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사랑 모르는 아이들에게 하나님 사랑을 전하고 싶어요” – 이중구 목사

포기 없는 사랑으로 다음세대를 섬기는 이중구 목사 (할렐루야교회)

이중구 목사 (할렐루야 교회)

500원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갔던 어린 중구. 500원 속에 담긴 주님의 사랑과 소망은 다음세대를 섬길 어른 중구로 이끌어냈다. 목회자가 된 중구는 이제 뒷골목을 배회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오늘의 중구를 찾아 나선다. 다음세대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그는 아이들을 찾기까지 찾아내고 끝까지 놓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그를 ‘호랑이’라고 부른다. 연산동 호랑이 이중구 목사의 순종기를 청취했다.

– 다음세대 사역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첫 사역은 호주 시드니에서 한글보다 영어가 더 편한 1.5세 아이들을 맡으면서 시작됐습니다. 저를 아끼는 교수님의 소개로 가게 됐어요. 이 얘기를 하면 영어를 잘할 것처럼 생각하시겠지만 영어 한마디 못하는 제가 그 아이들하고 손짓 발짓으로 설교하고 사역을 했습니다. 호주에 간 지 얼마 안 있어서 햄버거를 먹으러 갔어요.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햄버거 주세요.’라고 말했는데, 계속 추가 질문을 하더군요. 분위기 따라서 ‘예스, 예스.’ 이렇게 하다 보니 햄버거 4개에 음료수 3개, 감자 튀김이 나온겁니다. 펑펑 울면서 햄버거를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만큼 영어를 못했으니까 아이들에게 얼마나 설교하는 게 쉽지 않았겠어요. 그렇게 어학 공부를 하면서, 처음 6개월 정도는 새벽에 일어나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학교 마치면 다시 도서관에 가서 저녁까지 공부하다 보니 조금씩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어요. 이후로는 호주를 많이 느끼고 아이들과 어느 정도 대화를 하며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신학대학원을 가기 위해 2011년도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은혜로 신학을 공부하다

– 호주 가시기 전에 신학교를 다니셨군요.

“네. 그렇죠. 그전에 과정이 좀 있었어요. 우리 가정에는 저 말고는 아무도 교회를 다니거나 예수님을 믿는 분이 안 계세요. 어머니는 강한 불교 신자셨어요. 제가 군대 제대 후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소명을 받고 신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다니던 공대를 그만두고 신학과로 편입을 했습니다. 어머니께는 차마 말씀을 못드렸어요. 그러다 한 달 만에 어머니께 들켰어요. 고신대 신학과가 공부를 정말 힘들게 시키거든요. 도서관에 새벽까지 있다가 집에 가게 되고, 가방에 이상한 책들이 있는 것들을 보시고 어머니가 눈치를 채셨어요. 솔직하게 말씀드렸죠. 어머니는 ‘너 목사 되는 데는 내가 돈 쓸 수 없다.’고 하시며 지원을 끊으셨어요. 그렇게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면서 거의 학교에서 살았어요. 용돈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하고 나눠 먹으면서 공부를 했어요. 문제는 다음 학기에 대한 보장이 없었어요. 그때부터 영도 앞바다 시퍼런 바다를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매일매일 ‘하나님 저 이제 어떻게 해요? 다음 학기에 보장이 없는데, 하나님 어떻게 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계속 저에게 ‘당당하게 네가 공부해서 장학금 받아서 학교 다녀라.’는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감사하게도 졸업할 때까지 성적 장학금으로 졸업을 할 수 있게 됐어요. 교수님이 저를 호주에 소개시켜주신 것도 제가 고신 교단에서 잘 자라서 교수도 하고 사역을 하면 좋겠다며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려고 하셨던 거였죠. 그러나 제가 어릴 때부터 자랐던 교회는 합동 교단이었기 때문에 고민하다가 합동 교단의 신대원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합격이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시험에 떨어지면 다음 시험을 기다리기까지 집에서는 놈팽이가 되는 거기 때문에 하나님께 붙여달라고 매일 밤 울고 기도하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바로 합격을 했어요.”

▲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중구 목사. 제공: 이중구 목사

– 청소년 시절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맞고 속옷 바람으로 집에서 쫓겨나시는 모습을 다락방에서 작은 창문을 통해 봤습니다. 이후 5년 반 정도 동안 어머니를 못 만났어요. 어머니가 안 계시다 보니까 밥 먹는 문제가 해결이 안됐어요. 친할머니가 있는 산동네로 옮기게 됐는데, 거기는 저와 비슷한 부류의 친구들이 참 많았어요. 이혼한 가정이라든지, 편부모나 조부모가 키우는 아이들이 많아서 그런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게 됐어요. 그 친구들 앞에서 제가 혹시나 손가락질 받을까봐 힘이 세야 되겠다는 마음에 골목대장처럼 아이들을 힘으로 위협하고 과시하는 시간을 보냈어요.”

– 교회는 언제 나가게 되셨나요?

“교회를 처음 가게 된 게 5학년 때였어요. 교회에서 전도잔치라는 걸 하잖아요. 한 친구가 누구를 전도하면 제일 많이 아이들을 데려올까 고민을 하다가 저를 생각했나봐요. ‘중구야, 교회 한 번만 가주면 안 되냐?’ ‘내가 가주면 뭐 해줄래?’ 했더니 1인당 500원씩 주겠다고 했어요. 제 기억으로는 한 11명 정도 제가 애들을 모아서 데려갔던 것 같아요. 그게 모교회인 재송제일교회를 처음 가는 순간이었어요. 교회 가서 처음 느껴보는 약간의 어색함이 있었어요. 저는 엄마가 해주는 밥도 못 먹고 늘 아빠의 거친 면만 봤는데, 선생님들은 너무 친절하고 상냥하고 따뜻하고 온화했어요. 처음에는 선생님들이 해주는 게 너무 좋아서 배고프면 교회 갔어요. 또 공과 공부 마치면 선생님이 500원씩 주기로 약속을 하셨죠. 500원 받으려고 교회에 가서 예배는 안 드리고 밖에 있다가 공과 공부하면 들어가서 500원을 받아왔어요.”

교회 선생님의 인내와 사랑을 경험하다

– 선생님의 인내와 사랑의 열매시군요.

“당시에 제가 사고 치고 염색하고 방황하는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저놈 뭐 될까, 저놈 엄마 없어서 저렇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그 장로님은 ‘나는 누가 뭐래도 네 인생이 너무나 기대되고 너무 빛이 날 거라고 생각한다.’고 해주셨어요. 제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하시고, 당시에 부산대학교의 교수님이셨어요. 한번은 부산대학교에 우리 반 아이들을 다 부르셔서 그 제자들 많이 있는 데서 우리를 자랑스러운 제자들이라고 소개해 주셨어요. 성적으로는 부산대 구경도 못 갈 저희를 제자들이라고 소개해 주시고 네 인생이 참 기대되고 소망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해주셨던 장로님의 사랑은 아직도 잊지를 못하겠습니다. 지금도 한 번씩 전화 드리고 스승의 주일이 되면 교회로 모시기도 합니다.”

– 그런 사고뭉치 중구는 언제 주님을 만나게 되나요?

“교회에 적응을 잘 못하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참 예쁘게 생긴 누나를 보게 됐어요. 정말 연예인처럼 예쁘고, 단발머리에 뽀얀 얼굴에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누나였어요. 누나는 새가족 팀이라서 저한테 잘해준 건데 제가 오해를 한 거죠. 저 사람이 나에게 빠졌구나. 예수님은 관심 하나도 없고 그 누나가 인사해 주는 걸 받고 싶어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가, 누나가 어느 날 수련회에 가자고 했어요. 누나도 가냐고 물었어요. 예수님이 거기 계신가는 전혀 중요치 않고 누나가 가는 게 중요했죠. ‘너 가면 누나 조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 한마디에 무조건 가야겠다고 결단하고 첫 인생 수련회를 떠났어요.”

사고뭉치, 주님을 만나다

– 수련회는 어땠어요?

“집회라는 현장을 제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어요. 예배는 드렸고 찬양하고 이런 건 알았지만, 갑자기 불을 끄고 여기저기서 고함지르고, 주여 주여 하고, 방언하시는 권사님들을 보면서 첫날에는 도망나왔어요. ‘여기 있다가는 현혹되겠다. 정신을 차리고 내 영혼을 내가 구원해야 되겠다.’ 싶어서 화장실에도 숨어있다가 도망가고, 결국에는 옷장에 숨어있었어요. 그곳에는 이미 친구 한 명이 숨어있더군요. 결국 둘째 날 붙잡혀서 설교가 시작될 즈음 목사님이 설교하는 강단 바로 앞에 둘만 특별석으로 앉게 됐어요. 목사님 설교를 듣는데, 재미도 없고 진짜 지루했어요. 그러다가 기도회가 시작됐는데 목사님이 저에게 다가오시더니 제 머리를 붙잡고 느낌에 1시간 정도 저만 위해서 기도해 주신 것 같아요. 이분이 왜 나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시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랜 시간 지나고 나니 끈적한 액체 같은 게 막 떨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목사님의 눈물 콧물이 막 섞여서 떨어지는데 무슨 기도를 하시길래 저렇게 뜨겁게 울면서 기도하나 봤더니 저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이 놈이 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늘 외롭다고 말하고, 방황하고, 하나님이라는 분 없다며 삶을 살아가는데 오늘 이 밤에 이 놈 좀 만나주세요. 하나님, 이 밤에 한 번만 하나님 살아계신 것을 알려주세요.’ 그 한마디가 그냥 그대로 가슴에 꽂혔습니다. 바로 꼬꾸라져서 무릎 꿇고 새벽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었어요. 그때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 영접한 날이었습니다.”

▲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제공: 이중구 목사

– 그렇게 주님을 만나셨군요? 이후에 주님이 어떻게 인도해주셨을지 궁금합니다.

“제가 중3 때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됐어요. 아버지가 버스를 타고 가시다가 걸어가시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바로 내리셔서 만나셨대요. 우리는 이렇게 살아도 아들은 봐야 되지 않겠냐고 하셨다고 해요. 5년 넘게 제가 늘 기도했던 제목이 이뤄진 거죠. 울면서 ‘하나님, 엄마 보고 싶어요.’ 그렇게 간절하게 보고 싶었던 엄마를 중3 때 다시 만나게 됐어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고, 어머니가 저를 키우겠다고 하신 거죠. 그렇게 어머니와 살게 된 이후 명절이 되면 아버지는 친가로 어머니는 외가로, 저는 가운데에서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눈치를 봐야 되는 생활을 계속 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저는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 제대 후 복학을 했는데 인생이 재미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집을 나와서 교회 청년부실에서 지냈어요. 그러다 제 인생에서 굵직한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 어떤 사건인지 궁금하네요.

“편입을 결정하고 고신대 신학과 면접이 있던 때가 명절 연휴 바로 다음날이었어요. 명절 첫째 날 둘째 날은 아무데도 가지 않고 교회에서 계속 누워 있고 컴퓨터 하면서 편의점 가서 라면 먹고 이렇게 지내고 있었어요. 명절이 끝나면 바로 면접을 보러 가야 되니까 양복을 가지러 친가에 갔어요. 친척들이 모두 계셨는데, 제가 이틀 동안 제사에도 참여 안 하고 어른들한테 인사도 안 드리고 하니까 할머니가 화가 나셔서 제 짐들을 문 밖에다가 던지면서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여기에 발 들이지 마라.’고 하셨죠.”

<이상 294호에 게재>

그 짐꾸러미를 들고 나왔는데 갈 곳이 없더군요. 엄마는 엄마대로 외가에 가 계시고 아버지는 술 취해서 누워 있고 친가 식구들은 나가라고 했으니 ‘나는 정말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누가 나에게 이런 슬픈 가정의 현실을 줬는가?’ 생각하니까 그 모든 비판의 대상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삿대질을 하면서 욕도 많이 했어요. 그 밤에 결국 제가 선택했던 건 아파트 옥상이었습니다. 용기가 있었으면 그때 끝났을 삶이었는데 용기도 없었을 뿐더러 당시 산동네에는 높은 아파트가 없었고 고작 5층짜리다 보니 떨어져도 다치기만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다시 내려와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죠. ‘엄마, 나 이런 인생 너무 지긋지긋해서 오늘 마감하고 싶다.’ 그리고 전화기를 끄고 어떻게 죽어야 되나 생각하면서 정처 없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문자를 받자마자 제 교회 친구들하고 형들한테 다 연락해서 ‘제발 중구 좀 찾아달라. 이놈이 나쁜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난리가 난 겁니다. 저를 찾아다니며 소동이 난 거예요. 그중에 저를 참 좋아해주던 형이 제 소식 듣자마자 재성동 산골짜기 동네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다가 어느 한 성당 옆에 울다가 지쳐서 꼬꾸라져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저를 일으켜 세우고 멱살을 붙잡더니 뺨을 후려치는 거예요. ‘어디 그딴 생각하냐.’고 제 멱살을 잡은 상태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어요. 어머니가 오셨는데, 제가 돌멩이 잡아 어머니 옆으로 집어던지면서 ‘지긋지긋하다고, 내가 뭘 잘못해서 항상 엄마 아빠의 이런 선택에 내가 피해를 보냐.’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게 고신대 면접날 새벽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 그 어려운 시간을 어떻게 지나셨어요?

“사람들은 다 집으로 돌아갔고 저는 교회로 왔어요. 제가 늘 기도하던 초등부실 기도 자리에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 있는데 제가 6개월 넘게 면접을 보면 이런 말해야지, 내 사명은 이렇다고 말해야지, 멋지게 준비해 놨던 게 다 무너졌어요. 그리고 2~3시간 동안 하나님이 저에게 왜 목회자로 부르시는지, 내가 왜 청소년 사역자가 되었으면 하는지,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너에게 이런 가정의 아픔을 줬는지, 왜 엄마를 못 보고 살았는지에 대한 모든 것들을 필름처럼 다 보여주시면서 저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 그런 가운데 사명을 받으신 거군요. 면접은 어떻게 됐죠?

“퉁퉁 부운 눈으로 면접 장소에 도착했어요. 신학과 교수님들이 왜 지원하느냐고 물어봤을 때, 옆에 정말 멋지게 대답하는 사람들 많았거든요. 제게도 물어보셨죠. ‘교수님 저는 사실 어제 삶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마감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제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이 목회자의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랑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하나님이 저를 사랑한다는 것이 새벽에 너무 명확하게 느껴졌고 그것이 제 삶의 이유가 됐기 때문에 제가 신학교를 가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교수님들이 뭔가 사건을 치르고 온 듯한 느낌이 들잖아요. 눈도 빨갛죠. 초췌한 모습이죠. 하니까 질문이 막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성경을 몇 독했습니까? 저는 한 번도 일독한 적이 없습니다. 전도는 몇 명 해봤습니까? 제대로 전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집에서는 누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 다니는 건 저밖에 없습니다. 지난주 설교 본문은 무엇입니까? 기억이 안 납니다. 정말 어느 질문 하나에도 제대로 답한 게 없었거든요. 그런데, 처음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은혜로 붙은 것 같아요.”

“사랑받은 적이 없다고 느꼈던 저에게 하나님은 저를 사랑해 준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저처럼 사랑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애들이 많을텐데 ‘아니라고, 하나님이라는 분이 너희를 사랑하신다.’ 이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주셔서 지원했습니다.”

금식하며 청소년 수련회 준비… 연산동 호랑이 되다

– 다음세대에 사역자로 부름받으시고 어떻게 사역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신대원 들어가는 해에 바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부산에 있는 서문교회에서 초등부 전도사를 시작으로 중등부, 고등부를 맡게 됐습니다. 중고등부 아이들을 봤는데, 뭔가 패배 의식이 강하고 교회는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는 분위기였어요. 학생들은 한 50~60명 정도 있었어요. 이 애들 정신개조부터 시켜야 되겠다 싶어서 수련회를 기획했어요. ‘너희는 집회가 필요 없는 인간들이다. 너희들은 정신부터 개조를 시켜야 되겠다.’ 하고 무데뽀로 천왕봉 수련회를 기획하고, 저는 일주일 동안 금식을 했어요. 교사들과 아이들이 98% 정도 참석했어요. 한 명이라도 안 가면 전체 안 간다고 으름장을 놓고 한 명 한 명 갈 때까지 물고 늘어졌어요. 그때부터 호랑이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무조건 끝까지 찾아온다는 의미죠. 당시 교회가 연산동에 있었기 때문에 저는 연산동 호랑이었어요.”

▲ 제18회 SPIRIT POWER 전국청소년연합수련회 현장. 제공: 이중구 목사

– 수련회는 어땠나요?

“저는 1시간도 안 돼서 퍼졌어요. 먹은 게 없다 보니까 쓰러져서 거의 기어가다시피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고 나머지 교사들과 아이들은 대피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다가 제가 안오니까 고3 애들이 내려와서 저를 질질 끌고 부축해서 올라갔어요. 저는 대피소 도착해서 바로 기절해서 잠들었고, 다음 날 아이들은 청년 교사들이 다 알아서 챙겼다고 해요. 다음 날 대피소에서 천왕봉을 올라갔다가 해를 보고 내려와서 집회를 했는데 그때 아이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공동체라는 게 뭐냐. 이런 거다. 전도사님이 쓰러지니까 3학년 애들이 내려와서 나를 끌고 가지 않았냐. 우리가 하나라는 게 이런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핏값 주고 사신 공동체가 바로 이런 교회다.’ 그때 아이들이 부둥켜안고 울고, 레크레이션 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랬더니 다음 주부터 전도하라고 말도 안 했는데 애들이 ‘우리 교회 재미있으니까 와라.’ 하면서 전도하더니 그 해 여름에는 150명 정도가 왔어요.”

– 아이들을 어떻게 섬기셨어요?

“많은 아이들이 예전에 저와 같았던 친구들이었어요. 인정해 주는 사람 없고 사랑해 주는 사람 없고, 편부모 아이들도 많이 왔고, 몸에 문신하고 있던 친구들도 많았고,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아이들도 참 많았어요. 주일날 예배 잘 드리고 헤어졌는데 전화 받고 나가보면 교회 마당 놀이터에서 소주를 병째로 먹고 있는 아이들도 많았어요. 그런 아이들의 삼촌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형처럼 한 6년 정도를 사역을 했어요.”

– 어린 중구와 같은 아이들을 섬겼던 연산동 호랑이 이야기좀 들려주세요.

“PC방이나 당구장에 제가 자주 나타나는데, 항상 그 아우라에 중고등부 애들이 따라다녔어요. 우르르 10명이 PC방, 당구장, 노래방에 다니면서 예배 안 드리는 애들 잡으러 다녔죠. 그러면 애들이 ‘호랑이 떴다. 도망가라.’ 하면서 도망다녔는데, 제가 말 안 듣고 예배 안 드리고 개기고 이러면 끝까지 잡으러 갔거든요. 저한테 실망하고 막 욕하고 이제 교회 안 다닐 거라고 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온정을 다 줬던 거 같아요.”

–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세요?

“제가 진취적으로 계획을 가지고 이루어 내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근데 막상 뭔가 주어지면 누구보다 잘해야 되고 열정을 내는 기질을 갖고 있어서 치밀하게 준비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제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계획대로 된 게 거의 없더군요. 오히려 거꾸로 하나님이 이 교회로 불러서 사역을 하게 해 주셨고 길을 열어주셨어요. 그래서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열정적으로 순종하는 것밖에는 다른 계획은 없어요. 이곳에서도 뉴젠이라고 하는 다음세대 디렉터를 맡아서 여러 사역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농구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담임목사님의 개회사가 끝나도 아멘을 하지도 않고 게다가 교회 주변에서 담배를 피웠어요. 목사님들이 난리 났다고 빨리 이중구 목사님 찾아라 하면서 당황스러운 분위기도 연출됐지만, 모두 섬겨야 할 어린 중구라고 생각합니다.”

– 끝으로 기도제목 말씀해주세요.

“제가 얼마 전 생일날, 본당에서 잠시 기도하고 받고 싶은 선물이 뭘까 생각해 봤어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제 아내의 소원은 제 생일이나 기념일에 제대로 된 선물 하나를 해주고 싶은 겁니다. 연애할 때부터 뭐 하나 사오면 반품, 환불을 안 한 적이 없어요. 아주 단촐하게 살아가는 걸 좋아하거든요. 아내나 주변 사람들이 제 생일날 뭐 필요하냐고 몇 년을 물어봐도 늘 필요한 게 없다고 대답을 해서 제가 이번에는 필요한 게 뭘까? 하나님께 받고 싶은 선물이 뭘까? 생각하면서 4가지를 적었습니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십자가 생각하면 눈물이 메마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복음을 설명할 때 식지 않는 열정이었으면 좋겠다. 형제들에게 나누는 베풂의 삶이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4가지 선물을 하나님께 받는 것이 기도제목입니다.” [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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