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시작된 뒤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세상 밖으로 가게 만들어줍니다. 이 시점에 교회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기 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할 것을 가르쳐주고, 권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200여 명이 기다렸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쏟아졌습니다. 제자들이 각기 다른 나라의 말, 방언을 쏟아냈습니다. 200여 명이 외국어로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술 취한 것 아니냐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설교합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부터 시작되는 말씀입니다. 술 취한 것이 아니라 요엘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셨던 것이 성취된 것이라고, 성령 충만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 사건이 제대로 나타나려면 성령이 오셔야 하는데, 요엘 선지자가 말씀하셨던 것이 오늘 성취된 것이라고!
그리고 다윗 이야기를 합니다. 그 다윗이 말했던 것, 즉 메시야가 오시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하신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를 너희들이 죽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너희들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일 때, 예수를 죽이는 것에 동의했던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르며 동참했던 무리가 예수를 죽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심령마다 찔림이 있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메시야를 죽인 것이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할 때, 베드로는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세례를 받으라, 죄 사함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뒤 그들의 의식이 바뀌었습니다. 가치가 바뀌었습니다. 추구했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행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를 알아보시기도 하고, 무화과나무가 죽었는지도 알아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따랐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끌고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서 죽으셨습니다. 다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어!’ 제자들은 반감과 회의가 들었지만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손의 못 자국을 보고 옆구리를 찔러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말씀하십니다. “나 이제 아버지께 가, 성령이 오실 거야, 하나님의 약속이야, 기다려야 해. 거룩한 영, 성령, 나의 영이 오면, 요한은 물 세례로 거듭나게 했지만 성령께서 오시면 마음까지 완전히 거듭나게 될 거야!” 이 상황에서 제자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보십시오.
인간이 이렇게 질깁니다. 제자들은 이때에도 이스라엘의 회복에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내 어려움의 풀림의 때가 이때입니까? 자녀가 잘 됨의 때가 이때입니까? 내가 많은 멸시와 조롱을 이기고 주님 앞에서 빛날 영광이 이때입니까?” 하는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선포하는 복음을 통해 가치가 바뀌고 바라는 것이 바뀌고 세상의 욕구가 바뀌었습니다. 세상에서 1등 하려는 욕구가 바뀌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어버립니다.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이스라엘은 완전히 망합니다. 이후 400년간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로마를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역설이 거기에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헤아리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어설프게 알면 안 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 이스라엘 백성이 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전에는 예수님께 왕 되어 달라고 붙들었던 백성들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실 때, 이 예수님이라면 우리가 해방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에게 자기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가 틀리면 죽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나와 예수님의 수가 틀리니까 그냥 예수님을 죽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방식과 교회의 방식이 다르면 교회 잡습니다. 목사 잡는 것 또한 일도 아닙니다. 놓는 수가 다르고 길이 다르고 걸어가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방향은 단 하나, 출세상입니다.
여러분의 수는 세상에서 번성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뭔가 수를 둡니다. 아무리 뛰어나도 판단하는 사람은 교회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신 그 사명과 마음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 책임감입니다. 우리의 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수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수를 볼 수 있는 믿음의 안목이 있어야 교회다운 것입니다. 아멘 소리가 작은 이유는 우리들의 바람과 달라서입니다.
출애굽은 구원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참한 삶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위험에 처했습니다. 우리 관점으로 볼 때 그들은 계속 애굽에서 살아야 합니다. 종살이 했던 그들을 그 상황, 즉 애굽에서 성공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으로부터 그들을 이끌어내서 광야로 이끄십니다. 우리 수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당시 모든 사람이 몰려가서 성공하고 싶은 곳은 애굽이었습니다. 서울 가서 살고 싶고, 좋은 대기업 가고 싶은 마음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이 아니라 광야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 하나님의 수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란다고요? 광야로 끌고 가면 우리는 사탄의 품이 좋았다고 말하며 그냥 예수를 죽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심각해졌습니다. 우리의 바람과 이 주장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멘하기 어렵습니다. 맞는 이야기인데 마음에 안 들고 정서에 안 맞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방식이 읽혀지면, 주님께 집중하고 싶어집니다.
집중하지 않으면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애굽에 머무르게 해서 모든 것을 섭렵해서, 그곳에서 최고가 되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역시 하나님이면 돼!” 하면서 따라오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광야로 끌고 가는 것은 엉뚱한 일이 아닙니까? 납득이 안 되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아야 따라갈 것 아닙니까? 몰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따라갑니다. 모르는데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싶은 것입니다. 시간을 조정하고 지적인 영역을 넓히고 스펙을 쌓는 수를 두지 않고 하나님 따라가고 싶다고 무릎 꿇습니다. 그래서 집중합니다. 집중해도 들리지 않으니까 살려달라고 회개하며 돌이킵니다. “나,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애굽이 아니라 광야로 이끌어가는 그 수가 무엇인지 납득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것이 교회다움입니다. [복음기도신문]
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