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호 / 믿음의 삶
누군가 나에게 어떤 계절을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주저 없이 겨울 빼고 모든 계절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겨울은 나에게 온 자연의 생명들이 멈춰버린 것 같은, 그저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되는 패스하고 싶은 계절이다. 그런 내게 주님은 최근 내 인생에 겨울과 같은 계절을 보내는 시간을 허락해 주셨다. 그리고 겨울에 담아 놓으신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셨다.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고 선교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주님의 사랑은 공동체라는 환경 속에서 수많은 관계를 통해 옛 자아의 단단한 껍질을 부서뜨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다 다른 지체들과 살아가면서 어려운 시간들을 맞았다.
처음에는 어려운 관계 속에서 ‘내가 참으면 되지. 괜찮아, 좋아질 거야.’ 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참고 견뎠다. 사실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해서가 아닌 철저히 나 자신을 위해서였다. 마음에 어려움을 씨름하는 게 싫고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은 철저한 나를 사랑해서 오는 반응이었다. 그 어려움에서 오는 고통의 시간이 싫어 늘 익숙한 나의 방법으로 피하거나 그냥 덮어 버렸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의 한계선을 넘으면 여지없이 나오는 것은 정죄, 판단, 자기 의로 똘똘 뭉친 교만이 올라왔다. 남편과의 관계 안에서도, 자녀와의 관계 안에서도 숨길 수가 없었다. 마치 똥을 실크 보자기로 덮어도 그 냄새는 숨길 수 없듯이 주님은 그 냄새나는 죄 된 나의 실존을 철저히 직면할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주셨다. 고통스러워 도망가고 싶었다. 아니 증발되고 싶었다. 그 끈질긴 마지막 자존심이 악다구니를 쓰며 몸부림쳤다. 그리고 마치 아이가 막무가내로 떼를 쓸 때 힘이 빠져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처럼 주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난 끝났구나. 믿음으로 일어날 힘도 없었다. 도저히 마음을 일으킬 수 없을 그 때에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앙상한 가지만 있는 겨울나무가 보였다. 주님은 “딸아, 겨울나무가 초라해 보이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저 가지가 살아 있는 것 같니?”라고 물어보시는 것 같았다. “보이는 것은 너무 초라하지만 살아 있잖아요. 봄에는 새싹이 돋을 거잖아요.” 그때 칠흑같이 어두운 심령 안에 진리의 말씀이 비춰졌다.
봄·여름·가을에 보이는 가지의 새싹과 아름다운 꽃, 푸름 가득한 무성한 잎과 무르익은 열매가 어디서 오는지. 매서운 추위와 바람에 모든 것이 사라진 앙상한 가지일 때 비로소 겨울에만 그 생명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바로 그것은 가지 자체가 아닌 오직 그 가지를 붙들고 있는 생명의 공급처인 나무인 것을 주님은 보게 하셨다. 더 이상 결코 초라한 겨울나무가 아니라 그 생명을 충만히 머금고 있는 은혜 위에 은혜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무능과 무지와 죄 된 실존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이며 자랑인지 알게 됐다. 나의 연약함과 수치가 더 이상 마주하지 못할 두려움이 아니다. 이제는 새 노래가 되게 하신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매서운 바람과 추위가 두렵지 않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산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생명력이 찬란히 빛나는 아름다운 때, 바로 그리스도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 [복음기도신문]
김아용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출처를 기재하고 사용하세요.> 제보 및 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