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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양 칼럼] 슐라이어마허와 불트만, 대속 신앙을 부정한 기독교인⑴

▲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사진: 유튜브 채널 CTS뉴스 캡처

눈먼 기독교(45)

근본주의 5대 교리는 모두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 예수의 대속적[1] 죽음은 핵심 중 핵심이다. 기독교는 자기 스스로의 구원 성취를 부정하고, 구원자에 의한 구원 성취를 믿는 종교다. 즉, 예수가 나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고 그 대가를 다 지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예수 대속 신앙이다. 그러므로 이 대속 신앙을 거부하는 것은 곧 예수 신앙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런데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유명인들 가운데 예수의 대속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뜻밖에도 적지 않다.

나는 자신을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그 사람이 진짜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그런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이 애초에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결코 완전을 요구하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애초에 인간을 전혀 완전하지 않게 창조하셨으니까요. 물론 인간이 완전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요. 그러니 인간이 완전함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인간을 영원한 벌에 처하실 리도 없지요.[2]

이 글은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슐라이어마허가 개혁파 목사였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다. 현대신학은 19세기에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 일어난 인간 중심의 신학, 즉 자유주의 신학을 말한다. 이 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자유주의 신학의 원조답게 슐라이어마허는 예수의 대속을 믿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를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이 열네 살에 회심을 경험했고, 구원도 믿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말한 구원은 사람이 예수의 인격에 감동하여서 죄를 잘 극복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기에 삼위일체 교리도 당연히 거부했다. 그래서 이단인 유니테리언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슐라이어마허가 완전한 자유주의자였다면,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한 인물이 바로 루돌프 불트만이다. 자유주의처럼 성경의 내용을 극단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기존의 정통 신학에 동조하는 것도 아닌 신학을 신정통주의[3] 신학이라고 부르는데, 불트만과 칼 바르트, 라인홀드 니버, 에밀 부르너 같은 학자들이 이 계열에 속한다. 철학자 하이 데거의 방법론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한 불트만은 성경의 복음서가 예수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왜곡, 각색, 변질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원래 모습을 알 수 없다고 비판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표상들은 그 시대의 신화적 산물이고, 오늘날 현대의 과학적 사고와 모순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예수의 부활 역시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지만, 그 추종자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주관적인 입장에서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비신화화’ 작업을 통해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예수를 찾고자 했다. 그에게 신학은 곧 ‘인간학’이었다.

자유주의와는 달리 기독교의 교리적 확신이 (그 실제 여부와는 상관없이) 기독교의 핵심 가치라고 인정하는 신정통주의를 어떤 이들은 우호적으로 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역시 복음주의적 관점에서는 비성경적이며 불신앙적이다. 예를 들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베드로가 예수에게 대답한 것으로 유명한 마태복음 16장(마가복음 8장, 누가복음 9장)에서의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는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 신자들을 위한 신앙 교육 때문에 편집된 –즉, 만들어진- 것이라고 불트만은 보았다. 그뿐 아니라, 불트만은 사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오병이어(五餠二漁) 이적 역시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4] 그는 당연히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을 대속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그의 예수관과 구원관이 성경적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무리 의미를 잘 부여하고자 하더라도 성경을 내용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온전한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5]


[1] 代贖, substitutionary atonement, 대구속신(代口贖身)의 준말로서 타인이 나의 몸값을 대신 치러주는 것

[2] 옥성호,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부흥과개혁사, 131쪽

[3] 新正統主義, Neoorthodoxy, 유럽에서는 위기신학 또는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부른다.

[4] 불트만은 이 사건을, 어린 아이가 자기 도시락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에게 갖다 드렀는데 이것을 본 군중이 자신의 품속에 숨겨 뒀던 도시락을 다 꺼내어 함께 나누었더니 모두 먹고 열 두 광주리나 남은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런 해석은 자유주의 교회에서는 보편적인 견해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정진경 추기경 역시 이런 해석을 따른다.

[5] 물론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가 만연해 있던 독일과 일본에서는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정통 신앙 쪽으로 사람들이 미약하나마 관심을 갖도록 만들기도 했지만, 이미 보수적 신앙이 주도하던 우리나라에 새롭게 도입된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와 구별됨 없이 정통 신앙을 허무는 역할만을 했을 뿐이다.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눈먼 기독교>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박태양 목사 | 중앙대 졸. LG애드에서 5년 근무. 총신신대원(목회학), 풀러신대원(선교학 석사) 졸업. 충현교회 전도사, 사랑의교회 부목사, 개명교회 담임목사로 총 18년간 목회를 했다. 현재는 (사)복음과도시 사무총장으로서 소속 단체인 TGC코리아 대표와 공동체성경읽기 교회연합회 대표로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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