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 “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 오래되고 진부한 이 말이 나를 조롱했다. 나는 살면서 하나님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주신 게 분명하다고 여러 번 느꼈다.
생명을 위협하는 발작으로 인해 임사 체험까지 한 아들을 둔 사람에게, ‘그건 당신이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입니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경우는 또 어떤가? 무력함? 만성통증? 어쩌면 당신에게는 이보다 더 나쁜 시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모든 상황을 견디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며 그 상황을 헤쳐 나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옆방에서 구급대원들이 발작하는 아들을 치료하는 동안 땀에 젖어 기절한 채 욕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나를 생각하면, 그건 도무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가 없다.
사자와 우리의 한계
“갤럽, 브리, 뛰어. 너희는 군마라는 사실을 기억해”(The Horse and His Boy, 270). 자신의 조국 칼로르멘의 악을 피해 도망친 어린 공주 아라비스는 말하는 말 브리에게 적들로부터 최대한 빨리 도망가라고 재촉했다. C. 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7권 중 하나인 말과 소년(A Horse and His Boy)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브리와 친구 흐윈(Hwin)은 각자 나름 생각하기에는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거 같다. “확실히 두 말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리고 이렇게 지적한다. “하지만 그 둘은 결코 같은 게 아니다.”
말하는 두 마리의 말과 그 등에 올라탄 소년과 소녀의 필사적인 질주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공포의 정점을 향해서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 그들은 칼로르멘 군인들로 이루어진 끔찍한 군대의 추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가까이에서는 더 위험한 적인 위대한 사자가 바로 뒤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브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사실 별로 빠른 게 아니었다. 샤스터는 그 변화를 바로 느꼈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271). 동화 속 이 단순한 장면이 지난 십 년과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측면에서 내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어려움 속에서 나의 “한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2)어려운 시기에 나를 짓누르는 분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3)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정도까지 짓누르기로 선택하셨는지와 관련해서도 그분의 선하심을 엿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욕실 기절 사건에 적용하기
브리는 위대한 사자 아슬란을 등에 태우고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만, 내 경우에는 위기를 맞은 아들과 필사적으로 함께하고 싶었던 바로 그 순간에 정신을 잃었다는 점에서, 거기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정신을 잃어버린 끔찍한 생리 반응을 어떻게 사자를 등에 태우고 속도를 더 내는 브리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겉으로만 봐서는 전혀 비슷한 게 없다. 하지만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있던 나는 나만의 새로운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거기 누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내 아들을 구해 달라고 간구했고, 동시에 주님을 더 믿기 위해서 내게는 새로운 변속 기어가 필요했다. 내가 매 순간 아들 곁에 있을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은 항상 계셨다. 나는 아들의 발작을 멈출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었다. 아들이 죽는다고 내가 따라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내 아들 곁에도 계실 것이다. 브리와 마찬가지로 나도 내 생각에 괜찮다 싶을 정도만 믿음을 가졌다. 사실 그게 대단한 믿음도 아니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내가 다 감당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로 대단한 시련이 아니었다. 위대한 사자의 추격과 함께 나는 새로운 믿음의 차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은 알고 있는가? 당신이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상 한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창조자이자 유지자가 아니기에,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당신의 한계를 결코 제대로 알 수 없다.
내 한계를 넘어서
우리는 모든 걸 다 바쳤고, 남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나의 한계를 제대로 시험해 본 적이 없다. 내 마음은 끊임없이, ‘나는 안 돼, 이건 내 한계를 넘은 거야, 이런 손해는 감당할 수 없어, 이런 시험은 말도 안 돼, 난 이런 결과를 감당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으로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필요한 압력을 행사하신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말한다.
알다시피, 고난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믿음이 우리가 원래 강인한 체질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는 건 내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다. 성령으로 인해서 우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화장실 바닥에서 박박 기는 동안에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할 수 있다.
변치 않는 사랑의 길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통해서(그분을 의지함으로써)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음을 종종 보여주신다. 그리고 직관에 거슬리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는 단지 격려나 긍정적인 사고 또는 확언을 통해서 우리를 그 믿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다. 브리의 경우처럼 고통과 시련을 증가시킴으로,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해서 달려나가도록 인도하신다.
브리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속도를 높이자, 위대한 사자는 그들과 그들을 쫓는 진정한 적들 사이의 거리를 더 벌어지게 했다. 아슬란이 그들을 겁주었지만, 결국에는 그게 다 그들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서였다. 우리도 바울처럼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느낄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고 선한 일에만 복종하게 하실 뿐, 필요 없는 고통은 단 한 방울도 더하지 않으실 것임을 믿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일이 합력하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신다(롬 8:28-29).
하나님께서 우리가 죽어라 질주하고 숨에 헐떡이도록 몰아가실 때, 그건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은혜이다. 그분은 오로지 선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는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새롭게 바라보라고 우리를 압박하신다. 그분은 우리와 옛 적들, 즉 세상과 육신과 마귀 사이에 거리를 두심으로써, 정말로 해를 끼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신다.
당신이 위대한 사자의 압력을 받는다고 느낄 때 결코 잊지 말라. 그의 모든 길은 변함없는 사랑이다(시 25:10). 화장실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도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다. [복음기도신문]
아비가일 도즈 Abigail Dodds | 아비가일 도즈는 다섯 자녀를 두었다. 지은 책으로는 Bread of Life: Savoring the All-Satisfying Goodness of Jesus through the Art of Bread Making이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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