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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칼럼] 무슬림 복음 전도에서 한국교회가 알아야 할 질문과 답(5)

사진: Anis Coquelet on unsplash

밖에서 보는 이슬람(72)

Q-11. ‘수니시아무슬림들은 왜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나?

A-11. 무함마드 사후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를 가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분쟁은 수니파 무슬림들과 시아파 무슬림들을 영원한 원수로 만들어 버렸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탄생 배경

7세기 초 중동에서 시작한 이슬람교는 600여 년의 이슬람 제국(AD 632~1258) 시대를 거치면서 ‘수니’와 ‘시아’의 양대 종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두 종파 사이에서의 갈등과 충돌은 이 둘을 영원한 결별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두 종파는 서로 자기편 후계자를 세우기 위해서 상대편 지도자를 죽이는 끔찍한 살인극을 벌였으며, 결국, 이에 대한 사무친 원한과 보복 정신은 두 종파를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원수 사이로 만들었다.

수니시아의 단어적 의미

‘수니’라는 말 안에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인 ‘순나(Sunnah)를 따르는 자’라는 뜻이 있다. 한편, ‘시아’라는 말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 이후 존재했던 4명의 이른바, ‘정통’ 칼리프 시기 중 네 번째 칼리프인 ‘알리’를 따르는 자(Shi’at’ Ali)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직계 혈통 사촌이며, 동시에, 무함마드의 딸인 ‘파트마’와 결혼한 사위였다. 그러므로, 오직 ‘알리’만의 무함마드의 정통성을 이어야 한다고 시아파는 주장한다. 그러나, 수니파로서는 당연히 직계 혈통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편 지도자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시아파의 주장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수니파 무슬림들은 직계 혈통이 아니더라도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누구든지 선출에 따라서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이슬람교 안에서 종파별 인구 비율을 살펴보면, 수니파가 세계 무슬림 총인구의 85~90%를 차지하고, 시아파는 10~15%를 차지하는데, 이는 소수의 직계 혈통과 다수의 비 직계 혈통 사이에서의 당연한 결과이다.

두 종파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

두 종파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직계 혈통 칼리프인 ‘알리’와 그 후손만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있다. 물론, 시간이 가면서 두 종파 사이에는 교의적 차이까지 발생하면서 이제 둘은 같은 무슬림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는 영원한 평행선을 걷기 시작했다.

시아파 무슬림들에 따르면, ‘칼리프’라는 제도 자체가 잘못된 후계자 계승이라고 주장한다. 즉, 무함마드에서 ‘알리’로 직접 계승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후계자는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알라’로부터 선택된 신성한 빛을 받은 후계자여야 하는데, 그가 바로 ‘알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아파 무슬림들은 ‘칼리프’ 제도를 부인하면서 이 대신 ‘이맘’이라는 이름으로 후계자 제도로 맞서게 된다.

물론, 두 종파 모두 단일 신 ‘알라’를 향한 믿음만은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꾸란에 따라 이슬람을 믿고 따르는 모든 무슬림의 핵심 교리(doctrine) 중 하나가 바로 단일 신 ‘알라’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너희의 하나님은 한 분이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으며 그분은 은혜와 지혜로 충만하시니라.” (꾸란 2:163).

그러므로, 이슬람 안에서 수니파와 시아파의 구분은 신학적 견해 차이가 아니라, 후계자 자리를 놓고 서로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보는 것이 두 종파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수니파와 시아파 갈등의 뿌리

이슬람의 발생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온 두 종파 사이에서의 갈등과 충돌, 그리고, 무조건적 적대 감정의 깊은 뿌리는 역사의 사실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의 제4대 정통 칼리프 ‘알리’를 시작으로 당시 시아파의 모든 후계자가 수니파 무슬림들로부터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특히,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과 그의 모든 가족이 지금의 이라크 땅인, ‘까르발라’에서 당시 수니파 무슬림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A.D. 680)에서 정식으로 시아파가 시작되었으며, 두 종파가 다시는 합쳐질 수 없는 결정적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시아파 모든 무슬림은 이 역사적 비극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1,4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잊지 않고 해마다 이 사건을 추모하며, 그날의 슬픔을 되새기면서 수니파를 향해 복수를 다짐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 안에서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들 사이에서의 불편한 관계이며, 이런 역사의 비극에 대한 해결책이 적절히 제시되지 않는 한, 이슬람의 두 거대 종파의 화합과 평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Q-12. 이슬람의 지하드는 정말 거룩한 전쟁이란 뜻인가?

A-12. 원래 보이지 않는 영적 의미로 시작한 ‘지하드’라는 의미가 후에 일부 무슬림들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주면서 지금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지하드의 원래 의미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지하드(jihād)를 가리켜, 이슬람교의 신앙을 전파하거나 방어하기 위하여 벌이는 이교도와의 투쟁을 이르는 거룩한 전쟁(성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이슬람법에 따라 모든 무슬림 성년 남자는 의무적으로 이 지하드에 참가하여야 한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이는 근본주의 무슬림들의 견해만을 뒷받침해주는 잘못된 표현이다. 아랍어에서 ‘지하드’는 원래 노력이나 분투라는 의미이다. 꾸란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지하드는 신의 길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모든 무슬림이 겪게 되는 수많은 영적 어려움에 대한 자기의 보이지 않는 내면적 노력과 분투를 말한다. “알라의 길에서 ‘지하드’하라. 그 ‘지하드’는 알라의 권리이니라. 알라께서 너희를 선택하사 종교 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셨느니라.” (꾸란 22:78).

그러므로, 꾸란에서 가르치는 지하드는 폭력적 의미가 아니라 영적 의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슬람교 안에서 지하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생겨났다. 지하드는 먼저 개인적이고도 영적인 노력을 뜻한다. 자아의 극복, 영성의 성장, 옳은 길을 따르는 노력 등 개인적인 영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영적 지하드는 자기 개선과 종교적 적극성을 강조하며, 피로한 탐욕과 욕심을 극복하고 선한 행동을 장려한다.

또한, 사회적 의미에서는 사회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지하드를 수행하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억압된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지하드의 사회적 면이다.

한편, 군사적 측면에서도 지하드를 언급한다. 이슬람교에서는 자기방어를 목적으로 지하드를 수행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군사적 지하드는 합리적인 제약과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절대 무고한 시민이나 민간인을 포함한 비전투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은 금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하드는 오늘날 복합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폭력보다는 영적 성장과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데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꾸란 2장 190절에 “너희를 공격하는 알라의 적들에게 맞서 싸우되 먼저 공격하지 말라. 알라는 먼저 공격하는 자들을 사랑하지 아니하시니라.”라는 구절에 대해 한국이슬람교(KMF)의 해설을 보면, 이슬람에는 먼저 공격하는 것이 배제되어 있으나, 적이 선제공격해 올 경우는 방어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만 적들의 여성, 어린이, 노인, 허약자, 그리고, 나무나 곡식 등에는 피해를 주지 말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의 표현을 빌려서라도 지하드의 원래 뜻은 겉으로 드러나는 물리적 충돌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영적 의미가 훨씬 우선이었고, 이들은 이를 거룩한 전쟁(성전)이라고 불렀다. 이에 따라, 이슬람교를 가리켜 스스로 평화의 종교라는 무슬림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지하드는 사람들을 끔찍하게 살상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그들의 ‘꾸란’을 스스로 어기는 모순을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이런 지하드 개념에 반해, 성경 속 예수님은 아예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며, 한없이 나누며, 용서하며, 사랑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38~44).

지금도 지하드라는 이름으로 끔찍한 살인과 테러를 떳떳하게 자행하는 모든 무슬림 무자헤딘에게 외친다. 만약, 당신들이 규정한 ‘정의’라는 것을 폭력으로 정당화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서야 할 곳은 없다고.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국립 이스탄불대 역사학과 석사, 박사,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터키어권선교회(FOT)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전방개척선교(KJFM)’ 저널 편집인, 아신대(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1)무슬림 이해하기』 / (2022, 라비사북스). 『벌거벗은 세계사(경제편)』 공저/ (2023, 교보문고), 『밖에서 본 이슬람, (2)이슬람 이해하기(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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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칼럼] 무슬림 복음 전도에서 한국교회가 알아야 할 질문과 답(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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