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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대배교에 관해서 알아야 할 열 가지

Unsplash의 Aaron-Burden

예수님과 사도들은 재림과 그의 나라가 완전히 완성되기 직전에 일어날 대배교를 예상한 것 같다. 다음은 대배교에 대해 알아야 할 열 가지이다.

대배교와 배역은 거의 같은 것이다

흔히 감람산 담화로 알려진 마태복음 24장의 중간 부분에서 예수님은 말세에 대규모로 발생할 일종의 배교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그리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마태복음 24:10-14)

바로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나야 할 “배신”(the rebellion)을 가르친 배경이 된 것 같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과 우리가 그분 앞에 모이는 일을 두고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영이나 말이나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에 속아서,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생각하게 되어, 마음이 쉽게 흔들리거나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

데살로니가후서 2:3에서 바울은 “배교” “걸려 넘어짐” “반역” “배신”으로 번역될 수 있는 헬라어 아포스타시아(apostasia)를 사용한다. 따라서 지금 같은 사건을 놓고 예수님과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배교는 가시 교회 또는 제도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

대배교란 기독교 신앙에서 심각하게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불신자들이 일으키는 정부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이전에 믿고 한 형제였던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기독교 신앙과 실천에 대한 반란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개혁파와 복음주의 학자들 대부분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안토니 A. 후크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교는 눈에 보이는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다.”[1]

그레고리 빌(G. K. Beale)도 비슷한 말을 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참된 성도들이 존재하는 가시 교회 공동체가 너무 배교하여 말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큰소리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교회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공언하겠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참 신자가 아닐 것이다.”[2]

대배교는 종말의 방아쇠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 24장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 모두에서 대배교는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마태복음 24:10-14)

위에 인용된 데살로니가후서 부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일어날 수 없는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데살로니가후서 2:3).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배신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를 설명한다.

“그 때에 불법자가 나타날 터인데, 주[예수]께서 그 입김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고, 그 오시는 광경의 광채로 그를 멸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

따라서 두 기록 모두에서 대배교로 대표되는 불법자의 행동이 주님의 재림 직전에 발생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 사실, 예수님은 감람산 말씀에서 하신,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는 진술을 포함하여 다음 구절을 통해서도 그 기간에 일어날 일을 설명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마태복음 24:15-16)

종말의 사건은 분명히 일종의 정해진 패턴을 따라서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열심히 읽는 성도와 표적 관찰자라면 종말이 가까웠음을 분별하고 적절한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감람산 말씀을 직접적인 맥락에서 보자면야 예루살렘의 포위와 멸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만, 말씀 자체라는 큰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종말을 예고하는 크고 마지막 산고를 예견하도록 돕는 성경 해석에 꼭 필요한 렌즈 역할을 한다. 따라서 대배교 자체와 주인공인 불법자의 행동은 궁극적인 종말 직전에 발생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종말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대배교는 “불법자”와 연관되어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보면 반역은 불법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4)

3절에 나오는 “그리고”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학자들과 주석가들 사이에 약간의 논쟁이 있다. 바울은 반역이 불법자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반역이 발생한 와중에 불법자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는 의미일까? 불법자와 반역이라는 사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문법상 의미가 결정적이지 않기에 둘이 별개이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마도 가장 단순하고 안전한 해석일 것이다. 반역의 계절은 단지 한 사람의 행동이 일으키는 것보다는 훨씬 더 넓고 광범위하다. 그러나 그 계절에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들어서는 순간 불법자라는 중요한 인물이 하는 행동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불법자는 적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인 것 같다

대다수의 저자와 주석가는 “불법자”와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같은 의미로 취급한다. 예를 들어 샘 스톰스(Sam Storm)는 그가 쓴 ‘Kingdom Come’의 17장에 “성경적 종말론의 적그리스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 연구”(The Antichrist in Biblical Eschatology: A Study of 2 Thessalonians 2)라는 제목을 붙였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 그 구절에서 바울은 단지 “불법자”만을 언급한다. 그러나 신약학자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스톰스에게도 이 용어는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사도 요한이 유일하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2:18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린이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요한이 말하는 의미는 확실하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항상 우리 가운데에 거할 뿐 아니라 크고 마지막에 등장할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의 신비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동시에 또한 위대하고 전형적인 불법자가 미래에 올 것을 말하는 바울과 다르지 않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은 특정한 시대의 끝에만 나타날 사람에 대해 쓰고 있다. 불법자는 종말론적 인물이다.”[3]

이 두 용어가 다니엘서가 처음으로 소개하는 이야기, 마지막 때에 예언 단계를 성취하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항해서 싸우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묘사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니엘 7-10장에서 우리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인물을 만난다. 그는 요한이 적그리스도라고 지칭하고 바울이 불법자라고 지칭하는 사람이 가진 일종의 패턴 또는 “예증된 사례”라는 역할을 한다. 트렘퍼 롱맨 3세(Tremper Longman III)는 그의 다니엘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티오쿠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적그리스도로 이해하던 한 사람의 적절한 상징이 되었다.”[4]

다니엘서 7:25은 그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권세 아래에 놓일 것이다.”

삼 년 반 동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혀도 된다는 광범위한 허가를 받았고 그 기회를 끝까지 다 썼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유대 땅에 헬라식 휴일, 관습 및 법률을 부과함으로 유대 민족의 독특한 종교적 표현을 지우려고 했다. 실로 잔인하고 절박한 계절이었지만 결과는 26-28절에 예언된 그대로였다.

“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나 다니엘은 이 생각 때문에 고민하여, 얼굴색이 변하였지만,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다니엘 7:26-27)

그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언약 백성의 믿음을 말살시키려고 시도하던 중에 하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그의 왕국은 갑자기 붕괴했고, 그의 영토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통치할 성도들에게 넘어간다. 이것이 환상의 끝이다. 마태복음 24:14에 주어진 결말과 도무지 부정하지 못할 정도로 비슷하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로도 알려진 불법자는 다니엘서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통해서 확립한 패턴 그대로 삶과 망상과 타락이라는 단계를 그대로 이행한다.

적그리스도 또는 불법자는 현재 억제되고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2:7에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불법의 비밀이 벌써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억제하시는 분이 물러나실 때까지는, 그것을 억제하실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신비”라는 단어는 나중에 일어나고 나서야 명백해지는 사건, 현재에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고 숨겨진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따라서 바울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어떤 일이 결국에 가서는 훨씬 더 두드러지게 될 것이며 억제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훤히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악마는 항상 성육신을 자신의 조잡한 해석으로 훼손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그 수준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사탄의 모든 노력은 실패한다. 그는 자신이 준비한 주인공을 아직은 역사의 무대 중앙에 두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사탄의 노력으로 인한 영향력과 활동은 영적 눈을 뜬 사람의 눈에는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레고리 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은 비록 이 마귀가 아직 역사의 마지막 때에 그렇게 눈에 띄게 오지는 않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속이는 자들, 거짓 선생들을 통해 언약 공동체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5]

억제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지금 그것을 억제하는 자”의 정체는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6-7에서 바울은 말한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자가 지금은 억제당하고 있지만, 그의 때가 오면 나타날 것입니다. 불법의 비밀이 벌써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억제하시는 분이 물러나실 때까지는, 그것을 억제하실 것입니다.”

혼란이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성 및 남성 명사의 비정상적인 사용 때문이다. 6절에서 중성 단어를 사용한 바울이 7절에서는 남성 단어를 썼다. 당신은 “무엇”이 억제하는지 알고 있다. 현재 억제하고 있는 오로지 “그”만이 “그”가 사라질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억제할 것이다.

후자에 나오는 “그”가 진짜 “그”인가 아니면 “그것”인가? 그게 질문의 핵심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주석가가 구속자와 로마 제국을 동일시했다. 테르툴리아누스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는 제국 자체에 초점을 두는 경우에는 “그것”으로, 또는 통치하는 황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는 “그”로 언급할 수 있다고 이해했다. 현대의 주석가들도 보다 일반적인 의미이지만 동일한 견해를 채택한다. 로마 제국이 사라진 현재,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그것”을 정부로, “그”를 실제 지도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천사의 힘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다니엘서에서 감지된 유사점에 근거하는 경향이 있다. 다니엘 10장에서 우리는 영적 존재(일부는 천사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성육신한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를 만난다. 그는 또 다른 영적 존재에 의해 대적 되고 세 번째 영적 존재인 대천사 미카엘의 도움을 받는데, 그 결과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 지상과 천상의 영역에 걸쳐서 영향을 미친다. 다니엘 10:13-14은 이 신성한 존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기록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국의 천사장이 스무하루 동안 내 앞을 막았다. 내가 페르시아에 홀로 남아 있었으므로, 천사장 가운데 하나인 미가엘이 나를 도와주었다. 이제 내가 마지막 때에 네 백성에게 일어날 일을 깨닫게 해주려고 왔다. 이 환상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니엘서는 땅에서 발생하는 지정학적 현실이 어떤 면에서 영적 영역에까지 작동한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이 역학을 활용해서 우리는 데살로니가후서의 “그/그것”의 언어를 설명할 수 있다. 천사가 “그”일 수도 있고, 그가 활용하는 어떤 종류의 지상 계획, 공급 또는 능력이 “그것”일 수도 있다.

이건 가능한 해석이다.

그러나 가장 간단한 방법은 “지금 그것을 막는 자”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그는 가죽끈을 잡고 있다. 열고 닫는다. 그리고 그는 죽이기도 하고 살아나게도 한다. 그분은 다양한 대리인과 수단을 통해 일하시지만 완전하고도 전적인 주권자이다. 이사야서 마지막 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문제가 논의될 때, 하나님은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바로 내가 아이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낳게 할 수 없겠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아이를 낳게 하는 이가 나이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못 나오게 막겠느냐?” 너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사야 66:9)

흥미롭게도 9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ESV에서 “닫다”로 번역되었으며, 문자적으로는 “제지하다”를 의미한다. 히브리어 atzar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이사야 66:9에서 “내가 항상 자제해야 하는가?”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담긴 암묵적인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태를 완전히 여실 것이며 영원 전부터 계획되고 정하신 모든 것이 나올 것이다.

이 구절과 가장 가까운 신약 평행선인 디모데전서 6:14-15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정한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받으실 분이시요,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이 구절에서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주님의 날이 언제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분은 언제 예수님을 이 땅에 다시 보내실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는 타임라인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그의 백성들에게 굳이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그를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들 알고 있지?”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결과가 그게 아니었다면, 바울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사건의 시기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베드로후서 3:9)

베드로에 따르면, 계획이 이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무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모든 지연은 복음의 진보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올 것이다.

베드로는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자기가 받은 지혜를 따라서 여러분에게 편지한 바와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3:15)

베드로는 자신이 말하는 포인트가 바울 서신서 속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가정한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바울의 글은 데살로니가후서일 것이다.

억제는 결국 제거될 것이다

감람산 말씀의 예수, 데살로니가후서의 바울, 그리고 베드로후서의 베드로까지 예외 없이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모두 구원의 복음이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까지 전파하는 하나님 계획의 일환으로 하나님이 이 위대한 마지막 사건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말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관리 아래에 있다. 그 과업이 완수되면 억제가 풀리고 말세의 대투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마침내 끝이 올 것이다.

신약성경에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깊이 파고들라고 말하는 구절은 없다. 단지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그들이 기억해야 할 점은 자신들에게 위임된 사명이다. 사도행전 1장에서 승천 직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사도행전 1:6)

이건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나쁜 질문이 아니다. 구약의 독자로서 그리고 1세기 유대인으로서 제자들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묘사하신 산고의 궁극적인 지점을 모든 이방인을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재통일을 가져오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왕국에서 절정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한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에스겔 37장 마른 뼈들이 소생하는 환상 직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에스겔 37:16-17)

일단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수단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에 관해서 묻는 것은 큰 비약이 아니다. 오순절 날에 각지로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참석했다. 그들은 구원받았고 성령 충만을 입었다.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완전한 성취를 위한 시간표가 어느 시점에서도 제자들과 공유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시작을 엿볼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살아서 마지막까지 목격할 거라는 약속은 받지 못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불필요한 호기심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의 관심을 당면한 과제로 돌렸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7-8)

이스라엘 왕국의 재건을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일을 시작하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 천국 복음을 땅끝까지 가지고 나가라.

지금 논의에 적용해서 볼 때, 우리는 이 거대한 종말론적 사건의 시기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리고 아예 묻지 않는 게 좋다는 권고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의 무법하고 반항적이고 유혹적이며 선동적인 활동을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상 명령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복음을 들을 기회의 창을 열어 두신다는 사실이다. 그 일이 완성됨에 따라, 마귀의 사슬은 더 길어질 것이며 사탄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반역이라는 문이 열릴 것이다. 큰 환난과 박해, 체질의 계절이 시작되고, 그 후에야 비로소 끝이 올 것이다.

불법자가 성도들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기를 높일 것이다

우리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역사적 사례에 비추어 불법자가 그에게 주어진 확장된 허가 기간에 어떤 활동을 할지를 예상할 수 있다. 롱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티오쿠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적그리스도라고 아는 한 사람의 적절한 상징이 되었다.”[6]

다니엘서 7:25은 그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권세 아래에 놓일 것이다.”

삼 년 반 동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광범위한 허가를 받았고 그 기회를 끝까지 다 썼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유대 땅에 헬라식 휴일, 관습 및 법률을 부과하려고 했다. 아예 그들이 지켜온 삶의 방식을 지우려고 했다.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을 충성과 종교적 신앙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려고 시도했다. 다니엘 8:9-11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작은 뿔”이라고 언급한다.

“그 가운데의 하나에서 또 다른 뿔 하나가 작게 돋기 시작하였으나 남쪽과 동쪽과 영광스러운 땅 쪽으로 크게 뻗어 나갔다.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강해지더니, 그 군대와 별 가운데서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짓밟았다. 그것이 마치 하늘 군대를 주관하시는 분만큼이나 강해진 듯하더니, 그분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마저 없애 버리고, 그분의 성전도 파괴하였다.”

성경 본문은 안티오쿠스가 “지상 수준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하늘 그 자체, 심지어 하늘의 군대와도 전쟁을 벌일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리고 안티오쿠스가 마치 우주적 분쟁에서 라이벌이 되어서 겨루는 것처럼 보이는 하늘 군대를 주관하는 분은 누구인가? 이것은 주석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어떤 이들은 대천사 미가엘을,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영웅인 가브리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우리는 단지 아는 건, 영적 전쟁이 분명히 매우 치열하다는 사실이다. 노아의 때와 같이 지상과 천상의 영역 사이의 경계선이 흐려지고 잠시나마 그 결과는 불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데살로니가후서 2:4에 나오는 구절과 아주 잘 일치한다. 사도 바울은 불법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바울이 다니엘서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지막 때의 무법자에 대한 그의 묘사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역사적 현실에 크게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람산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위대한 마지막 사건의 시기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심어놓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마태복음 24:15-16)

예수님은 마치 다니엘 이야기가 반복되는 현실을 만난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는 거 같다. 산으로 도망가라!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

예수님 자신이 다니엘서 패턴의 반복을 하나의 방아쇠 사건, 특히 그가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그게 과연 무엇인지 호기심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다니엘은 이런 식의 표현을 8:13, 9:27, 11:31 그리고 12:11에 걸쳐서 총 네 번 사용한다. 이 표현은 그 자체만으로 해석이 어렵기에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몇 가지 추가 설명을 제공한다. 누가복음 21:20-22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이 군대에 포위당하는 것을 보거든, 그 도성의 파멸이 가까이 온 줄 알아라. 그때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고, 그 도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고, 산골에 있는 사람들은 그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아라. 그때가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징벌의 날들이기 때문이다.”

누가의 버전에서 예수님은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하기 시작할 때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도망가라! 위대한 복수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첫 번째 “큰 환난”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면, 마지막 “큰 환난”에도 동일한 접근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 따라서 마태복음 24:15-16에서 방아쇠 사건을 주시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적들에게 온통 둘러싸인 교회를 볼 때, 모두에게 미움받는 교회를 볼 때, 그리고 불법자가 교회의 목을 발로 누르며 마치 교회가 완전히 그의 손에 잡힌 것처럼 보일 때, 도망가라!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

이 모두는 데살로니가후서 2:4에서 바울이 불법자가 자신을 높이는 것에 대해 말할 때 필요한 모든 맥락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불법자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일어난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물론 물리적 의미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은 없다. 성전은 주후 70년에 이미 파괴되었는데, 지금 그런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그 부분에 있어서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가 도움이 된다. 그의 말이다.

“성전에 앉는 것은 신성한 속성이며, 따라서 자신에게 신성한 영예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7]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그렇게 이해한다. 프레드릭 F. 브루스(F. F. Bruce)는 이 표현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할 계획을 가진 그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8]

이 예언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실제로 물리적인 성전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데살로니가후서 외에 열 번 사용되었으며, 그중 무려 아홉 번은 기독교의 교회를 의미한다. 스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의 다른 곳, 특히 바울의 글에서 성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보면 이 단어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유일한 성전 이외의 것을 가리킬 수 없도록 만든다.”[9]

따라서 우리는 일단 적그리스도가 겉보기에는 교회를 완전히 자신의 권세 안에 두게 될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게 맞을 거 같다. 그는 우리의 목을 발로 누르기 시작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교회가 자신의 신성을 인정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그게 바로 방아쇠 사건이다.

그럴 때는 산으로 도망가야 한다. 모든 것의 끝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대배교와 불법자는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종말을 맞을 것이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잠시 동안 하늘의 군대와 경쟁하는 사건 속 인물로 나타났다. 그는 합리적으로 볼 때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고 또 놀라운 힘을 축적했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참혹한 종말을 맞았다. 다니엘 7:26-28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나 다니엘은 이 생각 때문에 고민하여, 얼굴색이 변하였지만,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그의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오만하고 불경스러운 원정을 벌이던 기원전 164년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갑작스럽게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가 왔다. 그리고 그는 허락받은 일을 했다. 그리고 죽었다.

“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다니엘 7:28)

이러한 패턴은 우리로 하여금 갑자기 나타난 말세의 불법자가 급속히 세력을 키우고 마귀의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다가 파국적으로 멸망할 것을 예상하게 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예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 같다.

“그 때에 불법자가 나타날 터인데, 주 [예수]께서 그 입김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고, 그 오시는 광경의 광채로 그를 멸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

그의 통치는 짧고 잔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끝은 갑작스럽고, 아무도 그의 패망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다니엘 7:27)

불법자의 출현이 비록 단기적으로는 끔찍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전조이다. 그가 휘두르는 잔인함과 공포의 통치는 최종적인 체질의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재림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정금처럼 단련하고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대망하는 아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끔찍한 산고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는 근심에 잠긴다. 진통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지금 너희가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16:20-22)

하나님께 감사하자!

원제: 10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the Great Apostasy


[1] 1.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4), 153.

[2] 2. G. K. Beale, The Temple and the Church’s Mission in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280.

[3] 3. Leon Morris, The First And Second Epistles To Thessalonians i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221.

[4] 4. Tremper Longman III, Daniel in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9), 209.

[5] 5. G. K. Beale, The Temple and the Church’s Mission in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287.

[6] 6. Tremper Longman III, Daniel in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9), 209.

[7] 7. Herman Ridderbos as cited in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4), 160.

[8] 8. F.F. Bruce, 1&2 Thessalonians in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Word Books, 1982), 169.

[9] 9. Sam Storms, Kingdom Come (Geanies House: Mentor, 2013), 530.

[복음기도신문]

Paul Carter | 폴 카터는 1994년부터 사역을 했다. Fellowship and Canadian Baptist churches를 섬겼고 지금은 Cornerstone Baptist Church의 대표목사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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