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 잠 4:8

[정성구 칼럼] 하멜과 박연

▲ 당시 조선의 국왕인 효종과 하멜 일행들을 묘사한 삽화. 사진: contents.history.go.kr 캡처

50년도 더 넘었다. 나는 동숭동 서울대학교 앞에 사시는 국사 학자인 이병도 박사댁을 방문했었다. 이병도 박사는 한국 국사학계의 어른으로서 불어판으로 된 <하멜 표류기>를 우리말로 번역했었다. 나는 이 박사님을 찾아뵙고 하멜 표류기를 화란 원문에서 우리말로 다시 번역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이 박사님은 상당히 기뻐하면서 그리하면 좋겠다고 했다. 사실 나는 실력도 안되었지만 무모한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즈음에 나는 <화란어 문법의 연구>라는 책자를 발행하고 있었고, 또 한국 외국어 대학교 화란어과 창설 교수로 일하고 있었기에 은근히 자기 과시를 해본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용이요, 부끄럽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나는 하멜 표류기 원본을 본 일도 없거니와 원본이 있다 한들 17세기의 화란어를 읽을 수 없었다.

<하멜 표류기>는 사실상 조선이란 나라의 사회상을 서양에 알린 최초의 책이었다. 헨드릭 하멜의 표류기는 1668년에 화란어로 출판된 후 불어, 독일어, 영어로 번역되었으니, 당시 조선의 민낯을 세계에 알리는 최초의 책이 되었다. 하멜 표류기 내용에는 1653년 1월에 하멜 일행이 화란을 출발해서 6월 1일 바따비아(Batavia)에 이르러 수일 머문 후 14일에 스펠월(Sperwer)이란 배를 타고 대만에 잠시 들려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 제주도 서귀포 부근에 파선했었다. 선원 64명 중 28명은 익사하고 배의 서기인 하멜을 비롯한 36인이 제주도에 표류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 관원에게 잡혀 왔고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양에 있는 외국인 관헌인 한 분을 데려왔다. 그가 바로 이미 십수년 전에 풍랑으로 조선에 정착한 박연(朴延, Jan Janse Weltevree)이었다. 하멜 일행은 고향 사람을 만났고 네덜란드 말을 할 수 있어서 너무나 반가웠다. 하지만 박연은 하멜 일행들에게 크게 도움을 주지 못했었다. 하멜 일행은 죽을 고생을 하고 결국 전라남도 강진의 병영에 유배되었다가 14년 만에 조선을 탈출해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가 이 표류기를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멜은 조선의 지리, 풍토, 산물, 정치, 군사, 법속, 종교, 교육, 교역에 대해서 하멜이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집필했다.

필자는 금번 여름에 벼르고 별러서 강진으로 가서 병영 앞에 전시된 하멜의 행적을 살폈다. 내가 하멜의 표류기를 관심 있게 본 것은 핸드릭 하멜과 선원들 대부분이 화란 개혁교회(Gereformeerd Kerk)의 성도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스위스의 요한 칼빈(John Calvin)의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에 가장 개혁교회의 사상체계를 널리 확산시킨 곳은 사실 화란이었다. 그 이유는 화란 왕국을 건국한 윌리암 오렌지(William Orange) 공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백성들은 오렌지 장군을 국왕으로 추대했고 오렌지 국왕은 스페인의 가톨릭의 신앙을 포기하고 칼빈주의 신앙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선포했다. 그래서 화란은 종교개혁 이후 가장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사상이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국제종교회의로서 돌트 총회(Dort Synod, 1618~1619)를 열고, 6개월 동안 154회의 회의를 거쳐 <칼빈주의 5대 교리(Five Points)>를 만들었다. 때문에 그 시기의 화란 사회의 분위기는 대다수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질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즈음에 조선에 <박연>도 오고, 한참 후에 <하멜> 일행이 풍랑으로 오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세계와 담을 쌓고, 외부와의 정보나 교류가 전혀 없던 시기였고, 오직 양반계급의 유교적 세계관에 갇혀 있을 때였다. 박연은 선교사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었으나 당시로는 철저한 개혁주의 신앙(Reformed Faith)을 가졌던 것은 틀림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선교를 했다는 기록도 없고 종교 활동을 한 일도 없으나, <효종실록>에는 박연을 가르쳐서 늘 진리를 말하는 듯 보였다고 한다. 즉 <有類道者談(유유도자담)>이라고 말끝마다 도를 닦는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했다. 그리고 박연은 자주 <順天者興, 逆天者亡(순천자흥 역천자망)-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흥하고 하늘에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는 아무래도 기독교의 복음을 유교식으로, 또는 맹자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박연은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국제결혼을 하였고 자녀들도 낳았다고 한다. 50여 년 전에 이병도 박사와의 대화 중에 인천에 白씨 성을 가진 분의 외모가 꼭 서양 사람처럼 생겼는데 혹시 박연의 후손이 아닐까 했다.

일본 기록을 보면 후일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해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서 경찰에게 심문을 받을 때, 일본 경찰이 질문하기를 “너희들은 너희 나라 종교인 크리스찬이냐(吉利示団, Kirishitan)”라고 물었을 때, 하멜 일행은 다같이 “野野(ja, ja)”라고 대답했다. 즉 “네.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특히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의 동아시아 언어와 문화 교수인 게리 레드야드(Gary Ledyard)의 교수의 책 <화란 사람, 한국에 오다. The Dutch Come to Korea>에 보면 항해 도중에 <하나님께 기도>했던 장면이 몇 번 있다. 한국에 기독교 신앙이 언제 전파되었는지 여러 학설이 많다. 한국에 기독교 신앙이 전래 된 것은 1884년 미국 의사 알렌(Allen) 선교사, 그리고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함으로 시작된 것을 정설로 생각한다. 그런데 효종실록에 화란 사람 박연 즉 벨트브레가 말했던 전도가 조선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것도 맞고, 사람들은 그의 말을 유교적 관점으로만 이해했었다.

17세기 화란 개혁교회 성도였던 하멜 일행과 한국에 귀화해서 화포 만드는 일에 공헌한 박연이 나름대로 <順天者興, 逆天者亡>이란 맹자식의 말은, 이 나라에 최초의 복음 전도의 모습이 아닐는지? [복음기도신문]

정성구 박사 |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40여년간 목회자, 설교자로 활동해왔으며, 최근 다양한 국내외 시사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조명한 칼럼으로 시대를 깨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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