에서 부활의 날은 곧 최후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최후의 날, 심판이 있기 직전에 모든 영혼이 이전에 죽었던 육체와 결합하여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다. 부활의 날과 심판의 날을 각각 구별하는 꾸란 학자들도 더러 있지만, 부활과 심판이 같은 날, 곧, 최후의 날에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이 압도적이다. 즉, 최후의 날에 인류의 부활과 알라의 대 심판이 펼쳐지게 된다고 말한다.

최후의 날(꾸란 4:136)에 대한 다양한 표현은 ‘분리(결정)의 날’(꾸란 77:13), ‘결산의 날’, ‘심판의 날’(꾸란 1:3), ‘부활의 날’(꾸란 21:47), ‘깨우는 날’(꾸란 30:56)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후 심판의 날, 죽은 영혼과 육체가 부활하면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고, 반면에 악한 일은 행한 자는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고통을 당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꾸란의 부활과 성경의 부활이 비슷하게 보이는데, 그 이유는 꾸란의 종말론이 성경의 종말론에 크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부활과 꾸란의 부활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부활에 대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근본적 차이

그렇다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부활에 관한 근본적 차이는 무엇이며 그 차이를 갖게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먼저, 인류 첫 사람인 아담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꾸란적 이해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으로부터 그 차이는 시작된다.

성경의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라고 명령받는다. 그러나, 꾸란에서는 성경의 이 명령을 크게 2가지에서 수정했다. 첫째는 ‘선악과’를 ‘이 나무’(this tree)‘로, 두 번째는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를 ‘너희가 죄인들 가운데 있게 되리라.’(꾸란 7:19 하)라고 성경과 다르게 수정했다.

그렇다면, 꾸란은 왜 그렇게 수정했을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순간, 즉시 죽어야 했는데, 현실적으로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꾸란적 성경해석의 원리를 알 수 있는데, 문자가 보여주는 상징성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꾸란에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할 때, 그 나무속에 악이 있고, 그 악 속에는 사람이 먹으면 즉시 죽게 하는 독이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고 있다.

또한, 꾸란에서 아담이 그 과실을 따 먹은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오래전에(beforehand) 알라로부터 언약(‘이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했으나 그는 그것을 잊었더라. 그러나, 그에게서 고의성은 발견하지 못했더라.”(꾸란 20:115) 이는 오래전에 들었기 때문에, 잊어버리고, 그 과실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꾸란의 아담은 그 과실을 먹는 데 있어서 고의성이 없었기 때문에 알라로부터 용서받는다. “주님은 그를 선택하셨고, 그분에게 회개하니 그분은 그를 인도하셨노라.” (꾸란 2:122) 그리하여, 꾸란의 아담은 알라와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그의 죄가 대물림되지도 않는다. 이에 따라 꾸란은 성경의 원죄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꾸란에서의 아담은 그가 935세가 될 때까지 죽지 않았다. 이에 따라서 그 삶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부활 역사, 즉, 새 창조 역사를 결코 경험하지 못하고 최후의 심판 날에 알라의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할 뿐이다. 꾸란은 성경에서처럼 종말을 하나님의 새 창조의 완성으로 말하지 않으며, 단지 최후의 심판 날과 인류가 부활하는 날 정도로밖에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꾸란에서의 부활은 성경에서의 부활과 전혀 다르다. 다시 요약하면, 두 부활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근거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서 꾸란과 성경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실까?

이 우주 전체의 주인이시고, 세상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그분이, 당신의 피조물이신 우리 인간을 향하신, 처절하기조차 한, 그분의 끝없는 용서는 도대체 웬일인가? 그 가치도 모르고 제각기 끝없이 끝없이 죄만 저지르며, 또 그 죄조차 싫어하지 않으며, 즐기며 또 즐기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들인데 말이다. 정말 우리는 그럴 가치가 있는 자들 이기는 한 것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에서 부활을 모르고 기다렸던 초대교회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좀 다행인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수차례에 걸쳐서 부활을 직간접적으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단 한 사람도, 그분의 십자가 죽음이 얼마나 커다란 사건을 예고할지 모르고, 단지 십자가 사건을 실패와 끝이라고만 생각하면서, 그저 절망 가운데 파묻혀 살아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 당시 사람들보다 우리는 다행이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난도 말씀을 통해 이미 알고 있고, 그 뒤에 엄청난 그리고, 놀라운 그분의 부활도 이미 말씀을 통해 접하고 이제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을 이를 모르는 모든 이와 나누어야 한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혹은 알고 싶지도 않은 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고, 부활시켜 주셨다. 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사건이며, 지상 최대의 놀라운 사건이며,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감격과 감사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감사하면서, 그 덕분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격과 하나님과 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온전한 피조물의 자격을 아무 대가 없이 얻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린다.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고난이 헛되지 않은 삶과 그리스도의 부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특별히, 이를 모르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부인하며 살아가는 모든 무슬림에게 이 사실을 전할 사명과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전)국립 앙카라대 교수, 현)아신대(ACTS) 중동연구교수, 한국외대, 장신대 신대원, 국립 이스탄불대 역사학 석사 및 박사 |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1)무슬림 이해하기’, (2022, 라비사북스). ‘벌거벗은 세계사(경제편)’, 공저, (2023, 교보문고), 시집 ‘두고 떠나는 연습’(라비사북스), ‘밖에서 본 이슬람, (2)이슬람 이해하기’, (2024, 라비사북스, 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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