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 잠 4:8

하나님과 함께 K국 유치원에서 쓰레기마을까지 – 장에밀 선교사

예수님 제자를 세우는 장에밀 선교사 (K국)

장에밀 선교사 (K국)

에밀의 어머니는 고아들과 똑같은 사랑으로 키우시겠다며 아들을 고아로 등록해 키우셨다. 매우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잘 못먹고 살았던 덕에(?) 척박한 선교지의 삶이 그리 힘든 줄 모르고 지나갔다. 러시아어 한마디 모른 채 한글로 발음을 적어가며 시작한 찬양 사역, 후원자 하나 없던 시간 속에서 경험했던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님의 제자를 세우며 K국에 교회가 회복되는 소망에 사로잡혀 달려오기까지. 장에밀 선교사를 이끌어오신 주님의 이야기를 청취했다.

– 예수님을 믿게 되신 이야기부터 들려주세요.

“어릴적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네요. 어머니(장성칠 여사)께서 평생 고아원을 섬기셨어요. 덕분에 형과 저도 고아원에서 살았어요. 부산이 고향인데, 제 기억에 참 고아원이 많았어요. 어머니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실 만큼 공부를 많이 하셨는데, 주님의 은혜를 받고 고아를 섬겨야겠다고 결심하셨어요. 그런 비전을 가진 어머니는 고아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말씀도 읽어주시고 찬송도 가르치셨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가는 고아원마다 개혁을 일으켰어요. 당시에 고아들은 이와 피부병이 많았거든요. 저도 이를 엄청 많이 옮아서 늘 참빗으로 머리를 빗던 기억이 있어요. 그랬던 이유 중 하나가 옷이에요. 고아원은 피복실이라는 곳에 옷을 보관해요. 그 방에는 100명 넘는 아이들의 옷이 있죠. 그때는 손으로 옷을 빨아야 됐으니까, 보모들이 130~140명 아이들의 옷을 다 못빨고 그냥 피복실에 넣어놓은 거죠. 그러니까 피복실 안이 엉망이었어요. 어머니가 그걸 아시고 가는 고아원마다 피복실을 열고 모든 옷을 꺼내서 다 손빨래를 하셨어요. 한 달 넘게 빨래만 하셨어요. 우리도 옷을 고무통에 넣고 발로 밟아서 빨래를 했어요. 어머니는 밤마다 끙끙 앓으셨죠. 당시에는 고아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 곳이 없었어요. 어머니는 피부과에 가서 의사하고 이야기하면서 빌었죠. ‘우리 아이들 도와주세요.’ 내가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싹싹 빌면서 약을 받아오셨어요. 애들 몸에 뿌리면서 치료하셨죠. 가는 곳마다 그런 개혁을 하셨어요.”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았던 유년시절

– 어머님이 대단한 분이셨네요. 선교사님은 고아원의 삶이 어떠셨어요?

“나는 너무 싫었어요. ‘내가 왜 여기 있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는 고아들과 우리에게 똑같은 사랑을 준다면서 저도 고아로 등록해서 키우셨어요. 어머니 사랑도 빼앗긴 거 같은데, 고아들은 ‘너는 엄마가 있다.’면서 저를 괴롭혔어요. 때리고 고문도 했죠. 제 얼굴은 늘 찌그러져 있었어요. 고아원에 있는 게 너무 싫어서 늘 피해 있던 곳이 교회였어요. 교회가 나의 피난처였죠.”

ⓒ 복음기도신문

– 그렇게 교회를 가게 되셨군요.

“신앙이 좋아서 매일 교회에 가는 게 아니라, 단지 피할 데가 없어서 간 거였어요. 고아원 형들과는 다르게 목사님이 잘해주시니까 ‘나중에 나도 목사돼야지.’라고 막연히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초등학고 5학년 때, 우연히 운동을 할 기회를 얻어 육상을 하게 됐어요.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전교생 건강검진에서 입원시켜야 된다고 할 정도로 허약했어요. 빈혈도 있고 늘 시무룩하니까 관계도 좋지도 못했어요. 늘 우울한 마음으로 학교에 다녔어요. 그러다 5학년 때 제가 달리는 것을 본 육상 선생님의 권유로 운동을 하게 됐어요. 가장 좋은 건 고아원에 빨리 안가도 되는 것이었어요. 또 감독님이 칭찬도 해주시니 너무 좋았어요. 1년 만에 운동 실력이 늘었어요. 장거리 선수였는데 6학년 때 부산 88 꿈나무를 뽑는 시합에 나가서 1등을 했어요. 이제 꿈나무로 뽑혀서 훈련을 받게 됐어요. 고아원에서는 잘 못먹었는데, 훈련을 받으니 고기도 주고 먹을 게 풍성했어요. 죽자사자 열심히 운동을 했어요. 40일이 지나고 나니까 다른 아이들은 훈련이 힘들어서 다들 집에 가고 저만 남았어요. ‘니는 유망주다.’라면서 저를 키워주셨어요.”

– 이제 운동을 계속 하게 된 건가요?

“아니요. 중3 무렵 다리에 이상이 왔어요. 관절이 자라는 어릴 때 너무 운동을 많이 하면, 관절이 어긋난대요. 그때 서 있기도 어려울 정도였어요. 깁스를 하고 좀 쉬다가 나아지면 운동을 했어요. 나중에는 병원에서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실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또 고아원에 있어야 되는 게 너무 싫었죠. 이제 고등학교 시험을 봐야 하는데, 그동안 운동만 한다고 공부도 안했고, 몸은 다쳤으니 고등학교 갈 자격도 안됐어요. 앞이 깜깜하고 죽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중3 무렵 기도원에서 하나님 만나다

– 어린 나이인데, 죽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군요.

“그때 중학교 체육 선생님이 중3을 한 번 더 다니면서 공부하면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고 제안해 주셨어요. 그렇게 중3을 한 번 더 다니기로 하고, 복학하기 전에 하나님과도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기도원에 올라가서 8일간 금식하면서 기도했어요. 그런데 그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됐어요. 8일째 되는 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 사랑을 받지 못했거든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 못 박히신 것이 믿어지면서 많이 울었어요. 헌금함이 지나가는데 은혜는 받아서 뭐라도 드리고 싶은데 10원 한 푼 없었죠. 헌금함을 보면서 펑펑 울고 있다가 팔목에 만화 시계가 생각났어요. 이걸 드리면 되겠다 해서 풀어가지고 기도원 원장님께 찾아갔어요. ‘제가 은혜를 많이 받아서 그런데, 이거 누구 좀 주세요.’ 원장님이 나를 꼭 안아주시면서 돌아가서 기도하라고, 드릴 게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 드릴만한 걸 찾으셨나요?

“돌아와서 기도하는데 주님이 ‘정말 나에게 줄 게 없느냐.’고 물어보시는 것 같았어요. ‘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세 번째 말씀하시는데 내 육신을 하나님께 드리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 하나님, 저를 받아주세요.’ 그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경험했어요. 8일간 금식해서 힘들었는데 춤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기뻤죠. 그때 ‘하나님, 새벽기도 나가게 해주세요. 하루에 5명 이상 전도하게 해주세요. 말씀 묵상 매일 하게 해주세요.’라고 결단하고 내려왔어요.”

– 하나님을 만난 이후 삶에 변화가 나타났을 것 같네요.

“어머니와 함께 중3 복학할 때까지 매일 새벽기도 나가서 기도했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매일 5명을 꼭 전도하고, 매일 말씀을 읽는 삶을 살았어요. 새벽마다 기도하는데, 처음에는 어릴 때니까 뭘 위해 기도할지 모르잖아요. 잠만 오고요. 어느 때는 자고 일어나면 사람들이 다 가고 없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익숙해지니까 기도가 되더군요. 이후에 민족과 열방을 위한 기도 제목을 주셔서 불교권, 이슬람권을 위해 기도하는데 이슬람권을 위해 기도할 때 눈물을 많이 주셨어요. 그러면서 이슬람 지역에 선교사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기도회를 인도하는 장에밀 선교사. ⓒ 복음기도신문

– 선교에 대한 마음을 그렇게 받으신 거군요.

“중3 복학을 했는데 주님이 지혜를 주셔서 1년 안에 전교 10등 안에 들었어요. 선생님들도 다 놀라셨죠. 그렇게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전도도 많이 하다가 고3 때 교회 전도사님이 K국으로 가게 되셨어요. 전도사님은 고신대 전도단이라는 단체를 이끌고 가셔서 체육관에서 집회를 했어요.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 수백 명이 일어났죠. 그 집회에서 전도사님이 찬양인도를 했어요. K국에 계셨던 선교사님이 앞으로 이곳에서 찬양 사역할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셨어요. 그런데 모두 대학생들이고 하니까 갈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전도사님이 제게 K국에 한번 가보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어요. 기도해보겠다고 하고 기도원에 올라갔는데, 하나님이 고린도전서 5장 17절 말씀을 주시면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더군요.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를 위해 사는 삶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헌신하고 1993년 2월 27일에 K국에 들어왔어요. 그때가 21살이었어요.”

새로운 피조물의 삶, K국 선교사로

–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네요?

“이 날이 제 생일이었어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고 생각해요. 이곳에 가장 처음 오신 선교사님 사역을 도왔어요. 열심히 찬양사역하고 전도팀을 이끌었어요. 이곳에 올 때, 노한사전 한 권만 들고 왔죠. 언어를 잘 못하니까 악보 밑에다 한글로 발음을 적어서 찬양을 익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젊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이후 국립대학교 언어학부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어요.”

– 21살에 선교지에 홀로 나와서 힘들진 않으셨어요?

“저는 고신대 전도단 파송을 받고 왔는데, 당시에는 후원자를 모집하는 것도 잘 몰랐기 때문에 후원자가 하나도 없었어요. 먹고 살게 막막했죠. 저를 소개해준 전도사님 교회에서 매월 헌금해 주는 20만 원이 전부였어요. 초기 9년 동안 2001년까지 후원자 없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살았어요. 전도할 때도, 가난할 때도 부요하신 하나님을 수없이 경험했어요. 물론 어릴적 고아원에서 살았던 경험 덕분에 적응을 잘 할 수 있기도 했어요. 고아원 밥과 이곳 밥이 똑같거든요. 수저를 대면 무너지는 밥. 늘 먹던 밥과 똑같아서 저는 잘 먹었는데, 다른 분들은 잘 못드시더군요.”

–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K국 영혼들을 섬긴 이야기도 나눠주세요.

“전도하면서 하나님이 K국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은 밖에서 전도하면 잡혀가고 추방되지만, 초기에는 이슬람 세력이 그리 강하지 않아서 밖에서 찬양도 하고 무언극도 하면서 전도할 수 있었어요. 국영백화점과 공원이 전도 장소였어요. 물론 시골 지역으로 가면 무슬림들이 돌을 던졌어요. 시장에서 찬양하고 율동하면 수박껍질도 날라왔어요. 어쩔 수 없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한 집에 노크를 했는데, 문이 열리더니 제게 빨리 들어오라고 하는 거예요. 잡아당기듯이 이끌려서 들어가보니까 한 가족이 모여 있었어요. ‘어제 저녁에 당신을 꿈에서 봤다.’고 하더군요. 꿈에서 당신이 하는 소리를 들으라고 했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 가정에서 일어난 일과 똑같았어요. 깜짝 놀라서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전달했어요. 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인도도 했죠. 그때는 전도 나갔던 사람들이 이런 간증을 많이 가져왔어요. 하나님이 많은 역사를 보여주셨어요. ‘하나님이 K국을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이들에게 복음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고, 이후 어린이 사역에 대한 비전을 주셨어요.”

– 어린이 사역은 어떻게 하셨어요?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어린이들이 이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열쇠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릴 때부터 복음을 듣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자라게 하면 이 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비전을 주셨어요. 그런데 막상 이 일을 하려고 하니 제가 너무 부족했어요. 신학도 안했고요. 그러다 현지인 자매를 만나 2000년도에 결혼을 하고, 다음 해에 훈련을 받기 위해 무작정 한국에 왔어요. 대안이 있어서 한국에 온건 아니었어요. 당시 6만 원이 가지고 있던 재정의 전부였고, 후원 교회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양로원에 계셨고, 형님은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어요. K국에 오셨던 한 목사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와서 당신 교회에서 지내라고 하셨어요. 이후 고등학교 친구의 소개로 울산의 한 교회와 연결이 됐어요. 그곳에서 선교부 간사로 섬기면서 신학 공부를 하게 됐어요.”

장 선교사를 인도하신 주님의 손길을 이 짧은 고백 안에서 표현하기란 불가능했다. 자신을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섭리를 담담히 나눠주는 그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깊고 넓은 품 안에서 안식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할 뿐이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유치원 사역

“신대원을 마치고 2007년 10월 26일에 K국에 돌아왔어요. 그런데 2008년부터 종교법이 신설됐어요. 교회 설립을 위해 허가를 받으려면 성인 성도 200명의 사인이 있어야 했어요. 처음 교회를 시작하는데 200명이 어디 있겠어요. 또 전도는 허가 받은 교회에서만 가능하다고 돼 있는데, 이건 전도 하지 말라는 얘기잖아요. 또 18세 이하에게는 전도를 하지 못하게 돼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유치원 사역을 한다면 복음을 전하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떻게 해야 하나 기도하면서 지역을 돌며 땅밟기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한 선교사님을 길거리에서 만나게 됐어요. 40년 동안 유치원을 운영하셨던 분인데 이곳에서 유치원 사역을 하시려고 건물과 필요한 것들을 모두 준비해 놓으신 상태였어요. 단 하나, 언어가 안되셨죠. 그 선교사님은 우리 집 근처에 살고 계셨어요. 그곳은 외곽이라 한국 사람들이 거의 없는 곳이었어요. 그분들은 외곽에 교회도 없으니 이곳에서 어린이 사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우연히 같은 비전을 가진 분을 만나게 되면서 함께 유치원 사역을 시작하게 됐어요.”

▲ 유치원 사역 당시 아이들의 모습. 사진: 장에밀 선교사 제공

– 주님의 인도하심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네요.

“1년 동안 아내와 함께 유치원 운영을 배웠어요. 1년 후, 그분들은 유치원 밑에서 교회를 시작하셨고, 우리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선교사님 교회에 경찰이 들이닥쳤어요. 그분들은 경찰인줄도 모르고 새신자인줄 알고 환영하고 예배를 드렸어요. 예배를 마치고 경찰이라고 밝힌 그들이 모인 사람 명단을 다 적어갔어요. 선교사님들은 추방을 당하셨죠. 우리에게 유치원을 잠시 맡아달라고 부탁하셨어요. 추방 당해도 재판을 하지 않았다면 3개월 이후에 다시 들어올 수 있어요. 그러나 3개월 이후 재추방 당하셨어요. 결국 이분들은 다른 나라로 가셨어요. 유치원 건물주였던 선교사님은 세 번째 이곳에 들어오시긴 했는데 현지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셨어요. 망치로 제자들에게 엄청 맞고 버려졌어요. 선교사님이 제자들에게 끌려갔다는 것을 눈치채고 계속 전화를 걸면서 추적해서 결국은 쓰레기장에서 찾았는데, 눈이 공처럼 부어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결국 선교사님도 이곳을 떠나게 되시면서 제가 유치원을 맡게 됐어요.”

– 어려운 상황인데, 어떻게 이끌어가셨어요?

“진짜 막막했어요. 운영비도 없고, 어떻게 해야 될지 까마득했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립을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반을 늘렸어요. 한 반만 운영하던 유치원을 네 반으로 늘려 학생을 받았어요. 사람들이 많이 오면서 자체적으로 운영이 가능하게 됐죠. 우리 유치원은 하나님을 만나고 가는 유치원으로 표어를 정하고 전도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 이곳을 떠나셨던 선교사님이 2015년에 다시 오게 되면서 유치원 사역은 거기까지 하게 됐죠.”

– 지금 섬기는 교회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유치원을 그만두고 주님이 1년 정도 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어요. 그동안 가정교회를 하고 있었는데, 2016년도에 현지인 목사님을 만나게 되면서 우리 가정교회를 그분에게 넘기면서 함께 교회를 섬기게 됐어요. 어차피 외국인은 설교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현지인 목회자가 교회를 세워야 했어요. 2018년도에 교회 허가 조건이 충족되면서 허가를 받게 됐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어린이 사역을 해보기로 했어요. 아이들에게 전도는 할 수 없지만, 부모 동의가 있으면 복음을 전할 수 있어요. 2018년 여름성경학교를 열었는데 120명의 아이들이 왔어요. 문제는 당시 교회 건물에 20명밖에 못들어간다는 것이었어요. 교회 마당에서 여름성경학교를 진행하면서, 교회 건축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지금 교회 터도 K국에 계셨던 선교사님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었죠. 그분이 교회 건물을 넘겨주실 때, 나중에 교회 건축할 때 쓰라고 헌금하신 집이 있었는데, 그게 2019년 1월에 팔렸어요. ‘주님의 사인이다. 교회를 건축해야겠다.’ 그렇게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는데, 3월에 전혀 모르는 분에게 연락이 왔어요. 교회를 3개 건축하고 싶다면서 우리 센터 건축을 지원하겠다고 하셨죠. 그렇게 지금의 교회가 세워졌어요.”

순회선교단 주관으로 열린 복음캠프가 올해 1월에 그 교회에서 2회째 진행됐다. 아직 새 건물 티가 벗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복음이 선포되고 이 땅의 영혼들이 회복되는 일에 아낌없이 장소를 제공했다. 그리고 장 선교사 자신도 복음캠프 섬김이로 참여하며 이 복음의 영광에 동참했다. 그는 교회가 복음으로 회복되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 복음캠프에서 통역으로 섬기는 장에밀 선교사. ⓒ 복음기도신문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교회들이 많이 힘들어졌어요. 성도도 줄고 교회 문을 닫은 곳도 있어요. 교회가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복음세미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교회에 기도의 불을 지피면서 전도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해보자는 마음으로 2021년도에 뜻이 있는 목회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어요. 그리고 그해 2월부터 어느 교회든 다니면서 복음세미나를 했어요. 그리고 제자훈련도 하게 됐어요.”

현지인 사역자와 성도, 제자훈련

– 제자훈련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현지인 사역자들과 함께 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됐어요. 그들이 잘못된 교회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내가 목사가 되면 이건 내 거야.’ 자기가 우두머리가 돼서 성도들에게 지시를 하는 상하구조로 돼 있었어요.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현지 목회자들이 설교를 잘 못한다는 거예요. 연합선교회 교수인 한 현지인 전도사님이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를 조사한 적이 있어요. 전도사님이 매주 다른 교회를 다니면서 설교를 들어본 거죠. 그러면서 결론을 내린 것이 거의 절반 이상이 성경보다 자기 생각을 나눈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다. 목사가 되면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목회가 뭔지도 모르면서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이 교회 기득권에만 연연했지 성도들에게 말씀을 잘 전해서 교회로 잘 자랄 수 있도록 역할을 못했구나. 그래서 교회론에 대한 자료들을 연구해서 강의를 했어요. 제자훈련을 하기 위해 제가 먼저 훈련을 받고 현지인들을 가르쳤어요. 제자훈련은 지난해 말부터 시작됐어요. 주님이 이곳 말고도 U국에서도 복음집회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어요. 그곳에서 다니엘이라는 고려인 목회자를 만나게 됐어요. 비즈니스를 하다가 하나님을 만나면서 모든 걸 그만두고 복음 전도만 하고 있었어요. 사실 U국이 K국보다 전도하기가 힘든데 20개 마을을 다니면서 17개 가정교회를 세웠더군요. 그 말을 듣고 놀랐어요. U국 선교사님들이 다 추방을 당하시고, 저라도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순종한 걸음이었는데, 제 생각을 깨버렸어요. 주님이 ‘선교는 네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해 주시는 사건이었어요.”

▲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사진: 장에밀 선교사 제공

– 앞으로의 계획과 기도제목을 말씀 해주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이삭, 야곱처럼 한 영혼을 통해 이뤄가셨어요. 한 사람이 예수님을 닮은 좋은 전도자로 일어나고, 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이런 영적인 흐름이 계속 이어지도록 섬기고 싶어요. 아버지의 마음으로 제자훈련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또 최근에는 쓰레기 마을을 섬기고 있어요. 그곳에 800가정이 살고 있어요. 집집마다 난방도 안되고 아무것도 없는데 애들은 가정마다 4~5명씩 있죠. 지금은 식품을 전달하면서 사역을 하는데 올해에는 거기에 학습 센터를 만들려고 해요. 씻지 못하는 애들이 많아서 목욕 시설도 만들고요. 거기는 주소가 없어요. 그래서 태어나도 출생신고도 안되고, 학교도 못가고 병원도 못가죠. 그들에게 물어보니 이런 문제를 도와주기를 바라더군요. 센터가 세워지면 그걸 도와줄 수 있어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섬길 수 있도록 그 길을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주세요.” [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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