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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국가유공자의 대우

▲ 6.25 전쟁 무공훈장. 사진: 유튜브 채널 국방TV 캡처

[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31)

1991년 4월말쯤 극동방송에 근무하는 막내 딸 완순이가 전화를 했다. “아빠, 지금 KBS1 TV를 틀어 보세요.” KBS1을 돌려보니 6.25 전쟁의 격전지 ‘향로봉’에서 전사자 유골 발굴 작업실황을 방영하고 있었다. TV를 보며 옛날을 추억하고 있는데 화면 아래 자막에 눈길이 갔다.

“향로봉 전투에 참가한 생존자는 총무처 상훈과에 조회하여 잠자고 있는 훈장의 주인공이 되어 주십시오.” 그런 안내 문구였다. 나는 즉시 총무처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향로봉 전투에 참가한 참전자입니다.”라고 밝혔다. 수화기 너머에서 전화를 받은 사람이 말했다.
“보훈의 달을 맞아 사장된 훈장의 주인을 찾고 있으니 일단 총무처 11층 상훈과에 오셔서 확인해 주세요.”

당시 나는 친구의 소개로 서초동에 위치한 회사의 비상임 이사직을 맡아 가끔 출근을 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강원도 속초시 영랑호 옆에 대단위 리조트를 짓고 있었는데 당시엔 속초에 내려가 리조트 분양 계약을 관리하는 일을 하다가 주말에만 서울에 다니러 오는 상황이었다.

속초 현장에 복귀하였다가 집사람과 함께 서울에 오고 갈 때면 반드시 홍천 ‘며느리고개’에 차를 세워놓고 잠시 지난날을 회상하곤 했다.

산속을 헤매다 겨우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탈출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양양 땅을 지척에 두고 며느리고개를 다시 넘어 북으로 끌려가며 얼마나 통한의 눈물을 흘렸었는지… 6.25 당시 긴박했던 추억들을 더듬어가며 아내와 함께 마시던 커피 한잔이 내게는 큰 위로와 기쁨이었다.

1991년 5월초, 정부청사 내에 있는 총무처 상훈과를 찾아갔다. 신분을 밝히고 잠시 기다렸다. 잠시 후 총무처 상훈과장이 나를 보고 또 보면서 자기 책상으로 안내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조용학씨가 맞습니까? 군번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내가 군번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육군 일등중사 9704128입니다.” 상훈과장은 그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재차 물었다. “도대체 몇 살에 입대하셨습니까?”
“당시 학병으로 자원입대 했으며 주민등록상에는 16세에 입대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18살에 입대한 것입니다.”답했다. 그제야 상훈과장은 이해가 됐는지 말을 이었다.
“선배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상훈 기록카드를 내게 보여주며 “선배님, 무공훈장이 2개나 됩니다. 16세에 1개, 17세에 1개 두 개입니다. 정말 축하합니다.”
나는 과장에게 물었다. “훈장은 어디서 탑니까?”
“육군본부에 상훈기록카드 사본을 첨부하여 정장 송부요청을 하시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씁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조국을 위해 생사를 오가며 청춘을 바친 사람에 대한 대접이 겨우 이 정도인가? 세월이 한참 흘러간 지금에서야 빛바랜 훈장을 받게 됐는데 날더러 여기로 저기로 찾아다니며 신청하라는 처사가 참으로 무심하다 싶었다.

1991년 6월 24일, 총무처에서 발급받은 상훈기록카드와 사진을 첨부하여 무공훈장 정장의 송부요청서를 육군참모총장 앞으로 보냈다. 1991년 7월 3일, 마침내 오랜 세월 주인을 찾지 못했던 정장이 집으로 우송됐다.

그러나 나는 박스 속에 들어있는 무공훈장 정장을 꺼내보고 또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게 훈장인가 싶을 정도로 깡통 같은 양철로 허접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표면은 조잡하게 페인트칠을 해 놓은 이것을 무공훈장이라고 받게 되다니 나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국가유공자에 대한 정부의 처사가 해도 너무한다는 마음이 들어 괜히 아내에게 분을 냈다.

일주일쯤 지나 배달된 훈장을 싸들고 나섰다. 1991년 7월 14일, 총무처 상훈과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나는 조잡하기 그지없는 무공훈장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과장님, 나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수십 년 세월이 지나도록 내가 무공훈장을 받았다는 사실도 모른 채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이제나마 훈장을 받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이렇게 조잡한 깡통 같은 양철조각을 명색이 무공훈장이라고 주시는겁니까?” 상훈과장이 말했다.
“선배님, 다들 상훈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훈장제작 확인서를 발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종로구 관수동에 있는 대한민국 훈장제작소에 제출하셔서 교환하시면 됩니다.” 친절하게 알려줬다.

마음 속으로 진작 그렇게 알려줄 것이지…. 혼잣말을 했다.
기대하는 맘으로 확인서를 들고 훈장제작소를 찾아갔다. 거기에는 50대 정도 돼 보이는 군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훈장에는 선배님의 훈급 번호가 새겨져 제작됩니다. 놋쇠에 쇳물을 부어 견고하게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내일 오후에나 완성됩니다. 제작대금은 1개에 4만 8453원이니까, 2개에 9만 6906원입니다.”

요지인즉 훈장을 구입해 가라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니, 국가에서 발급하는 훈장을 내 돈 내고 사야합니까?”
그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통령에게 물어보시오.” 달리 다른 말을 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일단 제작해 달라고 부탁하고 다시 상훈과장에게 되돌아갔다. “과장님, 세상에 훈장을 파는 나라도 있나요?” 화가 나서 따지듯이 물었다. “선배님이 오해하신 겁니다. 무공훈장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질이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 싫으시면 녹슨 훈장을 그냥 가지고 계시면 됩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무슨 일을 이렇게 하나 싶은 마음에 분통이 터졌다.
“그렇다면 대한민군 훈장제작소라 간판을 걸어놓고 만드는 훈장은 대체 뭡니까?” 따지듯이 말했다. 상훈과장은 자신도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모두들 제작되는 훈장 때문에 불만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이 일은 어디까지나 정책적으로 시행되는 일일 뿐입니다.” 답답한 소리다.

이튿날 상훈제작소에서 훈장을 찾으며 대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영수증을 주지 않는 것이다. “영수증은 안줍니까?” 답답한 마음으로 물었다.

“영수증이 꼭 필요하십니까?”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꼭 그 꼴이다. 결과적으로 국가유공자들의 등을 쳐 피를 빨아 먹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을 겪은 후부터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졌다. 이런 나라가 어찌 발전할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이 됐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란 말이 떠올랐다. 권력은 십년을 못가고 꽃은 열흘 붉지 못하다고 했는데 그런 권력은 결코 오래 못가고 덧없이 사라질 거라는 맘이 들었다.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언젠가 분통터지는 내 입장이 밝혀지리라 확신하며 영수증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시민교회에서 간증하다

1992년 6월 25일, 내가 다니고 있는 서울시민교회 주일 오후 예배 시간에 간증집회가 열렸다. 철없이 학병에 지원해 목숨 걸고 싸운 얘기며, 불행하게 인민군의 포로가 되어 사선을 넘어 탈출하기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었다면 살아 남을 수 없었던 은혜를 성도들에게 나누었다.

1994년 1월 초, 국가보훈처 서울 북부지청에서 한 통의 공문을 받았다. 정부가 관리하는 공법단체인 대한민국 무공수훈자는 관련지청에 등록하고 신분증명서를 받으라는 안내였다. 북부지청에 가서 신분증명서를 교부 받고나니 그 다음엔 국가 유공자 노원구 지회에 가서 회원 등록을 하라고 했다. 등록을 마쳤더니 지회장인 ‘박청산’ 선배가 등록회원 250명 중 내가 가장 최연소 회원이라며 반긴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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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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