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암으로 돌아가시는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할머니의 머리카락이 화학요법으로 서서히 빠졌고, 암에 굴복한 몸은 말라갔으며, 할머니가 숨을 거둔 방 밖에서 쭈그리고 있던 나를 위로하던 간호사의 말까지, 나는 그 모든 걸 생생하게 기억한다. 무엇보다 암 투병 내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며 쉬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야기하던 할머니의 모습은 여전히 또렷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할머니가 인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해하는 데에 무려 수십 년이 걸렸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욥기가 알려주는 교훈이다. 하나님은 왜 욥을 회복시키셨을까? 나는 답을 숨길 생각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언제나 마음대로 행하신다. 하나님은 욥의 회복을 원하셨다. 이것이 욥기 전체가 추구하는 주제이다. 욥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욥의 (또는 다른 사람의)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무려 마흔한 장에 걸친 빽빽한 시에 이어 욥기의 마지막 여덟 구절[욥 42:10-17]에 도달한 순간 우리는 이 사실을 놓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욥기가 고난에 관한 책이라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고난이라는 주제가 욥의 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욥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은 누구의 몫인가, 그리고 나아가서 고통을 피하는 방법에 대한 오랜 투덜거림은 이 책이 전하는 더 큰 신학적 메시지를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오늘날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짜 주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인간도 감히 하나님에게는 티끌 같은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고통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욥 역시 죄인이기는 하지만(롬 3:23), 그러함에도 욥기 서문은 욥이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욥 1:1)이라고 말한다. 3절은 욥의 막대한 재력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마치 그것이 욥의 정직함의 결과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묘사된 순종에 대한 축복과 일치하는 해석이다(신 28:1-14).
욥은 자신의 성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나 1장에서 벌어지는 여호와와 대적자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모른다. 그러나 책 전반에 걸쳐 욥의 주된 불만은 자신이 그렇게 가혹한 형벌을 유발할 죄를 짓지 않았기에 지금 닥친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욥의 친구들은 그가 받는 고통이야말로 그가 지은 죄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독자들은 욥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가 곧 살펴보듯, 그것은 요점이 아니다. 핵심은 욥과 그의 친구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는 욥의 주장과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친구들의 주장 모두에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할지 저주할지 통제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이다. 신명기 28장에서,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장 같은 신약성경에서도 분명히 밝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의 선택과 관련된 보상과 징계의 범주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욥기 속 당사자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범위를 가정하고 있다.
그들은 고난과 죄, 축복과 순종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바라보았다. 축복은 항상 순종에 대한 보상이고 고통은 항상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순서를 바꿔서 순종은 항상 축복을 가져오고 죄는 항상 고통을 가져온다고 간주했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는 우주의 사탕 자판기로 축소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인간을 높이고 하나님을 낮추는 행위이다. 여호와께서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신 이유이고, 또한 욥이 회개해야만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욥은 회복될 자격이 없었다
욥기의 마지막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축복의 분명한 표시인 막대한 부와 많은 자녀를 얻은 이야기로 끝난다(신 28:1-14). 마치 저자가 미소를 지으며 독자들에게 해피 엔딩을 선물하는 것 같다. 아마도 1장 속 욥을 보면서 그가 충분히 복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독자라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욥기를 끝까지 읽고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욥의 시련과 야훼의 놀라운 자기 계시를 읽은 후, 하나님이 그의 무한한 지혜와 공의 안에서 선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욥의 고백에 마침내 우리도 동의하는가?
42장은 하나님이 욥을 회복시키신 내용이 아니다. 욥은 확실히 옳지 않은 말을 한 것에 대해서 회개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5-6). 그러나 욥기는 여전히 욥에게 행한 악에 대해 여호와께 책임을 묻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주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그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였다”(욥 42:11). 우리는 다른 성경(예: 창 3장; 요일 1:5; 약 1:13)을 통해 여호와가 악을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욥기 속 구절과 다른 구절(예: 암 3:6)은 하나님이 악을 이기고 악까지도 그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주권자이심을 분명하게 한다. 이건 인간이 풀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여호와께서는 욥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왜 “욥의 말년을 그의 처음보다 더 복되게”(욥 42:12) 했는지에 대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지 그렇게 하셨고,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욥의 상황에 중점을 맞추는 식으로 욥기의 결말을 해석하는 것은 특히 욥이 여호와와의 만남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드러난 앞선 이야기의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욥기를 다 읽어도 우리는 고통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가진다. 그럼에도 최소한 축복이나 저주의 경험이 사람의 의를 측정하는 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축복하거나 저주하실 수 있다. [복음기도신문]
러셀 믹 Russell L. Meek | Moody Theological Seminary와 William Tennent School of Theology에서 구약과 히브리어를 가르친다. 최근에 지은 책으로는 Ecclesiastes and the Search for Meaning in an Upside-Down World이 있고, 공저한 책으로는 Book-by-Book Guide to Biblical Hebrew Vocabulary가 있다. Fathom Magazine에 구약의 이해와 적용에 중점을 둔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