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스코틀랜드는 같은 나라인 듯하지만 다른 나라이다. 두 나라는 하나의 왕국이었지만, 서로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 오래전에 내 룸메이트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머리(Murry)란 친구였다. 나는 그에게 “영국에서 왔느냐?”고 묻자 그는 정색하면서 “나는 스코틀랜드 사람이다”라고 화난 듯이 힘주어 말했다. 한때 스코틀랜드 출신이 국왕이 되기도 했지만,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는 6세가 된다. 그 둘은 통합하려고 가톨릭과 영국 국교와 장로교를 하나의 왕국 아래 두려고 성경을 번역하기까지 했다. 영국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사람을 촌뜨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교회가 왕의 통치를 받는 <감독교회>를 지향하게 되었다.
특히 챨스Ⅰ세 때는 <짐은 국가에도 머리이고 교회에서도 머리이다>라고 하자, 1638년 2월 28일 에딘버러에 있는 그레이스 프라이어스 교회당 앞에 언약도 1200여 명이 모여 국왕의 잘못을 규탄하고, 그 유명한 <언약도들의 신앙고백>을 발표하게 된다. 그것은 존 낙스(John Knox)와 멜빌(Melvil)을 통해서 체계화된 장로교 신앙을 확실히 지키고 선포했다. 이로 말미암아 언약도들은 지붕 없는 감옥에 갇혀 1200명 모두가 순교의 잔을 마셨다. 그리고 챨스Ⅰ세는 나중에 단두대에서 처단되기는 했지만, 챨스Ⅱ세도 언약도들을 박해하고 교회 건물을 파괴할 뿐 아니라, 언약도들은 예배 처소가 없어서 빈 들에서, 또는 광야에 나가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당시 언약도를 지도하는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신앙의 표본이다!”라고 설교하면서 칼빈주의 신앙체계를 지켜왔다. 그들은 교회당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었다.
당시 설교자들은 설교원문을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 성도들이 그 설교를 요약하거나 요점 정리한 것이 있어서 교회당 건물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을 확실히 증거했다. 언약도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지키기 위한 뜨거운 열정과 교회를 왕권 밑에 두려는 국교 운동에 강한 저항이 없었다면 오늘의 장로교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칼빈과 낙스와 멜빌을 통해서 면면히 내려오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개혁 정신을 그들은 소중히 간직했다. 스코틀랜드 사람은 가난했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부요했다. 비록 교회당 건물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수많은 목사와 장로들이 사형 틀에서 순교의 잔을 마셨다. 언약도들은 순교현장에서 조금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외치면서 죽어갔다. 헨더슨(G. D. Henderson)은 “당시 언약도 목사들의 설교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복음 설교로써 불쌍한 스코틀랜드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설교는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지 않는다면 손가락 흔드는 것만 못한 것이다!”라고 선포했다. 도날드 카길 목사가 교수대에 달렸을 때, 가브리엘 셈플 목사는 탈부쓰 감옥에서, “오 주님! 이 감옥을 내가 성결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언약도 목사들은 “프랑스 설교자, 네덜란드 설교자, 잉글랜드 설교자들 및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는 그 어느 지역보다 <심장으로부터 심장으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더 많았다!>”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설교란 모든 영적인 것들의 활력의 근원이었다. 설교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최고의 정수였다!”라고 한다. 또한 “언약도 목사들은 천상의 대화를 나눈 강력한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그들은 청중들의 심령을 사로잡은 자들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설교에는 <자기 부인>이 곧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다!”라고 선포했다. 결국 언약도 설교자들은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자 존 낙스를 모델로 하고 있었다. 낙스는 메리 여왕 앞에서 불같은 호령으로 죄를 책망했고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아 선지자를 표본으로 삼은 것이다.
언약도들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의 메시지처럼 사람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청교도(Puritan) 설교자들은 후세에 많은 작품을 남긴 것에 반해서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수많은 고난과 순교의 길 때문에 비교적 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후일 발견한 메모와 설교 개요를 1800년대 전후해서 그 설교들을 재구성했다. 필자는 언약도에 대한 관심으로 언약도들의 신앙고백은 물론이고 옥외에서 예배드리면서 성찬식을 하던 <성찬기>도 있다. 언약도들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생명을 바치며 떠돌이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지키고 성경의 복음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선포한 것이 오늘의 장로교회를 지켜온 것이다.
그런데 여러 해 전에 코로나19 시절, 코로나 예방을 이유로 교회 예배를 제한하고 이른바 20%만이 예배를 했었다. 하지만 몇몇 교회는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못 보게 한다면 주차장에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예배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국가의 법을 어기지 않고 <예배의 자유>를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 전 교단 적으로 아무런 메시지가 없었다는 것이 언약도들의 신앙에 비하면 지금의 신앙은 너무나도 어리지 않은가 싶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 진리 곧 복음이 바로 증거되어야 참된 교회이다. 그러나 오늘의 유럽 교회가 건물은 화려하게 지었으나, 생명을 건 말씀선포, 진리를 위한 투쟁이 없었기에 그 화려한 교회당 건물이 댄스홀로, 마켓으로 팔리고 있다.
<언약도의 신앙>을 다시 생각해본다. 평양신학교를 세운 <마포 삼열> 박사도, 그의 부친도 언약도의 후신이었음을 기억하자! [복음기도신문]
정성구 박사 |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40여년간 목회자, 설교자로 활동해왔으며, 최근 다양한 국내외 시사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조명한 칼럼으로 시대를 깨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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