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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도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살면 좋겠습니다” – 최수영 목사

믿음으로 전진하는 최수영 목사 (서산 선한목자교회)

최수영 목사 (서산 선한목자교회)

292호 / 사람풍경

“남들이 보기에는 작은 교회일지 모르지만 모든 성도가 예배에 100% 출석하는 교회에요. 성도들이 매일 예배드리자고 하면서 이렇게 됐어요. 덕분에 매일 저녁 예배와 기도 모임이 생겼죠. 제 소망은 우리 교인 모두가 천국에 가는 거예요. 모두가 선교사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 일을 위해 계속 전진하는 중이에요.” 최수영 목사가 고백하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이야기다. 작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그의 교회 이야기를 들어본다.

– 선한목자교회를 어떻게 개척하게 되셨나요?

“우리 교회는 성도 1명이 찾아오면서 시작됐습니다. 2012년에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아내와 그저 기도하고 싶어 기도할만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마땅한 곳이 없더군요. 충남 태안에 부모님이 사놓으신 땅을 오가면서 서산 인지면에 컨테이너박스를 판매하는 곳을 알게 됐어요. 그곳에서 컨테이너 하나를 임대해 기도 처소로 만들었습니다. 카펫을 깔고 기타 하나로 기도와 예배가 시작됐습니다. 그 무렵 이전 교회 성도 한 분이 연락이 왔어요. 살고 싶다면서 도와달라고 하시더군요. 영적 목마름이 있던 분이었어요. 교회를 개척할 생각도 없었는데, 이분이 오시면서 컨테이너에서 교회가 시작됐습니다. 처음엔 간판도 없었어요. 저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말씀 하나로 살아가자고 요구했어요. 그렇게 말씀으로 양육되고 전도가 시작되면서 성도들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당시 성도들에게 영적인 공급을 충분히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복음 앞에 나가기는 하지만 목마름이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하는 아이처럼 성도들은 제게 영의 양식을 공급해 주길 원하는데, 정작 제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상태라는 게 진단됐습니다. 복음주의 목사님들의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살 수 없는 제 모습을 보면서 어느 때는 책을 집어던지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내게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컨테이너 교회의 5년이라는 시간은 주님 앞에 서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안 되는 나의 상황을 바라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성도들은 주님 앞에 나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강하게 밀집됐습니다. 사실 컨테이너 교회 상황은 매우 열악했어요. 겨울에 화장실이 얼면 뜨거운 물을 부어서 녹여야 했고, 수돗물을 받으려면 논을 지나서 물을 받아와야 했죠. 그런데 그곳에서 성도들은 말씀으로 성장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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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 선한목자교회 예배 모습. 제공: 최수영 목사

한 성도님의 요청으로 교회를 개척했어요

– 믿음을 위해 모든 성도가 함께 혹독한 시험을 치르는 시간이었군요.

“하루는 주님이 ‘교회를 알아보지 않을 거냐.’는 말씀과 함께 교회 이전을 위해 건물을 알아볼 마음을 주셨어요. 인터넷을 뒤지면서 갈 수 있는 교회를 알아봤어요. 근처에 저렴하게 나온 건물이 있더군요. 부동산에 찾아갔더니 이 건물은 이미 없어졌다고, 이 광고는 몇 년 전 광고라고 했어요. 낙심하고 돌아 나오는데 부동산 주인이 얼마짜리를 구하냐고 묻더군요. 가장 싼 거라고 대답했더니 건물 2층으로 올라가 보라고 했어요. 건물주를 만나 보증금과 월세가 얼마냐고 물었죠. 저희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저희 사정을 말씀드렸죠. 교회를 알아보라는 마음을 주셔서 기도하고 이곳으로 오게 됐다고. 재정은 없지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여기까지 왔노라고. 그런데 놀랍게도 건물 주인이 보증금과 월세를 낮춰주셨어요. 그렇게 주님의 은혜로 이곳으로 교회를 이전하게 됐습니다. 그게 2018년이네요.”

– 한국교회가 코로나를 맞으면서 많이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선한목자교회는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를 맞으셨군요. 힘들진 않으셨어요?

“저는 코로나 이전에도 말씀을 전할 때,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시대는 말씀 앞에 서고,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힘든 시간이 될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우리 교회도 그런 일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이야기해 왔죠. 그러다 코로나가 닥쳤는데 성도들 모두가 ‘우리는 예배드릴 거예요.’라고 했어요. 물론 공격이 오죠. 면사무소, 시청, 경찰서에서 다 찾아왔어요. 우리가 예배드릴 때, 창문을 통해 소리가 새어나가면서 신고가 들어왔다며 경찰이 왔어요. 여기서 왜 예배드리냐고 하길래, ‘예배드리지 말아야 될 법이 뭐냐.’고 되물었어요. ‘예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감옥 가도 된다.’ 이런 믿음으로 문을 열고 예배를 드렸어요. 저희는 인터넷 예배를 아예 안했으니까요. 그런데 코로나 때 오히려 주님 안에서 강해지는 예배가 됐어요. 교인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배드렸고, 예배를 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배를 더 늘리고, 모임도 더 만들고 성경 공부 시간도 더 가졌어요. 코로나를 기점으로 모든 성도들이 복음의 말씀으로 성장했고, 우리의 영적 갈급함도 해결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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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들과 함께 한 느헤미야52기도 현장. 제공: 최수영 목사

– 이렇게 담대한 믿음으로 성도들과 함께 전진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나요?

“지난해 2022년 3월, 제가 복음학교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죄에 대한 진리를 들으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소망이 없는 존재란 것을 보게 됐습니다. 예수님은 죄인 된 저를 십자가의 복음으로 살리셔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란 걸 깨닫게 된 것이죠. ‘내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데, 그동안 내 멋대로 살았구나. 나는 이제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졌어요. 복음학교를 마치고 이 복음을 성도들에게 나누고 성도들도 복음학교에 참석하게 됐어요. 저도 순회선교단에서 진행하는 경건훈련학교라는 훈련을 받게 되면서 복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배워갔죠. 훈련은 합숙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사실 목회를 하면서 훈련받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학교 측의 배려로 통학하며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됐어요. 당시에는 아침에 학교에서 공부하고 저녁엔 교회로 돌아와 예배를 인도하면서 하루에 2시간 정도밖에는 못 잤던 것 같아요. 그래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에 너무 감사한 시간들이었어요.”

– 이런 오늘이 있기까지 목사님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예수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어머님은 결혼 전 예수를 믿으셨는데, 불교 집안으로 시집을 오면서 신앙을 포기하셨던 것 같아요. 믿음의 문제와 여러 문제로 인해 제가 5살 때 부모님들이 이혼하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사우디아라비아로 돈을 벌기 위해 나가셔서 저는 친척집을 돌아다니면서 살았어요. 할머니는 제가 장남이라고 제 모든 옷에 부적을 넣어 놓으셨죠. 당시는 이혼하면 손가락질을 받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엄마 없는 자식이라며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고요. 7, 8살 때까지 죽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친척집살이는 정말 힘들었어요. 밥도 같이 먹지 못했고, 저는 늘 찬밥을 먹어야 했어요. 그러다 10살 때, 교회 십자가를 보게 됐어요. 교회에 들어가 앉아 있는데 너무 마음이 편했어요. ‘하나님, 나 살고 싶어요.’ 나도 모르는 기도를 하게 됐고, 그곳에서 전도사님을 만나서 본격적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물론 교회 안에서도 아픔은 있었어요. 교회 친구들은 ‘엄마가 부모 없는 자식이랑 놀지 말라.’고 했다면서 저랑 놀지 않았어요. 힘든 건 사실이었지만, 교회에서 예배할 수 있는 게 너무 기뻤어요. 교회에서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저를 이용하려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사람에 대한 공허함이 있었어요. 나와 항상 같이 있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게 참 힘들더군요. 사람에 대한 갈망이 매우 컸어요.”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낸 10대

–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셨네요. 이후에는 어떤 시간들이 있으셨어요?

“제가 공업고등학교를 진학했어요. 1학년 때, 어떤 대회를 나갔는데 장려상을 받았어요. 손재주가 있었는지 고3이 되니까 상 받은 것 때문에 대학 진학과 취업의 길이 열리게 됐어요. 일찍부터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대기업에 취직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7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주님이 ‘다 내려놓을 수 있느냐.’라는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당시 여러 신앙 훈련을 받으면서 주님에게 더 가까이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예배만 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차였어요. 그래서 그날로 바로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오게 됐어요. 짐을 싸서 나오는데 회사 앞에 지구본 파는 아저씨가 보이더군요. 그 앞에 한 아이가 지구본을 돌리고 있었고, 한 나라를 찍으면서 엄마한테 이 나라가 어디냐고 묻더군요. 그 나라가 몽골이었어요. 그 광경을 보는데 주님이 저를 몽골로 가라고 하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렇게 준비를 해서 1997년에 몽골로 무작정 떠났어요.”

– 갑작스럽게 몽골로 가시게 된 거군요. 전혀 예상치 못한 결정이네요.

“몽골에 도착해 공항에서 펑펑 울었어요. 제가 몽골 말도 모르고 또 돈도 없었거든요. 지갑에는 30만 원이 있었는데 달러로 환전하지도 않았어요. 막막한 마음에 아무 버스나 탔더니 수도 울란바토르에 내려주더군요. 이제 저녁이 되고 잘 곳을 찾아야 되는데 땅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이는 거예요. 저도 따라가 봤더니 하수구 안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더군요. 몽골의 영하 50도가 넘는 날씨를 견디기 위해 하수구에서 사는 도시 빈민들이 많이 있었어요. 저도 그곳에서 그들과 같이 지냈는데, 하루 이틀 지나고 나니 이분들이 저를 돕기 시작했어요. 제가 밥을 못 먹고 있다는 것을 보고 만두 같은 음식을 갖다주기 시작했어요. 매일 세끼 그 음식을 먹으면서 어느 때는 힘들어서 울기도 했지만, 매일 음식을 공급받는다는 게 감사했어요.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게 이런 거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하시는 거구나. 그때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이상 292호에 게재>

– 계속 그렇게 생활을 하셨나요?

“제가 하수구에 지내면서 전도도 하고 예배를 드렸더니 어떤 사람이 울란바트로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테레지의 게르(몽골의 이동시 주택) 하나를 소개했어요. 그곳에 가보니 다 찢어진 드럼과 망가진 건반과 기타가 있었어요. 과거에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던 모양이더군요. 어린 아이 한 명이 나오길래 말은 통하지 않지만 몽골어로 기도하자는 말을 써서 보여주면서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어요. 어느 날 5명 정도가 찾아와서 물을 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물을 마시고도 가지 않는 거예요. 한 사람이 건반을 쳐봐도 되냐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건반을 하나씩 눌러보다가 그때 틀어놓았던 찬양을 따라서 치는 거예요. 몽골 사람들은 유목민족인데, 음감이 탁월하다고 하더군요. 한 사람이 건반을 치니까 다른 사람들이 드럼을 치고 기타를 치는 거예요. 이들을 바라보는데 예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짧은 영어지만 함께 예배하자고 했더니 좋다고 했어요. 그렇게 1년 넘게 이 팀들과 매주 예배를 드렸어요. 이곳에서 예배하고 전도하면서 20여 명이 함께 예배하기까지 예배를 드렸어요. 그렇게 2년 6개월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어요.”

– 주님이 한국에서 어떤 시간을 허락하셨는지 궁금하네요.

“한국에서는 그동안 관계했던 사람들도 있고, 그 안에서 받은 상처도 그대로 마음에 남아있었어요. 이곳에서 주님의 뜻을 이뤄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과 함께 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선교를 빌미로 해외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먼저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몸에 이상이 발견됐어요. 수술을 해야 된다고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는데, 고쳐줄 돈도 없고 집을 나가라고 하시더군요. 돈을 중요시하는 아버지에게는 제가 회사를 그만둔 것도, 주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때 저도 집에서 완전히 배척당한 상태여서 우울증으로 어려운 시기였어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매우 커서 어느 날은 물병에다 약을 탔어요. 그러나 아버지가 들어오는 순간, 이것은 아니다싶어 그 물병을 깨버렸어요. 그렇게 집을 나와서 어머니를 수소문해서 만나게 되고,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수술을 하게 됐어요. 이후 집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됐고, 수술 후 회복을 위해 서산에 내려오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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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제공: 최수영 목사

– 그러셨군요. 그런데 가족들과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내셨는데 어려움이 해결 되셨나요?

“어느 날 제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설교를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데 강단에서 이 말씀을 전할 수 있나?’ 하는 마음에 말씀 전하다 멈추고, 성도들에게 이런 상태에서 말씀 전하는 게 옳지 않은 것 같다며 회개하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마친 적이 있어요. 이후 복음학교에 참석하게 되면서, 범죄한 부분에 대해 정산하고 십자가에서 새롭게 회복된 삶을 살 것을 결단하게 됐어요. 그러다 경건훈련학교에 다니면서 아직 정산하지 못한 것을 정산하기로 하고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기로 했어요. 아버지 집 앞에 갔는데 문 열기가 너무 싫더군요. 그래도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는데 아버지가 계셨어요. 아버지에게 그동안의 일을 다 말씀드렸어요. ‘아버지가 너무 미운 마음에 물에다 약을 타서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물병을 깨버렸습니다. 용서를 구하러 왔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제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셨어요. 일단 돌아가겠다고 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지금도 이건 제 잘못에 대한 대가지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떤 수모를 당해도 이 부분에 대해 끝까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결단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복음 만나고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선택하다

– 지난 시간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삶이 복음을 만난 자의 삶인 거군요. 이후로 믿음의 삶을 어떻게 걸어오셨는지도 들려주세요.

“제가 그동안 부교역자 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 사례비를 전혀 받지 않았어요. 사례비를 받는다 해도 모두 봉헌함에 다시 넣었어요. 주님의 공급으로만 살아갔어요. 돈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했어요. 재정을 받으면 오직 그것만 생각할 거 같아서요.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봤을 때 재정으로 살아가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부족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주님께 더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죠. 덕분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늘 경험하고 있어요.”

– 어떤 은혜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첫째 딸이 태어나고 얼마 안됐을 때였는데, 아내가 기저귀가 딱 한 장만 남았다고 이야기하더군요. 남편으로서 필요한 것을 사주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에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고선 기도하면서 아파트를 돌고 있었어요. ‘주님이 모든 걸 공급해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면서 한참 돌고 있는데, 관리사무소 옆에 있는 현금인출기에서 계속 소리가 나는 거예요. 가보니 기계 덮개가 열려있고 4만 원이 있는 거예요. 소리가 계속 나길래 일단 돈을 빼고 그 앞에서 돈 주인이 찾으러 오기를 30분 동안 기다렸어요.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현금인출기 박스 안에 있는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어요. 그런데 기계에서 빠져나간 돈이 없다고 하더군요. 관리사무소로 가서 메모지 한 장을 얻어 전화번호를 써서 현금인출기 박스에 붙여놨어요. 4만 원 잃어버리신 분 연락 달라고요.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 돈은 주님이 주신 재정 같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마트로 가서 기저귀와 필요한 것들을 샀어요. 38000원이더군요. 아침에 아내가 시원한 하드 하나 먹고 싶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 2개를 집었더니 딱 4만 원이 나왔죠. 이렇게 재정을 공급받은 얘기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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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 선한목자교회 예배 모습. 제공: 최수영 목사

– 앞으로의 계획이나 기도 제목을 말씀해 주세요.

“계획은 없습니다. 내 계획은 주님 안에서 합당하지 않거든요. 다만 주님이 원하는 대로 순종의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기도제목이라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 예수 회복 교회, 모든 교인이 선교사가 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열방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 기도제목이에요. 마지막으로는 모든 성도들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하고요.” [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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