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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가톨릭! 그러나 ‘로마’는 아니다

▲ 종교개혁 500주년 CTS 기획 - 6 마틴루터의 95개조 논제. 사진: 유튜브채널 CTS기독교TV 캡처

종종 마르틴 루터를 로마 성문을 향해 돌격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격렬한 시위자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캐리커처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

루터는 종파주의자도, 분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교회를 분열시키지도 않았다. 더더욱 로마를 무너뜨리려는 마음은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로마가 마침내 가톨릭(보편) 교회의 풍부한 유산을 드러내는 더욱 현대적인 혁신의 시대로 전환했다고 확신했던 루터의 원래 의도는 내부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그의 생각은 그가 내건 95개조 반박문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반박문을 제시한 이유가 공개 토론을 위해서였지만, 서두에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그것을 밝히려는 열망”이었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밝혔다. 루터의 반박문은 열정, 심지어 심각한 경악까지 드러내고 있지만, 그의 대담한 불만 뒤에 숨은 더 깊은 동기, 곧 사랑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바로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다. 

면죄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면죄부의 남용은 루터가 이 95개조 반박문을 쓰도록 자극했다.

당시에 반박문을 작성하고 게시하는 게 참신한 건 아니었다. 루터가 토론을 위해서 이런 식의 글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관행이 루터의 독점물도 아니었다. 

중세의 많은 이들이 비슷한 행동을 했다. 아마도 루터는 앞서 살았던 여러 사람을 모방한 것 같다. 이건 루터가 일으킨 자극을 경시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의도한 게 대중의 반란이 아니라 학문 논쟁이었다는 점이다. 

루터는 요한 테첼(Johann Tetzel)의 면죄부 설교를 주관했던 브란덴부르크 대주교 알베르트(Albert of Brandenburg)에게 이 반박문을 보냈다. 그 외에 여러 친구에게도 보냈다. 그리고 서서히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루터의 궁극적인 목표가 학문 논쟁이 아니라 구원 자체만큼 중요한 어떤 문제에 대한 공개적이고 목회적인 해명이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회적 관점을 반영하는 그의 반박문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죄에 대한 회개와 형벌

루터의 첫 번째 논제는 마태복음 4:17에 대한 로마의 해석에 도전한다. “우리의 주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신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의 삶이 되기를 바라셨다.”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죄인에게 “참회하라”(라틴어는 poenitentiam agite) 명령했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죄에서 돌이키라는 단순한 명령을 면죄부를 포함한 로마의 전체 참회 제도로 독해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회개하라”라는 대체 번역을 선호했다.

그는 “이 단어는 성직자가 집전하는 고해성사, 즉 고백과 속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라고 썼다. 오히려 그것은 “오직 내면의 회개”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한 경험을 바탕으로 루터는 외적인 열매가 없는 “회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육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외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내적 회개는 무가치하다.”

죄에 대한 언급에서 루터는 죄가 주는 자책감과 죄의 형벌에 대한 로마의 구별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남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터는 마치 교황이 그리스도인을 모든 죄의 형벌에서 전부 없애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며 교황에게 호소하는 것을 반대했다.

더욱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라면 결코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모든 면에서 그를 겸손하게 하시고 그의 대리자인 제사장에게 복종하게 하지 않는 한 누구의 죄도 사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했다.

1517년까지만 해도 루터는 사제직에 관한 로마의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제들, 특히 연옥의 개념을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며, “죽는 사람의 경우에 연옥을 들먹이며 성경의 형벌을 유보하는 사제들은 무지하고 사악하게 행동한다”고 지적했다.

루터가 “형벌은 진정한 회개를 시험하기 위해 죄 용서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부과되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통 알려졌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이 점은 루터를 끝없이 괴롭힌 문제였다. 아마도 루터는 일단 용서받으면 처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반 교회 신도들에게 비슷한 말을 했을 수는 있다. 

연옥과 면죄부

루터는 연옥에 대한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테첼 같은 연옥 설교자들은 연옥의 목적을 전달하려고 사랑보다는 두려움을 사용했다. 루터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이 줄어들고 사랑은 늘어나는 것 같다”라고 썼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잘못된 인도를 받고 있다고 확신했다. 교황이 “모든 형벌의 전면적 용서”를 허용했을 때, 그가 “실제로 의미한 건 ‘모든 형벌’이 아니라 교황 자신이 부과한 형벌만을 의미했다.”

루터는 한탄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든 형벌에서 면제되고 교황의 면죄부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은 오류에 빠진 것이다.”

테첼 같은 연옥 설교자들이 면죄부 구입으로 연옥에서 즉시 석방될 것이라고 약속하며 거짓말을 선포한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그는 “그들은 돈이 상자에 딸깍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탈출한다는 인간의 교리만을 설교한다”라고 썼다.

돈 상자가 많아질수록 ‘욕심과 탐욕’은 더욱 커졌다. 자기가 하는 회개가 진짜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면죄부로 인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사해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겠냐며,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했다. 

의분에 불탄 루터가 면죄부 탁자를 뒤집었을 수도 있다. “면죄부 편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가르친 교사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불타는 언어, 목자의 마음

루터의 강한 언어인 ‘저주’는 그의 목회적 혐오감을 전달했다. 면죄부를 살 만큼 충분한 돈만 있다면 회개 여부에 상관 없이 언제라도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죄인들은 면죄부 테이블을 향해서 달려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강간한 사람도 면죄부만 있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 

“미쳤다!”라고 루터는 소리쳤다. “이 얼마나 끔찍한 참회 시스템의 남용인가? 진정한 참회와 관계없이 또 어떤 죄를 지었는지와도 아무런 상관없이 마치 죄에 대한 일시적인 형벌에 대한 속죄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마음의 진정한 성화를 희생시키는 값싼 은혜라고 확신했기에 루터는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루터는 테첼 같은 설교자들을 화나게 했을 논제를 내놓았다. “진정으로 회개한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형벌과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용서받을 권리를 가진다.”

“조심하기”를 거부한 “교황의 면죄부” 설교자들은 평신도들에게 다른 “사랑의 선행”은 덜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루터는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처럼 루터는 면죄부 제도 전체를 뒤흔들었고,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의 동기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가치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가톨릭, 그러나 로마는 아니다!

루터는 교황이 면죄부 사건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처음만 해도 루터는 교황의 선의를 믿었다. 면죄부가 어떻게 남용되는지를 알기만 한다면, 교황이 앞장서서 면죄부 판매와 구매를 중단하리라 생각했다.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이 어떤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를 안다면, 양의 가죽과 살, 뼈로 세워지는 성 베드로 대성당 대신 그는 차라리 그 성당이 불타서 재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자신이 얼마나 틀렸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종교개혁 여정 중 이 시점에서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완전히 거부한 게 아니었다. 단지 교황의 권위를 분명하게 했는데, 즉 그 권위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남용될 것을 두려워했다.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일반 주교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연옥에 대한 교황의 권한은 모든 주교나 큐레이터가 자신의 교구나 성당에서 신도들에 관해서 갖고 있는 권한과 동일하다.”

루터는 심지어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받아서 교황에서 물려준다는) 열쇠에 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했다. “교황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열쇠의 권능이 아니라 양을 사랑하는 중보의  마음으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사죄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 

95개조 반박문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데 있어 아직 초심자였음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그가 나중에 포기한 신념도 여전히 담겨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그의 핵심 우려는 분명히 담겨있고, 그 반박문이 올바른 손에 쥐어졌을 때 폭발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루터의 진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는 단지 교회의 진정한 유산을 회복함으로써 교회를 갱신하려는 중세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때가 다다랐을 때, 그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로마에 종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Catholic, Not Roman: Luther’s Ninety-Five Theses of Love for the Church

Matthew Barrett | 매튜 바렛은 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과 부교수이다. 그는 Credo Magazine의 총괄편집장이며 Credo podcast의 호스트이다. 대표 저서로 ‘None Greater: The Undomesticated Attributes of God’이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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