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성 선교사 (키르기스스탄)
287호 / 사람풍경
61세, 정년을 앞두고 딸 선교사가 있는 키르기스스탄에 방문했을 때, 평신도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딸의 사역을 돕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땅의 여러 동역자들을 섬기는 선교사로 그를 인도하셨다. “나이 들어 현직을 은퇴하는 장로가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저 도와주고 뒷바라지 하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였지요.” NGO, 교회, 의약품 지원, 한글 사역, 기도사역 등 주님이 부르신 곳이면 어디든 지칠 줄 모르고 섬기는 노장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 선교지로 오시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딸이 선교사가 된 지 5년이 지나 한번 선교지를 둘러보러 갔습니다. 싱글 선교사가 어린이 교육과 장애우 가족까지 섬기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조금이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30여 년을 섬겨온 공직의 정년을 앞두고 있어서 퇴직하면 합류할 생각이었는데 딸도 함께 살기를 원하며 강권했어요. 막상 선교지에 와서 보니 도와줄 일이 전혀 없고 딸이 선배 선교사가 되어 든든한 가이드를 해주었죠.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모자란 저에게도 할 일이 많이 생기더군요.”
선교사로 헌신한 딸을 만나러 갔다가…
– 어떤 일을 하셨나요?
“초기에는 딸이 섬기던 비정부기구(NGO), 어린이센터를 도우며 이 지역에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지회를 창립하고 조이(JOY)복지센터를 세웠습니다. 교민과 유학생들을 섬기고 싶은 마음에 조이(JOY)교회를 설립했어요. 이런 일들을 하다 보니까 할 일이 제법 많더군요.”
올해 75세인 박 선교사는 한국에서 27년간 건강보험공단에서 근무했다. 그는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일터를 달라고 기도해 이곳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그는 닷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주말과 주일에는 사랑하는 주의 몸된 교회를 섬겼다. 또한 한국 CBMC, 장기기증운동, 남전도회연합회와 장로연합회도 섬겼다. 이러한 그의 섬김의 삶이 선교지로 이어진 듯 보였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지내다 보니까 어느새 16년 지났어요. 두 차례 수술을 받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주님은 돕고 섬길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어요. 기도하면 할 일을 주시고 또 주님이 ‘너 이런 것 좀 같이 도와라. 협력해라.’ 하면서 인도해주셨어요. 그러면 여기저기 감초처럼 끼워주시는 은혜를 입었어요. 70 인생을 살다 보니 고집할 것도 없고, 양보하고, 내가 손해 보고 부족한 편을 택했어요. ‘나 잡아먹고 너 살아라.’는 말처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죽으니까 관계도 좋아지더군요.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서 살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같이 협력하게 되고 또 같이 일을 해줬으면 하는 분들이 계셨어요. 그렇게 여기저기 섬기게 된 것이 한민족 고구마 나눔 운동이나, 한글 세계화 운동, 나라사랑동지회, 복음과 기도 섬김이 등 여러 곳에서 섬기게 됐어요.”
– 섬기는 영역이 많으시네요?
“제가 어떻게 한글 세계화 운동을 하겠어요? 한글 전공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는 그냥 각 나라의 본부장을 추천해 주는 일을 해요. 각 나라에 한글 선교할 수 있는 분들이 있으면 그 나라 한글세계화운동 본부장으로 추천을 해주는 거죠. 하나님의 일꾼을 세워주는 일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제가 직접 하는 게 아니라 잘할 수 있는 분을 세워주는 거죠. 도와주고 뒷바라지 해주고 섬겨주는 일을 해요. 고구마 나눔 운동도 그걸 할 수 있도록 일을 만들어주고 실질적으로는 관리소장을 세워서 다 맡아서 하도록 해줘요. 저는 책임 역할만 해주고요. 이렇게 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더군요.”
심부름을 하다 보니 그게 선교가 됐어요
– 각 영역에 사람을 세워주는 뒷바라지인 셈이군요.
“하나님의 은혜죠. 선교사들에게 의약품을 지원하는 일이나 CGN TV에서 안테나를 설치해주는 일도 의도치 않게 섬길 수 있는 길이 열렸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런 일들을 다른 분들에게 넘겨드리고 복음과 기도로 섬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복음과 기도는 나이가 많아도 할 수 있거든요.”
– 복음과 기도로 섬기신다는 건 어떤 건가요?
“이곳에 요셉의창고에서 파송 받은 선교사님들이 계세요. 어느 날 열방을 위한 기도인 느헤미야52기도를 한다고 한인선교사회를 통해서 동참해달라는 광고가 올라왔어요. 저도 한두 시간 참여하겠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기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안 되겠다 싶어 계속 기도에 참여하게 됐는데, 주님이 은혜를 주셨죠. 그곳에서 복음학교라는 훈련이 있다는 것을 안내받고 한국에서 열리는 복음학교에도 참여하게 됐어요. 너무 좋더군요. 죄덩어리였던 내가 복덩어리로 완전히 변하는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훈련을 받기 전에는 내 중심적으로 살았는데, 십자가에서 나의 죄 된 옛 생명이 죽고 이제는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계신다는 것이 믿어지고 나니 아무래도 이웃들을 향해서 살게 되는 생활로 변하게 된 것 같아요. 저는 합동측 장로로 평신도 선교사 파송 받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복음과 기도로 살아가는 요셉의창고 파송 선교사님들을 만나게 된 거죠. 이분들과 함께 예배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면서, 숙소만 다를 뿐, 아버지의 집 센터에서 함께 기도하고 모여 예배드리고 연합하며 살아요.”
– 이전과는 또 다른 사역이 펼쳐진 것 같은데요? 어떤 사역들을 하시나요?
“단순하게 말하면, 복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게 하는 것이 선교더군요. 그러면 그 영혼들이 살아나잖아요. 순회선교단에서 주관하는 복음캠프가 이곳에서 열릴 때, 저와 요셉의창고에서 파송된 복음기도동맹 선교사님들이 함께 복음캠프를 섬겨요. 70~80명이 모여서 한 주 동안 먹고 자면서 복음을 가르치고 배우죠. 캠프를 위해 식사도 준비하고, 스텝으로 섬기죠. 그리고 평소에는 동맹군들과 ‘아버지의 집’ 센터에서 예배드리고 느헤미야 기도도 해요. 아버지의 집은 딸 선교사가 어린이 사역을 하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딸이 한국 본부로 옮기게 되면서 그동안 해왔던 사역을 멈추게 됐어요. 그러다가 제가 복음과 기도를 만나게 되면서 기도센터로 바꾸게 됐죠. 또 근처에 ‘복음과 기도의 집’ 센터도 있어요. 이곳엔 기도할 수 있는 집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복음과 기도의 집이 선교사들이 사역 후에 지쳐있을 때 쉴 수 있는 집. 또 현지 사역자들이 와서 은혜받고 함께 나누고 기도하고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집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이 일을 위해 제가 건물을 관리하면서 방문하시는 분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복음과 기도로 선교지를 섬기다
–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머니가 6.25 동란 때 형님과 누나, 저와 여동생을 데리고 피난을 가셨어요. 피난길에 교회 담 밑에서 하루저녁을 보냈다고 해요. 당시는 교회인지도 모르고 큰 집인 줄 알았다더군요. 새벽이 되니까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가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도 따라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울면서 나라를 위해서 통성기도를 하더라는 거죠. 어머니가 그걸 구경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고 뒤집어진 거예요. ‘나도 예수 믿겠습니다.’ 고백하고 그때부터 주님을 알게 됐어요. 일자무식이었던 어머니가 교회에서 한글을 깨우치고 교회 리더가 됐어요. 나중에는 어머니가 남편과 남편 회사 친구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집 앞마당에 교회를 개척했어요. 저는 20세가 못 되어서 어머니를 따라서 새벽기도에 나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됐어요. 이후 지금까지 주님이 은혜로 인도해주셨습니다.”
– 마지막으로 기도제목 말씀해주세요.
“주님의 은혜로 드려진 아버지 집에서 여생을 복음의 통로로 잘 섬기게 하시고, 주님 주신 복음과 기도의 집이 수리가 필요한 상황인데 리모델링이 잘 되어 아름다운 은혜의 동산으로 사용되도록 기도해주세요.” [복음기도신문]
Y.K.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출처를 기재하고 사용하세요.> 제보 및 문의:
[관련기사]
“위로받는 환자들, 예수님을 영접하다”
“고아가 되면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돼요”
“14년간 매월 한 주간 열방을 위해 기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