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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선교사의 희생이 맺은 열매

사진: 순천중앙교회 홈페이지 캡처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순천은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호남지역에서 마지막으로 선교지부를 세운 곳이다. 또한 이 지역의 선교를 전담한 미국 남장로교회는 북장로교회에 비해서 7년이나 늦게 조선에 선교를 목적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렇지만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하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교회의 성장과 함께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은 특별히 큰 지역이었다.

1892년 남장로교회는 선교사들의 입국과 함께 호남지역을 담당하게 되었고, 1894년 이눌서(W. D. Reynolds)와 드루(A. D. Drew)가 처음으로 순천을 방문했다. 1898년에는 테이트(Lewis Boyd Tate)가 순회하면서 전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순천의 선교 가능성에 대한 조사와 함께 언젠가는 선교지부를 설치해야 할 곳이기 때문에 순회 전도는 지속해 왔다. 그러나 인력이나 재정적인 지원이 동반되어야 했기 때문에 순천은 호남지역에서도 가장 늦은 1913년에야 정식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순천에 앞서서 나주에 선교부를 설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방의 유지를 비롯해서 나주에 선교부가 자리 잡는 것에 반대가 심하여 1904년 광주에 선교부를 설치하면서 유진 벨(Eugene Bell), 오웬(C. C. Dwen) 등이 광주에 주재했고, 그들은 호남선교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렇게 광주에 정주하게 된 선교사들 가운데 오웬 선교사는 특별히 전남 남동부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순천을 중심으로 보성과 광양까지 기회를 만들어 순회하면서 전도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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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gckorea.org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웬은 1909년 폐렴으로 갑자기 별세했다. 동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오웬이 별세한 후 목포에 있던 프레스턴(J. F. Preston)이 후임으로 광주 선교부에 합세했고, 그해 신임으로 내한한 코잇(R. T. Coit)이 부임해서 합력하게 되었다. 프레스턴은 부임하여 오웬이 관심을 집중했던 호남 동남부 지역을 순회한 결과 이미 여러 개의 교회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남장로교 선교부에 순천지부 설치를 강력하게 요구함으로써 1913년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유진 벨과 프레스턴은 오웬이 집중했던 순천에 관심을 가지고 선교부 설치를 위해 힘을 모았고, 부임하여 이 지역에 관심이 있는 프레스턴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매곡동 언덕에 2천여 평의 부지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곳은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조차 꺼리는, 시신을 매장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아이들의 시신을 항아리에 넣어 버리거나 돌무더기를 만들어 시신을 묻어 놓은[風葬] 곳이었다. 한마디로 버려진 땅이고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싫어하는 곳이기에 땅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비용조차도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이 선교부에는 없었다. 따라서 프레스턴, 벨 등 선교사들이 은행 대출을 받아서 마련했다. 그런 와중에 프레스턴이 1911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여 선교비 확보와 동역할 수 있는 새로운 선교사를 찾는 일을 했다. 안식년 휴가이지만 사실은 선교를 위한 비용과 인력을 확보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이때 만난 것이 전주 신흥학교 설립을 위해서 거금을 기부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그레이엄(C. E. Graham)이었다. 그를 통해서 같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실업가 왓츠(George Watts)를 소개받았다.

그런데 왓츠는 군산에서 사역하고 있던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선교사의 처남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장로였다. 그러니 이미 조선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프레스턴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선교를 위한 지원을 약속했다. 우선 순천선교지부를 설립하기 위한 기금과 13명 선교사의 생활비를 전부 약속했다. 매년 무려 1만 3천 달러를 기부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큰 돈을 선교비로 후원해 줄 것을 약속받고 1912년 8월에 안식년 휴가를 마친 프레스턴은 돌아와서 바로 순천지부 설치를 위한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매곡동 산자락에 1924년까지 마련한 부지가 2만 6천여 평이나 되는 넓은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비교적 초기부터 순천에는 유치원, 남학교, 여학교, 병원, 기숙사, 남녀성경학교 등 종합적인 선교센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왓츠의 지속적인 헌금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는 매년 약속한 선교비를 보내오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 설립과 병원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서 8만 달러를 보내주었다. 그뿐아니라 그는 1920년과 1930년에는 직접 태평양을 건너 순천을 찾아와서 선교 현장을 돌아보면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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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gckorea.org

하지만 그 과정에는 또 하나의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순천선교지부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1913년 지부설립을 위해 선발대로 파송된 프레스턴과 코잇 두 가정이 순천에 도착했을 때, 공사가 아직도 진행 중인 사택에서 지내야 했다. 위생 상태는 물론 추운 환경에서 지내야 했는데, 그 과정에 네 살, 두 살 두 아이가 이질에 걸려서 하루 사이에 죽었다. 코잇은 선교부 부지로 매입한 뒷산 골짜기에 아이들을 묻어야 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부인도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회복되었다. 그들의 희생 때문에라도 순천 선교를 반드시 완성해야 했던 코잇이었다. 그렇지만 코잇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이다. 그의 가족은 순천 선교의 초석이 되었다.

순천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선교지부가 설치되기 전의 일이다. 순천보다 일찍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진 것은 전남 동남부 지역의 여천의 장천교회, 벌교의 무만동교회, 광양의 신황리교회가 1905년에 세워졌다. 어찌 보면 이러한 교회에서 순천읍 지역을 전도한 결과로 세워진 것이 지금의 순천중앙교회이다. 

순천에 살던 최정희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고, 김억평, 윤병열, 최사중, 김창수 등과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 강시섭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고, 교인 수가 늘어나자 1907년 북문 밖 양사재라는 서원 건물을 빌려서 짧은 기간 동안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순천중앙교회의 시작이다. 이때 프레스턴 선교사가 이 교회의 당회장으로 돌봤다.

1908년 일본군이 순천에 주둔하게 되면서 양사재에서 쫓겨나서 서문 밖(영동)에 있는 5칸짜리 초가를 구입해서 예배를 드렸다. 이때 이미 30여 명의 신자가 회집했다. 그러다가 한일병탄이 있던 1910년 광주에서 파송한 김윤수가 현재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매곡동 144번지에 20평 규모의 T자형 예배당을 마련한 것이 최초로 지은 예배당이다. 하지만 순천을 처음으로 방문하고 전도에 나섰던 오웬은 이곳에 공동체가 형성되는 초기에 그들을 돌보다가 예배당이 건축되기 전인 1909년 별세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교회사에는 일반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많다. 그중에도 일제의 박해가 있을 때 교인이 오히려 더 많이 모이는 현상이다. 순천중앙교회도 그랬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에 시민들은 오히려 교회를 찾아들었다. 이에 교회는 1923년 부지를 더 확보하면서 예배당을 증축해야 했다. 또다시 1935년에는 붉은 벽돌로 130평 규모의 예배당을 새로 지었다. 이 건물은 지역의 명물이 되었고 해방 이후까지 사용되었다.

1939년, 즉 일제가 대동아 전쟁을 준비하면서 조선반도를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던 그때였다. 마침 그 이전 해에 부임한 박용희 목사가 청년회를 중심으로 성경반을 만들어서 성경공부와 함께 독립운동과 독립정신을 가르쳤다. 이 모임을 간디가 인도에서 인도독립운동을 하면서 사용했던 원탁회로 칭하면서 황두연 장로의 집에서 집회를 이어갔다. 원탁회에서 일본의 황국신민화정책을 비판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했다. 이것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연루된 인사들인 박용희 목사, 장소를 제공하고 함께했던 황두연 장로를 비롯해서 배후의 세력으로 손양원 목사 등 순천노회 목회자 15명 전원이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의 주역인 박용희 목사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42년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6.25사변을 전후해서 순천지역은 특별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격변기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피폐해진 현실은 사람들에게 절망감만 안겨주었다. 정세가 안정되면서 사람들은 다시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1955년 기존의 예배당으로는 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70여 평을 증축해야만 했다.

이어지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도시로 일거리를 찾아 모여들던 1983년 모여드는 신자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해야만 했다. 하지만 건축이 쉽지 않았기에 1985년에야 준공검사를 받았고, 이듬해인 1986년에 봉헌할 수 있었다. 어렵지만 당시로서는 단일 예배당으로 800여 평 규모로 상당히 큰 예배당을 마련했고, 그 예배당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대신에 그 과정에서 1935년에 지었던 정감 어린, 그리고 일제의 수난기와 6.25사변을 겪어낸 예배당은 사라지고 말았다.

1992년 미국남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100년을 기념하는 예배를 순천, 순서, 여수노회가 연합으로 순천중앙교회에서 드렸다. 이것은 선교지부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크고, 동시에 순천중앙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할과 위치가 분명함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 후 순천중앙교회는 2007년 4월 15일 창립 100주년기념감사예배를 드리기까지 순천지역의 중심 역할을 하는 교회로 성장하면서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선교를 위해 섬기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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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gckorea.org

순천중앙교회는 특별한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교회인 만큼 기억에 남는 지도자들이 있었다. 특별히 이 교회의 1대 프레스턴 선교사, 3대 담임 목사 이기풍(1920), 7대 담임 목사 박용희(1938), 6.25사변 이후에 임시 당회장으로 활동한 휴 린턴(Hugh Linton) 같은 이들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교회와 지역 사람들의 생활과 신앙을 이끌어 주었고, 나라를 세워 가는 역할을 감당했다.

예배당 앞에는 특별한 조형물이 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아서 설치되었다. 독특한 모양의 종탑이라고 할지, 높지 않은 탑신을 가지고 있는 십자가 모양의 조형물은 최초 당회장 프레스턴 선교사, 최초 예배당, 원탁회의 사건 등을 부조로 새겼고, 맨 위에는 교회에서 사용하던 종을 달아 놓은 것으로 교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복음기도신문]

글 이종전 |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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