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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기 칼럼] 누가 개척자인가

사진: gnsee.org

송준기 목사는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의 순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동안 그같은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담아냈다. 이 칼럼은 그의 저서 발췌와 집필을 통해 선교적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한다. <편집자>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막 1:17)

떠남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몬과 안드레가 떠올랐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다짜고짜 “나를 따라오라”고 명령하셨다(막 1:17). 그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명령 앞에 둘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말씀에 의하면 즉시 예수님을 따라갔다.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막 1:18). 그들에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즉각 떠남’을 의미했다. 우리도 그 부름을 받았다.

제자들의 떠남에는 목적이 있었다. 바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따라가는 것이 제자의 일이었다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화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었다. 그분을 따라갔던 제자들은 나중에 말씀대로 변했다.

그분은 우리에게도 같은 제안을 하신다. 사람을 낚는 교사를, 운전사를, 주부를, 회사원을 말씀하신다.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모든 크리스천에게는 하나의 원칙이 제안되었다. 그것은 사람을 낚는 일, 즉 제자화이다.

같은 길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즉 제자이다. 그들은 ‘어부’를 떠나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삶의 방식이 바뀐다.

제자화는 교실 기반의 수업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삶의 방법이다. 제자들은 자신의 삶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해 애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 모범을 보여준다. 이를 보고 배운 사람들이 또 같은 일을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제자화이다. 예수님이 이 일을 시작하셨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떠나고, 소금이 있으면 부패가 방지되듯 그분의 제자가 있는 곳에서는 제자화가 진행된다.

제자는 또 다른 제자들에게 같은 일을 명령했다. 그러면 변화는 예수님이 주도하셨다. 교회는 늘 제자화의 결과물이었고, 그분에 의해 주어졌다(마 16:18, 고전 3:6).

예수님은 제자화 사역을 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죽으셨다. 또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제자들이 같은 길로 갔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었다. 제자화의 결과로 사자 우리와 장작더미와 감옥의 사형장에서 숱하게 죽어갔다. 제자들은 순교자들이었다.

오염

밀라노 칙령이 있었던 AD 311-313년은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해이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모든 종교에 대해 로마는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장려하고 보호하려는 최초의 국가 정책이었다. 초기 300년간의 극심한 박해는 그때부터 급격히 자취를 감췄다. 교회가 승리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가 황제의 보호를 받는 위치로 승격되면서 제자화가 급속도로 중단되기 시작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형장의 이슬이 되었던 시대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떠남을 멈추고 사람을 낚는 삶의 방법을 죽이는 시대로 바뀌었다.

박해가 사라지기 이전의 교회는 단순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결과물이고, 제자들의 모임이었다. 제자화가 진행되는 곳에 교회가 있었다. 심지어 초대교회의 박해자도 교회를 제자들로 볼 정도였다(행 8:1-3, 9:2,17-22).

제자들의 모임이라서 교회는 누구나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박해가 멈추고 교회가 국가 제도로 편입되자, 교회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매우 복잡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변화가 아니라 오염이었다.

국가 리더십은 제자화를 위해 떠나는 대신에 한 장소에 머물러 교회 건물을 쌓아올렸다.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명령인 “따라오라”를 받아 “떠나”가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오히려 멋진 국가 건물들 안에서 “들어오라, 그리고 떠나지 마라”라고 명령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건물을 갖게 된 교회는 제자화 중심의 교회 전통에서 많이 벗어났다. 더 멋진 건물, 더 화려한 옷, 더 높은 위계로 올라가려고 노력했다.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오염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더 많은 재산과 명성을 쌓아놓고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 사람 교회 대신 보물창고를 만들어 제자화를 중단시켰다. 사람을 낚는 대신 부와 명성이 교회 성장의 척도가 되었다. 그들은 교회에 인간 계급을 만들고, 인간 사제가 앉을 높은 의자를 금으로 치장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약 300년 동안 교회는 그분의 명령을 좇아 끊임없이 떠나야만 했던 삶 그 자체였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와 순교가 중단되자 교회가 떠남 대신 정착을 선택했고 세속화되어, 역사는 중세의 암흑기를 향해 치닫게 되었다.

문제가 있다

그렇게 천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막연한 생각은 ‘떠나지 않는’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철저히 거부되었다. 문제 제기자들의 신앙은 적대시되었다. “교회가 무엇이냐?”라고 묻던 사람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리고 다시 수백 년이 흘렀다.

예수님의 교회는 유기체이다. 몸이다. 생명은 자생력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사람들은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일반적 생각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지혜로워졌다. 그것은 인쇄혁명을 통해 급속히 번져갔다. 성경책 보급은 종교개혁의 핵심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교회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직접 보게 되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것은 교회의 교회 됨에 대한 회복 운동이었다. 경험과 전통, 지위와 화려한 건물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명령 자체로 돌아가자는 개혁운동이었다.

교회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던 수많은 권력자들(정치가들, 사제들, 교황들)에게 “NO!”라고 함께 외쳤던 운동이었다. 교회는 그들의 것이 아닌 “예수님의 것”이라는 주장이 거센 불길같이 세계로 번져나갔다.

검은 옷

오늘날도 그 개혁은 동일한 관점에서 일어나고 있다. “교회는 예수님의 것”에 반反하는 모든 명예욕과 소유욕과 교만에 반발해 일어난다.

종교개혁자들은 검은 옷을 입었다. 기존의 사제들이 화려하게 치장해 입었던 금빛 옷들에 반발해 검은 옷으로 자기 자신을 감추려고. 당시 목회자가 검은 옷을 입는 것 자체가 기성 교회들을 향한 거친 항의였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왜 우리 목사님은 검은 옷을 입느냐?”라고 물었다면, 개혁주의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교회는 리더 한 사람이 드러나지 않고 주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교회의 목사지만 저 자신을 가리고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보게 하려고 검은 옷을 입었습니다.”

개혁은 그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오늘날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한다. 오늘날 우리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됐는지 성경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적다. 또 성경으로 설명한 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더 적다.

움직이는 교회

교회는 정착하면 인간의 죄성에 의해 오염된다. 교회는 떠나는 곳이며 동시에 떠나보내는 곳이다. 교회는 움직여야 한다. 예수님이 따라오라고 하신 자리로 떠나가야 한다. 주일 오전 9시가 아니라, 월요일 아침 7시 45분부터 제자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교회를 이룬다.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한 사람은 교회의 어떤 행사들보다 강력하다. 교회는 예수님의 리더십 아래 모인 전우들[band ofbrothers]이다. 교회는 한 사람의 설교자나 종교 지도자 때문에 모이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예수님 때문에 모이고, 그분 때문에 움직인다. 교회는 그분의 것이다(마 16:18).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명령을 수행한다. 교회는 예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분에 의해 끝난다.

마태복음의 결론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마 28:19,20)에는 네 가지 임무가 있다. 그것은 가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분을 따라가는 관계 안에서 이 명령들을 수행하는 사람이 제자이다. 교회 조직과 건물은 제자화의 목적이나 결과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제자화가 진행된 결과로 제자들의 모임, 즉 교회가 세워진다. 제자화가 교회를 낳는다.

“제자들의 모임이 곧 교회”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제자화를 하는 사람이 교회 개척자”라는 주장도 옳다.

임무

제자화든 교회 개척이든 방법론을 이야기할 때 배제되기 쉬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예수님이다. 방법론을 성경 바깥에서 가져오면 예수님을 잊기 쉽고, 그것이 현장과 동떨어져 있다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잊기 쉽다.

성경과 현장을 함께 살펴보라. 성경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생각해보라. 그분이 따라오라고 명령하시기에 떠나야 하는 현장을 보라. 지금 내 주변에 누가 있는지를 보라. 그리고 그들을 제자화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예수님은 어부들에게 사람 낚는 농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똑같이 어부를 약속하셨다. 다만 다른 일을 하는 어부가 된다고 하셨다. 마찬가지다. 다양한 상황에 놓여있어도 자신의 일상 앞에 “사람을 낚는…”이라고 붙여 넣는 사람, 제자화를 진행하는 사람이 되라. 그때 교회가 시작된다.

교회를 시작하는 일은 새롭거나, 어렵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예수님을 따라갔던 결과물이었고, 지금도 예수님이 사람 낚는 어부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직접 진행하시는 일이다. 모든 제자들에게 함께 주어진 임무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거나 해야 했던 일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제자화를 보류해왔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며, 약간의 세례를 베풀고 있지만 제자는 거의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_데이비드 머로우(David Murrow)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끝까지 가라(도서출판 규장)>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송준기 | 총신신대원 졸. 웨이처치 담임 목사.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을 통해 순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그동안의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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