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뻐하려고 합니다. 기쁨을 통해서만 참된 만족이 있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면 ‘예, 주님! 옳습니다’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은 늘 기쁨으로 끝나게 만드십니다. 사랑도 기쁨으로 귀결됩니다. 진리입니다.
인생은 기쁨에 대한 근본적인 목마름이 있습니다. 기쁨에 대한 목마름을 채울 수 없는 이유를 오늘 말씀을 통해 볼 것입니다. 왜 원천적으로 기쁨이 충족되지 않는지를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찾게 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에덴의 뜻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기쁨으로부터 쫓겨난 것입니다. 인간은 속으로부터 기뻐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에덴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에덴에 화염검, 불 칼을 두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에덴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출애굽했습니다. 백성들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하신 것입니다. 신학에서 출애굽을 구원의 모형이라고 하는데 다 맞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에 구원의 모형은 맞지만 또 온전한 모습은 아닙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애굽을 떠났지만, 마음은 애굽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몸은 애굽을 탈출해서 광야에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우리를 여기로 이끌어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가, 불평하면서 애굽을 꿈꾸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성경은 출애굽의 모습을 통해, 출세상을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출세상은 몸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부분입니다.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이나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출세상하려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출세상이 실제 되려면 우리 마음에는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원어는 ‘크레도’입니다. 크레도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의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믿사오니’라는 단어가 크레도입니다. 심장을 꺼내 드린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마음을 드렸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믿음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어디 가 있는 건지,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고, 무엇을 담으려고 노력하는지를 보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몸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8장, 마가복음 4장, 누가복음 8장을 보면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조금 다른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급하게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뒤 바다 저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말씀하시면 이루어집니다.
인도함을 받는다 할 때, 시편 23편 이미지로 인자하고 능력 있으신 주님이 앞장 서시고 양들이 따라가는 인도함의 풍경만 떠올린다면, 욕심에 쓰러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썩습니다. 인도함은 그냥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그분이 주인이시라면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라갔더니 광풍이 불었습니다.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인도함을 받았는데 삶은 엉망진창이 됐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종이고 주님은 주인이시니 따라갔는데, 인생이 부도가 났다는 것입니다. 시한부인생이 된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갔더니 삶이 꼬인 것입니다. 광풍, 폭풍입니다. 주님을 따라갔는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때에도 우리는, 주님! 할 수 있을까요? 관건은 마음입니다.
신앙에서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주님을 찾아가는 것은 좋은 태도입니다. 강단에서,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 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주님, 저를 돌보지 않고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이 지켜주셔야 저는 설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에 전혀 하자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을 찾아가서 주님을 깨웠습니다. 열심을 부렸습니다. “주님,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돌보지 않으시면 우리 망합니다. 내일이면 엉망진창이 됩니다. 주님!” 이런 믿음이 믿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제가 부족한 것 압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 앞에 진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제 믿음을 전혀 인정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귀신 떠나가고, 치유 사역도 하고, 수천 명 앞에서 말씀 선포하면 장로님들 권사님들이 회개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저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모른다고 하시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지옥입니다. 존재적으로 지옥이 느껴지면 무릎이 그냥 꺾입니다. 생각이 멈춥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상황을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나무라고 계십니다. 집이 휘청거리고, 자녀들이 휘청거리고, 전쟁이나 지진이 생기면 마음은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꾸짖습니다. 믿음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예배드립니다. 마음 모으느라 애씁니다. 삶에 꼬인 것이 많은데 그럼에도 정돈하고 정돈해서 예배드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그거 좀 알아주시면 안 됩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 어려운 때 주님을 깨워 그렇게 이야기한 것을 믿음 없다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저는 존재적으로 깨달아집니다.
믿음은 마음을 꺼내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애굽에 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깨운 제자들의 마음은 주님께 가 있지 않고 문제 해결에 가 있었습니다. 실상 그들이 간절하게 부르짖은 것 같지만, 마음이 가 있었던 것은 풍랑이 잠잠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우리 믿음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측정하지 못하면, 반드시 옳은 사고, 누구나 좋다고 말하는 그 일을 하고자 하지만 사실은 믿음이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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