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보는 이슬람(87)
‘튀르키예’를 만든 오스만제국의 이해
세계에서 유일신(단일 신) 개념을 가진 고등종교로 3대 종교의 발상지인 중동 지역은 역사 순으로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순으로 그 땅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흘러왔다. 특별히 7세기 초부터 시작된 이슬람교는 아랍 민족에 의한 이슬람 제국 시대(AD 632~1258)를 거쳐서 튀르크족인 셀주크제국(AD 1040~1157)과 오스만제국(AD 1299~1922) 시대로 넘어가면서 지금까지 중동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끼쳐 왔다.
한편, 중동에서 기독교의 최후 보루로 존재하던 천년의 비잔틴제국(AD 395~1453)을 무너뜨린(AD 1453) 오스만제국은 세계 제1차 대전에서 패망하기까지 오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중동, 북아프리카, 동유럽에 걸쳐서 이슬람의 종주국 자리를 지키면서 이슬람 세계의 확장과 부흥을 담당해 나갔다.
오스만제국의 비잔틴제국 정복에 대한 역사적 의의
이런 오스만제국의 비잔틴제국 정복은 아래와 같은 4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세계 역사 가운데 중세에서 근세로의 시작.
둘째, 천년의 기독교 문명에서 이슬람 문명으로의 전환.
셋째, 유럽의 동방 문화 수용으로 르네상스와 지리상의 발견 시대 도래.
넷째, 이슬람 세계에서 오스만제국 술탄의 지도자 부상.
또 하나 흥미로운 사항은 오스만 황제인 술탄에게 있어서 비잔틴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언행(쑨나)을 책으로 묶은 ‘하디스’에서 당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스만의 술탄은 비록 자기들이 아랍 무슬림은 아니었지만, 충실한 비아랍 무슬림으로 당시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거룩한 종교적 사명의 완수로 생각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 성공적 사명의 완수로 말미암아 오스만의 술탄은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 자리에 앉게 되었으며, 술탄 자신들도 정복과 사명의 완수라는 의미에서 일거양득의 기회로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오스만제국의 일곱 번째 술탄, 메메트 2세(재위:1451~1481)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함께 찾아온 비잔틴제국의 멸망은 당시 전 유럽 사회를 극도의 공포와 긴장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전 유럽이 게르만과 로마의 침입 이래, 또다시 새로운 이방 민족에 의한 공격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유럽 사회의 우려와는 반대로 오스만제국은 정복했던 지역에 살아가는 타민족을 향해 관용적 정책으로 일관했다. 더군다나, 타민족이 오스만제국 땅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신앙과 사회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율권까지 부여했다. 더 나아가, 이런 오스만의 관용 정책으로 향후 오스만제국 안으로 다른 민족이 더 편입되어 가면서 제국의 확장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
당시 그 땅에 살던 수많은 기독교인은 어떻게 되었나?
비잔틴제국의 멸망으로 그 땅에 살아가던 수많은 기독교인은 어디로 갔을까? 아울러, 오스만제국 내 수많은 기독교인의 신앙생활 장소인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스만제국 내 기독교인들을 향한 정책은 어떠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오스만제국의 통치 기간 여러 피지배층 민족 중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을 향한 당시 오스만의 정책으로 당시 사회 통합 정책인 밀레트(민족이라는 뜻, Millet) 제도를 알아보아야 한다.
당시 천 년의 기독교 제국인 비잔틴을 정복했던 오스만제국의 일곱 번째 술탄, 메메트 2세는 억압이 아닌 관용으로 피지배 민족을 통치했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정복자 오스만제국은 정복한 그 땅의 수많은 타 종교, 피지배 민족들을 향해서 매서운 칼날 아래 모조리 뿌리를 뽑아내려는 일들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에 중점을 두고 역사를 돌아보면서 때로는 타산지석의 마음으로, 때로는 반면교사의 심정으로 교훈과 적용이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 중세 이후 중동 이슬람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아 나갔던 오스만제국 안에서 타 종교를 지닌 타민족을 향한 정책에서 억압과 탄압이 아니라, 관용 정책으로 통치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오스만제국의 타민족 정책을 연구하면서 이제 우리나라도 250만 이주민 시대를 넘어서 3백만 시대로 다가가고 있고, 향후 더 많은 이주민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에, 당시 이슬람 정체성을 가진 제국 안에서 다양한 문화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갔던 타 민족(밀레트)를 향한 오스만의 통치제도와 정책이 지금의 우리나라 다문화 정책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오스만제국의 피지배 민족 정책: ‘밀레트’ 제도
1) 밀레트의 어원
밀레트(Millet)는 원래 아랍어에서 온 말로서 꾸란에서도 언급된 종교적 단어지만, 오스만제국 안에서 밀레트는 그 사회 안에서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종교(신앙)의 차이를 가진 각 민족계층을 말한다.
6백여 년의 절대 짧지 않았던 오스만제국 안에서 여러 민족과의 공생을 보여 주는 단어가 바로 ‘밀레트(Millet)’ 제도이다. 밀레트 제도를 가리켜서 어떤 이들은 오스만 사회를 무슬림과 비무슬림으로 나누어 이 안에 존재하는 공생의 상징적 제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오스만 사회 안에서 다양한 민족이 그들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잃지 않은 채 다른 민족과의 연합과 상생을 보여 주는 제도라고 말한다.
당시 오스만제국 사회 안에는 64여 개 민족이 존재했다. 이중 무슬림들에 의한 사회가 33개, 비무슬림들에 의한 사회가 총 31개였는데, 이 중 하나만이 유대인 사회였고, 나머지는 전부 기독교 사회였다. 이 사회에 속한 구성원 중 어떤 민족은 6백여 년을, 어떤 민족은 4백여 년을, 또 어떤 민족은 이보다 길거나 혹은, 짧게 살았지만 대체로 모두 평화롭게 살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오스만의 ‘밀레트’에 대해 알아나가면서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질문 중 하나는, 오스만제국이 짧지 않은 기간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며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이 바로 밀레트 제도이다. 우리는 밀레트 제도를 통해서 오스만 사회(공동체)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2) 밀레트 제도의 배경
오스만제국은 정복 사업을 펼쳐 나가면서 늘어가는 광활한 영토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이미 무라트 1세(재위:1360~1389)부터 이 밀레트 제도의 기초가 다져졌지만,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메트 2세(제위:1451~1481) 때부터 오스만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통치 제도로 적용되었다.
오스만의 밀레트 제도는 로마식의 중앙 정부로부터의 직접 통치 제도를 탈피하여 연공과 유사시에 군대 지원을 조건으로 정복지의 기존 군주를 그대로 인정하고 활용하는 간접 통치 방식이다. 이 제도는 필요한 물자와 정복에 따른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측면뿐 아니라 정복 후에 따르는 피지배 세력의 끈질긴 저항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기존 군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 주고 정복지의 문화적 전통을 인정해 주는 통치 제도로 초기부터 오스만제국의 기본 정책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제도에 따르면, 오스만제국 안에 살아가는 모든 국민은 종교적 바탕에서 4개의 밀레트로 구분되었는데, 무슬림, 그리스 정교인, 아르메니아 기독교인과 유대교인이 그것이다. 오스만제국 내 무슬림 밀레트의 대표는 이슬람 최고 무프티(Chief Mufti, 콘스탄티노플의 최고 무프티), 기독교 밀레트의 대표는 기독교 총대주교(Ecumenical Patriarch,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유대교 밀레트의 대표 유대교 하캄바시(영어명:Hakham Bashi, 터키어명: Hahambaşı, 최고랍비)라 불렸다.
당시 오스만 사회에서 무슬림이 아닌 비무슬림을 모두 ‘짐미(Zimmi)’ 혹은, 아랍어로는 ‘딤미(Dhimmi)’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모두 인두세(Jizya)를 내야 했으며, 이들의 대표는 각자가 관리하에 있는 모든 교인으로부터 인두세를 징수하여 오스만의 술탄에게 상납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비무슬림의 밀레트에 속하는 짐미(딤미)의 세 대표(그리스 정교, 아르메니아정교, 유대교)는 오스만의 수도인 당시 이스탄불에 거주했으며, 오스만 정부는 이들을 통해 제국 안의 모든 짐미(딤미) 백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오스만 정부에서 모든 짐미(딤미)는 정부 기구의 어떤 직책도 맡을 수 없었으며, 군대에 복무할 의무도 없었다.
3) 밀레트 제도의 특성
당시 오스만 사회에서 무슬림과 비교하면 비무슬림으로서 짐미(딤미)들에게는 불평등한 대우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각 밀레트 안에서만은 자기들의 고유 언어, 종교, 문화와 교육 활동에 있어서 광범위한 자치가 허용되었다. 이런 모든 사항은 오스만제국에 의해 작성된 수락서 위에 서명함으로 법적 효과를 발효할 정도로 일종의 상호 계약이라는 비강제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오스만제국의 말기인 1837년에 와서는 술탄 마무드 2세(제위:1808~1839)에 의해 작성된 오스만 내 각 밀레트를 향한 아래 연설문 내용을 보면, 당시 국민의 종교나 신앙과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도 찾아볼 수 있다.
“무슬림은 사원에서, 기독교인은 교회에서, 유대인은 회당(시나고그)에서 각자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이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중략) 그리스인이나 아르메니아인 모두가 무슬림처럼 신 앞에서는 동등한 종이요, 내 백성들이며 서로 다른 종교가 결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스만의 법 아래에서 보호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할당된 일정한 조세의 납부는 여러분 모두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이처럼 오스만제국은 밀레트 제도를 통해서 다양한 타 문화와 타 종교 민족을 이미 품고 있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오스만제국이 오랜 기간 여러 다른 민족에게도 상생과 공존의 기회를 부여했다. 비록 무슬림에게 좀 더 많은 권한과 혜택을 제공했다는 면에서 완전히 공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오스만제국의 피지배 민족을 향한 관대함은 오랫동안 제국 유지의 중요한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오스만 사회의 밀레트 제도는 제국의 쇠퇴기에 들어서면서 이들을 향한 중앙 정부의 견제와 통제력이 약화하면서 제국의 멸망에 한 측면을 담당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오스만 사회는 어떤 사회였나?
일반적으로, 오스만의 사회는 크게 두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행정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측면이다. 전자를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전쟁에서 패배한 계층으로서 사실상 노예 계층으로도 볼 수도 있음)으로 나눌 수 있다면, 후자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또한, 오스만 사회를 인풋(Input)의 정부 행정 형태와 아웃풋(Output)의 생산 형태에서 볼 때, 군부 계층과 민간 계층의 두 계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다스리는 군부 계층과 다스림을 받는 일반 국민 계층을 말한다. 여기에서 군부 계층이란 오늘날의 정부 관리 계층에 해당하며 전부 비과세 대상이었다.
당시 오스만 정부 안에서는 관리들 전체를 군부 계층으로 간주했으며, 이 군 계층은 다시 군인, 관료, 이슬람 신학자 계층으로 세분되었다. 이들의 임금 수령 형태를 보면, 근무 형태 및 성과에 따라 현금이나 현물 또 가끔은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받아야 할 어음들을 임금으로 받았다.
한편, 일반 민간인 계층은 상인과 장인 계층, 농업과 축산업에 종사하는 계층, 그리고, 유통업과 운송업에 종사하는 계층으로 나뉘었는데, 오스만제국 안으로 들어온 많은 피지배 이주민 계층이 여기에 속했다. 보통 오스만 사회에서는 피지배계층으로서 민간인들은 정부의 관리들에게 인사와 세금의 의무가 있었다.
오스만 정부의 술탄은 자신과 오스만 내 군 계층을 중심으로 모든 사회 정책을 이끌어갔으며, 술탄은 자신을 스스로 모든 민족의 지도자와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오스만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과 부당한 처사로부터 국민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이렇듯 오스만 사회의 밀레트 제도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이라는 분류를 근간으로 한 사회 통치 제도이며, 밀레트 제도 아래에서 제국 내 모든 국민을 총체적이고도 균등 있게 이끌어가려는 술탄의 강한 사회 통합 의지가 담겨 있었다.
튀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처음 들어갔을 때,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그 땅에서 발생한 비잔틴-아랍, 비잔틴-사산조 페르시아 전투들로 인해 이미 인구가 줄어들어 있었으며, 동쪽으로부터 비잔틴 안으로 끈질기게 들어오는 외부 세력에 두려움을 느낀 많은 기독교인이 비잔틴 안에서 서쪽으로 이주해 가 버린 상태였다.
셀주크제국이 비잔틴으로의 진입 계기가 되었던 말라즈기르트(Malazgirt) 전투로 시작해서 오스만 공국이 설립되는 즈음인 14세기 초까지 아나톨리아 거의 전 지역이 셀주크제국 손안에 들어와 있었으며, 이 지역에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수는 이미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이 시기에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주로 그리스인들, 아르메니아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아나톨리아 남동쪽으로는 소수의 수리아 인과 당시 이슬람의 이단으로 알려진 소수의 예지디인(Yezidi)이 살아 가고 있었다.
셀주크제국의 뒤를 이어 아나톨리아 반도를 차지하면서 비잔틴제국을 끊임없이 압박했던 오스만제국은 튀르크 수니 무슬림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정부였다. 하지만, 밀레트 제도의 실질적인 설립자인 오스만의 술탄 메메트 2세 이후 오스만 사회 안에서 밀레트 제도는 더욱 건실하게 자리 잡았으며, 튀르크인, 이슬람 혹은 수니 같은 정치적 이념이 섞인 단어들을 강조하지 않으며 발전되어 나갔다.
이렇게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섞여서 이루어진 오스만제국 사회는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들이 서로를 인정하며 서로 다른 신앙과 종파, 그리고,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을 가진 각자의 사회 안에서 자기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세우고 살아가도록 했으며, 각 밀레트 사회의 지도자 위로는 오스만의 황제 외에는 어떠한 상급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국립 이스탄불대 역사학과 석사, 박사,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터키어권선교회(FOT)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전 ‘전방개척선교(KJFM)’ 저널 편집인, 현 선교타임즈 저널 편집위원, 아신대(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1)무슬림 이해하기’ / (2022, 라비사북스). ‘벌거벗은 세계사(경제편)’/ (2023, 교보문고), ‘밖에서 본 이슬람, (2)이슬람 이해하기’ / (2023, 라비사북스, 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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