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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기 칼럼] 교회와 기도: 누가 원류인가

사진: Unsplash의 Megan Allen

송준기 목사는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의 순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동안 그같은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담아냈다. 이 칼럼은 그의 저서 발췌와 집필을 통해 선교적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한다. <편집자>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막 12:38-40)

처음 200년 동안 있었던 일

교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 ‘전염병자’, ‘세상을 소란케 하는 자들’, ‘이단’ 등으로 불렸다(히 11:38, 행 24:5). 그런 사람들은 교회가 시작된 직후 약 200년 동안 12명에서 25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것은 200만 배가 넘는 증가 수치였다. 그 2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알렌 허쉬 (Alan Hirsch) 박사는 ‘초대교회 처음 200년 간의 상황’의 요인들을 6가지로 정리했다.

(1)교회는 불법적인 종교활동이었다.

최악의 상황은 관련자 모두 함께 고발되어서 잔인하게 고문 받고 처형당하는 것이었다.

(2)교회 건물로 불릴 만한 공식적 장소가 전혀 없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도 이를 증명한다. 집집마다 비밀리에 모여서 신앙 모임을 했다.

(3)성경책도 없었다.

사도들이 보내주었던 편지를 지역별로 돌려보는 정도였다.

(4)전문적인 리더십이 없었다.

오늘날과 같은 교회 정치 시스템이 없었다. 교단 중심의 선출 리더십도 없었다. 다만 침착하고 자발적인 네트워킹으로 존재했다.

(5)교회의 모습이 오늘날과 너무 달랐다.

새신자예배, 주일학교, 청년부, 신학교 등이 없었다.

(6)새신자 환영 분위기가 없었다.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2세기에 접어들면서는 박해와 이단의 심각한 증가 때문에 새신자는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야 하는 심각한 입단 기간을 따로 가져야 했다.

그 최초의 200년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를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관찰해왔다. 크리스천은 세상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에는 그들을 담아낼 수 있는 어떤 정치/사회 조직이 없었다.

원류(源流)

예수님은 어떤 정치 리더십과도 전혀 달랐다. 그분의 말씀은 어디서나 열매로 증명 되었다.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다(눅 7:22).

그분은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였고, 사람들을 제자화하며, 그들을 통해 교회를 시작하셨다.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은 내면의 원초적인 변화를 얻었고, 그분을 만난 사람들마다 새로운 인생의 원년을 일구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정치 리더십의 숨겨진 이중성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로마와 유대 사이를 오가며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할 뿐인 사람들의 진위가 들통났다. 가짜가 가득한 사회에서, 진짜는 등장만으로도 기준을 만드는 법이다.

그분은 한 번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계나 혁명당에 입문하신 적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바리새파도 사두개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에센파이거나 열심당원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로마편도 유대편도 아니었다(눅 20:25). 그분은 어느 류(流)에도 속하지 않은 분이었다. 오히려 그분의 존재 자체가 진위의 기준이었다.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을 전하셨다. 그것은 누군가를 대변하는 정견(政見) 따위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입에는 진리가 가득했다. 그분은 ‘로마 정부 하에서 잘 사는 8가지 원리’ 따위의 자기계발 철학을 가르친 적도 없으셨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신약성경의 사복음서에서 아무리 뒤져봐도 그분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어떤 왕국을 세우기 위해 일하신 적이 없었다. 시민의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아 주기 위해 일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한 번에 한 사람에게 집중하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치료하시고,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그분은 독특했다. 예수님은 원류였다.

예수님이 교회이시다

반면 우리는 다 아류다. 자연과학자 칼 세이건도 이에 동의한다.

”만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애플파이를 만들려 한다면 먼저 우주를 만들어야 한다.”

세상 그 누구도 어느 것의 원류일 수 없다. 해 아래 새것은 없으며, 창조주 외에는 새것을 만들어 낼 존재가 없다(전 1:9, 12:1). 교회 역시 예수님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예수님만이 교회의 원류이시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성전 논쟁을 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성전 청결 사건 직후 있었던 일이다. 예수님이 장사하는 사람들이 성전을 더럽히고 있는 것을 보셨을 때, 그분은 가만히 계시지 않았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며 외치셨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그 일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왜냐면 그 장사꾼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사고팔며 돈을 바꿔주게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허락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리더십에 위협을 느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다시 말하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을 보니 뭔가 우리보다 대단한 사람인가본데, 그 증거가 뭐냐?”라는 의미로 던진 질문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교회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그리고 이 대답의 의미에 대해서는 제자들에 의해 주석이 달렸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한마디로 예수님은 자기 몸을 성전에 비유하셨다.

흥미롭게도 이후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몸을 ‘성전’이라고 동일한 표현을 써서 부른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신약은 성령의 임재가 있는 성도들을 성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 예수님의 몸, 그리고 성도의 몸이 하나의 단어로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들을 통해 일관된 어조로 성전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건물이든 사람이든 그곳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임재에 대해 이렇게 직접 말씀 하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분이 임재해 계신다면, 건물이든 사람이든, 그곳이 바로 성전이 된다. 예수님이 성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이 거하시는 사람들의 모임도 성전이 된다.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시다

아류들이 왕이 되는 시대에 진짜 왕이 오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메시아가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그러나 이미 스스로를 원류로 주장하던 많은 사람들은 진짜의 등장에 위협을 느꼈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과 예수님 사이에서 누가 원류인지를 서로 질문했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은 뜨거운 감자였다. 유행하는 문장이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셨다. 그때 베드로가 믿음의 답변을 했다. 정답을 말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며 신약에서 처음으로 “교회”에 대해 말씀하셨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예수님은 이때, “내 교회”라는 선언을 하셨다. 직접적으로 교회의 소유주가 자신이라고 공표하셨다. 그분은 교회를 제자의 믿음이라는 반석위에 세우실 것이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지옥권세를 이길 것이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신앙고백을 했던 제자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교회였다.

예수님’이’ 교회, 예수님’의’ 교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시작해왔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누군가의 왕국으로 전락하거나, 예수님을 배제시킨 사역으로 교회를 더럽혀왔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신 것에 완전히 동의 하지 않던 사람들이 저지른 일들이었다.

그들은 더 큰 교회 건물이 부흥의 척도인양 사역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교회를 통해 사사로이 돈과 명예를 추구했던 사람들조차 있었다. 그러자 자성의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약 30년 전, 현실 교회의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유행했던 말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는 교회다”(Wir sind Kirche)라는 것이었다. 독일의 한스 큉을 중심으로 1990년대 초에 일어난 교회 갱신 운동의 슬로건이었다.

이후, 미국의 교회개척 네트워크들인, 3DM과 ACT29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 문장은 더 유명해졌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교회가 아니다.

자신을 교회와 동일시하기 전에 그는 먼저 예수님과 동일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가 되려면 먼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람이어야 한다. 만약 예수님과 동질의 성자가 있다 해도, 그는 교회와 동일시 될 수 없다. 왜냐면, 교회가 서는 순간, 그것은 예수님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이 교회이시다. 어떤 교회이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것이다.

기도로 세우는 교회

그러므로 누군가가 교회를 시작한다고 할 때는 예수님께 철저히 의존해야 한다. 제자화 역시 예수님에게서 시작해야 한다.

예수님의 교회를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다양하게 볼 수 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름, 그리고 성경 진리대로 순종함 등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이다.

예수님이 교회이며, 그분의 교회를 한다는 것은 매일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그 모범을 우리에게 보이셨기 때문이다.

4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은 늘 기도하는 분이었다. 그분은 기도 가운데 모든 사역을 진행하셨다. 기도를 통해, 아버지에게 의존적인 사역을 하셨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요 12:49, 50).

우리가 제자화를 진행하며 교회를 세우는 길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른다. 하나님이신 분이 이렇게, 기도하며 아버지께 받은 것으로 사역하셨다면, 죄인인 우리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기도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매일 만나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 방법이다. 기도 없는 사역은 존재치 않는다. 우리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성령님의 능력 있는 가르침을 먼저 구해야하며, 심방하기 전에도 이미 성령께서 영혼들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전도나 선교를 할 때도, 학교나 집에 갈 때도 우리는 모든 사역에 예수님이 주시는 열매가 있기를 간구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 자기 자신이 얼마나 가짜인지가 매일 들통나버려야 한다. 기도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과 거리가 먼 것인지를 매일 발견해야 한다.

회개하며 애통하고, 울며 씨를 뿌리고,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어내고, 하나님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를 발견하고, 그분이 기뻐하는 것을 함께 기뻐하고, 애통하실 때 함께 울며, 외치실 때 함께 나팔을 부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의 사람이 예수님의 교회를 한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교회

반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교회를 한다. 가짜 교회를 세운다. 기도 없는 교회, 기도 없는 제자화란 열매 없는 과수와 같다. 기도 없이는 아무리 땀 흘려도 가지만 무성한 나무, 빛 좋은 개살구를 얻게 된다. 기도 없는 모든 땀은 헛수고다.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수고가 필요한 것처럼 영적 자녀를 낳는 데는 기도의 수고가 필요하다. 목양자도, 선교사도, 모든 크리스천도 기도자여야 한다. 기도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제자란 없다.

기도 없이는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 수 없다. 자기 제자를 만들고, 자기 욕심을 채울 뿐이다. 기도 없이는 자기부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고, 자기 십자가를 지기는커녕, 내팽겨 치게 될 뿐이다.

기도는 예수님의 제자 삼기와 파송의 모범이다. 기도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던 방법이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행하는 사역모범이다.

제자화를 시작하는 사람이 교회 개척자다. 그런데 예수님이 교회이시며, 동시에 교회는 그분의 소유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그분의 뜻대로 제자화를 진행한다.

교회는 자기 맘대로 짓는 모래성 따위가 아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건설해서 예수님이 주인 되시도록 헌신하는 것이다. 예수님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는 제자가 만들어내는 결과다.

예수님이 의의 나무이시다. 우리가 제자화를 진행하는 길은 접붙이기와 같다(요 15:5). 기도로 예수님께 붙어있으면 그분의 제자들을 해산할 수 있게 된다. 기도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말씀을 전할수도 영혼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도 없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에 열매가 없듯,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제자를 낳지 못한다.

기도는 예수님 의존적인 행위라서, 기도 없는 사람은 예수님을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들은 말씀에 의해 제자가 아닌 사람들로 정죄된다.

우리는 누구도 교회의 원류源流를 이룰 수 없다. 근원은 언제나 예수님께 있다. 이를 아는 사람은 기도한다.

기도는 교회의 강한 방벽이자,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무기이다. (마르틴 루터)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끝까지 가라(도서출판 규장)>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송준기 | 총신신대원 졸. 웨이처치 담임 목사.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을 통해 순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그동안의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담았다.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출처를 기재하고 사용하세요.> 제보 및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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