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거듭났는가? 구원받았는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냐고 묻지 않았다. 복음을 깨달았냐는 질문이 아니다. 종교적인 열심과 섬김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싶은 것도 아니고, 영적 체험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묻는 것도 아니다. 교회 얼마나 오래 다녔는지에 관한 질문도 아니다. 질문은 매우 단순하고 분명하다: 당신은 거듭났는가?
거듭남(born again)은 영적 출생이다. 출생 이전엔 존재 하지도 않았던 아기가 생명을 얻어 출생하는 것처럼, 거듭나지 않은 영혼은 생명이 없는 죽은 영혼이고, 거듭난 영혼은 생명을 얻은 산 영혼이다. 다른 말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3, 5절).
당신이 나면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다니고,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 지식을 많이 쌓고, 한 번도 방황하지 않고 교회의 모든 공적, 사적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뜨겁게 예배하고, 교회 안에서 끈끈한 친분을 쌓고, 섬김과 봉사에 항상 힘썼더라도 거듭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거듭난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인에 불과하다.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 오래 살아온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 가족으로 입양된 적도 없는 남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얻어 출생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진노의 자녀, 불순종의 아들, 딸이다(엡 2:1-3).
너무 과장해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가? 괜히 겁주려고 심각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에게 예수님은 정확히 이렇게 말씀하셨다(요한복음 3장).
1. 누구나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먼저 니고데모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다(1절). 그 말은 그가 유대교 경전(구약성경)에 능통했다는 것이고, 성경의 가르침과 유대교 전통을 철저히 따르는 삶을 살았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니고데모는 신실한 성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견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아가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였다(71명의 산헤드린 공회원). 경건에 이르는 지식과 삶의 방식이 남들보다 뛰어나 남들을 가르치고 이끌 만큼 최고 수준이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셨는데(10절), 오늘날 교회의 목사, 목사 중에서도 한국 교회 전체를 대표할 만큼 탁월한 지식과 지혜, 인품과 신앙, 리더십을 겸비한 지도자였다.
많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적대했으나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혹시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일 수 있다고 믿었다. 니고데모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께 말한 것이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예수님을 반대하는 종교 지도자들 대다수가 그분이 하신 일까지도 불신하고 왜곡하고 거부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면, 귀신 바알세불의 힘으로 했다고 하고(마 12:24), 병자를 고치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죄라고 책잡았으며(마 12:10), 성경을 풀어 하나님의 진리를 권세 있게 가르치면 놀라면서도 무슨 권리로 가르치냐고 따졌다(마 21:23).
그에 비하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아주 좋게 평가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스승이면서도 예수님을 “랍비”, “스승”이라 높여 부르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표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인정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상당히 존경했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하나님의 권세로 가르치시고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도 믿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매우 충격적이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는 예수님께서 정말로 중요한 말씀, 듣는이가 주목하여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 중의 참 진리를 선포하실 때 자주 사용하신 강조법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지금 누구에게 하셨나? 평범한 백성? 아니다. 그들의 지도자다. 성경을 대략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최고로 잘 아는 선생이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께 호의적이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며 높이는 사람이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7절). 참 놀랄만한 말씀이다.
니고데모같은 사람에게도 거듭남이 요구된다면 다른 사람은 어떻겠는가?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거듭남 없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당신도! 이것이 진실로 진실로 예수님께서 알려주기 원하신 명백한 진리다.
2. 누구도 스스로 거듭날 수 없다
그러면 도대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Born again”(‘다시 태어나다’)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답을 간절히 얻기 원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어떤 사람은 이 질문을 굉장히 유치하고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뛰어난 율법 교사면서 어떻게 주일학교 수준의 질문을 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니고데모의 질문은 거듭남의 본질을 제대로 꿰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새로운 의지와 결심으로 전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때 ‘거듭났다’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스크루지 영감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본 유령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식으로.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생각의 변화, 단호한 의지, 삶의 반전도 ‘거듭남’에 미치지 못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은 정말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모태에서 나오는 과정을 통해 특정한 인격, 성향, 기질, 재능을 가진 사람이 출생하듯,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을 통해서 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후 5:17).
예전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해서 거듭난 것이 아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더 편해졌다고 해서 거듭난 것도 아니다. 성격이 좀 긍정적으로 바뀌었고, 예수님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으며 예배와 교제가 즐거워졌다는 것만으로 거듭났다고 확신할 수 없다. 거듭남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성향과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새로운 인격이 내 안에 생긴 것처럼, 나는 여전히 나이지만,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것을 정확히 묘사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1-23).
거듭나기 전 바울은 악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을 미워했다. 그런데 거듭나고 나서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을 갖게 됐다.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 원하는 성향과 욕구가 생긴 것이다. 없던 내적 전쟁이 시작됐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확신에 차 선포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니고데모가 몹시 알고 싶었던 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냐’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주님은 누구도 스스로 거듭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8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다시 한번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이 영적 진리를 우리가 알기 원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 한다. 물로 받는 세례(침례) 혹은 말씀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벧전 1:23). 하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은 구약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자기 백성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새 언약을 이렇게 맺으셨다:
① 모든 죄, 더러운 것, 우상숭배에서 정결하게 할 맑은 물, ② 하나님의 법을 행하게 하실 하나님의 영(성령). 이 두 가지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새 영, 새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하실 것이다.
거듭나게 하시는 일은 온전히 하나님의 일이다. ‘내가…하리라’, ‘내가…하리라’, ‘내가…하리라’ 계속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맑은 물이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듯, 하나님이 우리를 정결하게 씻으실 것이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일으키시는 놀라운 신비다. 초자연적 역사다.
그래서 예수님은 8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우리는 바람이 부는 걸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볼 수는 없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하나님은 욥에게 물으셨다: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욥 38:24). 사람은 그 답을 모른다.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거듭남도 그렇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맛본 사람이다. 자기 힘이나 의지나 노력이나 공로로 거듭나게 된 것이 아니다. “거듭나다”(born again)의 또 다른 의미는 ‘위에서 나다’(born from above)이다(요 8:23).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거듭날 수 없다. 누구도 스스로 거듭날 수 없다. 우리 육신의 출생을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영혼의 거듭남 역시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7절). 누구든지 거듭난 자는 그래서 이렇게 찬양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3. 예수를 믿으면 거듭날 수 있다
거듭남이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면,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고 멸망할 자를 멸망하도록 유기하실 것이니 그냥 정해진 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걸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방법을 알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물었고(9절), 예수님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구절(16절)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방법을 명쾌하게 설명하셨다(10-21절). 한 마디로 ‘나를 믿어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그를 거듭나게 하신다. 영생(영원한 생명)을 주신다(15절, 16절).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먼저, 예수님을 믿으려면 그분이 당신을 위해 하신 일, 아버지께서 당신을 거듭나게 하시려고 아들 예수님을 통해 하게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작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 심지어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 그 이유도 명확히 알지 못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니고데모가 분명히 알도록 밝히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를 범하여 그에 대한 심판으로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나님은 놋뱀을 장대에 달아 높이 들고 그것을 보는 자마다 구원받게 하셨다(민 21장). 예수님은 지금 그 사건을 빗대어 자신이 하실 일을 설명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믿어야 할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모든 사람은 온몸에 독이 퍼져 죽어가고 있다. 불뱀에 물려 독이 퍼져 죽음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처럼, 죄는 온 세상 사람의 모든 영역을 파괴한다(전적 타락).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한다. 빛이 아니라 어둠, 선이 아니라 악을 사랑하고 행한다. 결국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
둘째,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자기 독생자,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을 위해 주실 만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죄인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나무에 달리셔야 했다. 그것이 아들이 순종해야 할 아버지의 뜻이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죄인이 구원받게 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게 하셨다(16, 17절). 거듭나게 하셨다.
당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이미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항상 혼란스러운 건 ‘내가 믿고 있는지 아니면 알고만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세 가지 질문을 통해 믿는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나는 이것을 나에 관한 사실로 믿고 있는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TV 생중계로 지켜볼 때 우리는 이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란 걸 알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우크라이나 시민 중 하나라면 그 사실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믿음을 요구한다. 내 죄가 매우 심각하여 나를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으로 끌고 갈 정도라는 걸 믿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참을만한 고통으로 의사를 찾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 이천 년 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역사적 사건이 그냥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 내 죄를 대신 치르시기 위해 예수님이 스스로 감당하신 값비싼 희생의 사랑이라는 걸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려고, 거듭나게 하시려고, 내가 달려야 할 그 십자가에 생명의 주를 다셨다는 걸 믿어야 한다.
둘째, 나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있는가? 우리의 믿음은 사실에 관한 믿음을 넘어 사람에 관한 믿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만 믿는 게 아니라 그 일을 하신 예수님을 믿는다. “그를 믿는 자마다”(16절). “그를 믿는 자는”(18절).
이 말은 곧 우리의 믿음이 아무런 관계없는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분께 두는 믿음이라는 걸 의미한다. 예수님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으로 이 관계를 분명히 하셨다(요 14:20). 성경은 우리가 따라야 할 수많은 법칙과 규율의 목록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신, 그래서 함께 살아가야 할 예수님을 보여준다(요 5:39).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범사에 예수님을 인정하는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기쁨으로 하기 원하고, 미워하시는 일은 나도 함께 미워하는가? 예수님에 관하여 더 알고 싶고 더 친밀한 사귐을 누리고 싶은가? 믿는 자에게 바로 그런 생명이 있다.
셋째, 나는 진리를 따르는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20-21절).
야고보는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행함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이것은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그에 합당한 열매로서 행함을 맺는다는 말이다. 진리를 따르는 것은 거듭남의 수단이 아니라 결과다. 예수님도 진리를 따르는 자의 행위는 그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걸 나타낸다고 말씀하셨다. 그냥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이다.
당신의 행위를 점검해보라. 만일 당신이 거듭났다고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악을 행하고, 그 악을 부끄럽게 하는 말씀의 빛이 비출 때마다 이를 미워하고 피한다면, 당신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여러가지 교회와 학교에서 요구하는 성경적 기준과 원칙을 철저하게 따르면서도 이를 통해 하나님께 호의를 입고 인정을 받으려 한다면, 그래서 당신처럼 행하지 않는 이들을 정죄하고 판단한다면, 당신은 오직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는 것의 의미를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오직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고 그분이 하신 일을 당신을 위해 한 일로 믿어 하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분명히 알고 믿을 때, 여전히 죄의 유혹에 넘어가 실패할 때도 있지만, 당신은 빛이신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 친밀한 사귐을 항상 누리고 싶을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는 그 사랑의 관계 속에서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리에 따라 기쁨으로 행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두 가지가 있다: 듣는 것과 구하는 것. ① 성경은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베드로는 성도가 거듭난 것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했다(벧전 1:23). 그러니 들어라. 그냥 듣지 말고, 말씀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위하여 들어라.
그리고 ② 구하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간절히 구하라. 거듭난 자에게 영생이, 그렇지 않은 자에게 심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거듭남을 위해 날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다(마 7:7).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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