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사역’ 또한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빼놓을 수 없는 유산이다. 영국 교회가 부흥할 때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레슬리 뉴비긴이 사역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의 영국 사회는 마치 이교도의 국가처럼 보였다. 쇠퇴하고 있는 영국 교회를 보면서, 뉴비긴은 교회가 신자들의 개인적 삶을 위한 내적 활동(성경공부와 기도 등)에 초점을 맞추어 훈련하고 있을 뿐, 공공 영역(정치, 예술, 사업 등)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살도록 훈련하지 못했다고 분석한다.[1]
팀 켈러도 직업이라는 영역이 신앙과 분리되는 시대정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전 시대에는 신자의 제자도와 훈련을 기도, 성경공부, 전도로 국한해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직장과 이웃과 학교에서 비기독교적 가치를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오늘날 선교적 교회는 신자들이 현저하게 비기독교적인 문화에 둘러싸여 있다. … 오늘날 문화는 신자들의 종교적 신념은 직장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신자들에게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그들이 직업을 수행하는 방식과 단절시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2]
신앙과 직업의 통합
이런 시대 속에서 직업과 신앙을 통합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교회의 사명으로 대두된다. 팀 켈러는 리디머 교회의 다섯 가지 중요한 영역 중 하나를 ‘세상 문화와 사람들을 연결하기’라고 명명하며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강조한다.
팀 켈러가 직업과 신앙을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계기가 있다. 리디머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됐을 때 한 유명한 탤런트가 예수님을 믿게 된 후 그에게 와서 이렇게 질문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이제 방송에서 연기할 때 제가 해야 하는 역할과 하지 말아야 할 역할이 있습니까? 화내야 하는 연기를 할 때 정말 화를 내야 합니까? 아니면 화내는 연기를 해야 합니까? 또 누군가와 연애하는 연기를 할 때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해야 합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연기를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을 들었을 때, 팀 켈러는 목회자로서 성도들의 현실의 문제에 어떤 해답을 줄 만큼 준비되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직업과 신앙의 통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여성 CEO 캐서린 알스도프와 함께 쓴 팀 켈러의 일과 영성, 그리고 다양한 직업에 관한 리디머 교회의 프로그램들이다.[3]
캐서린 알스도프도 팀 켈러의 설교에 매력을 느낀 이유의 하나가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일과 직장처럼 내게 대단히 중요해 보이는 영역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고백했다.[4]
오늘날 직업과 그 직업을 통해 이루고 싶은 욕망은 하나의 큰 우상으로 자리 잡았다. 피로사회의 저자인 한병철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는데 오늘날 시대는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의 시대이고 …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제하는 자유,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도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5]
이전 시대에는 공장장이 노동자를 착취했지만, 성과주의와 능력주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스스로 착취자가 되어서 더 많은 성과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음을 한병철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이전 시대보다 더 심각한 이유는 착취자가 동시에 피착취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 문화 속에서 신앙과 직업을 연결하지 못하면 신앙과 직업이 분리되는 이원론적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팀 켈러는 문화 속에 있는 우상들의 모순을 드러내어 성경 메시지와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목회자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설교자는 성경 메시지와 그 문화의 근본 신념들(그 안에 속한 사람들 눈에는 잘 안 보인다)을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아,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느낀 거였구나!’ 깨닫게 된다. … 사람들에게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을 향한 그들의 가장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6]
성경적 믿음이 일에 미치는 영향
1. 일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준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직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전문직일 경우에는 그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의사나 목사 등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사람들을 섬기는 노동을 한다고 생각해서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기 쉽다. 결국 자신의 직업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기술로 최고의 도시를 만들고 싶어 했고 단순히 살 곳을 마련하는 정도의 마음이 아니라 더 은밀하고 깊은 두 번째 의도가 숨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이름을 온 지면에 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최고의 기술을 통해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자신들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 이것이 인간 나라의 특징이다. 팀 켈러는 이 노동의 동기가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고 우리 삶 속에서 있는 문화 내러티브라고 규정한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노동의 동기는 바뀌지 않았다. 권력과 영예, 만사를 제 뜻대로 통제할 권한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 스스로 중요한 존재가 되려는 교만한 갈망은 필연적으로 경쟁과 분열,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는 삶이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일치와 사랑을 빚어내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그런 마음가짐은 스스로 숭배의 대상이 되든지 집단을 우상으로 삼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간다. 인류가 그토록 애타게 구하는 영광과 관계는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공존할 수 있다.[7]
자신의 일에 정체성을 둔 바벨탑이 무너졌듯이, 오늘날도 자신의 일에 정체성을 두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무너지게 된다.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성공에 이르렀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교만해지게 된다. 자신의 성취와 노력으로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노력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더 따뜻하게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친절한 행위까지도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해서라기보다 자신보다 못하기 때문에 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자선처럼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자신의 성취로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라는 교만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오직 은혜를 이해할 때만 그 교만을 버릴 수 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나의 노력이 아니라 그 노력까지도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성공이라는 덫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 은혜의 복음은 실패했을 때도 좌절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준다. 복음은 일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체성을 찾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2. 모든 일이 가치 있는 존엄한 일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다시 말해, 태초에 ‘일’이 있었다. 일과 노동은 타락한 세상의 고통이 아니라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의 역할을 주셨다. 결국 일과 노동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며,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다.
직업에 가치의 높낮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성경이 아니라 세상의 사고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세상에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 말한다. 오늘의 시대는 물질주의의 영향으로 지위가 낮거나 수입이 적은 일을 할 때 그 사람의 존엄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경비원, 가사도우미, 정원사 같은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을 업신여기는 사례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한다.
2017년 6월, 그리스의 환경미화원들이 재계약을 하지 못하면서 파업을 한 사건이 있었다. 열흘째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자 도시 곳곳에 악취가 심했고 관광 사업도 차질을 빚었다. 만약에 청소를 하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 전부 파업하거나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전 세계가 악취와 병균으로 들끓고 수많은 사람이 병원 신세를 져야 하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청소하는 노동자들을 존경하지 않고, 또 그들이 많은 보수를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직업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아름답게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고 존엄한 일이다. 루터는 “하나님은 소젖 짜는 여자아이의 일을 통해 친히 우유를 내고 계신다”고 말했다.[8]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존엄한 하나님의 일이며 이웃 사랑을 위한 실천의 장이다.[9]
3. 우리의 일을 탁월하게 행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모든 일이 존엄한 하나님의 일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어떤 일이든지 주님에게 하듯 해야 하며 탁월하게 일해야 한다. 탁월함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나 자신을 증명하려는 경쟁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감사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팀 켈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일하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아마도 그는 성경공부와 기도와 전도를 하라는 말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팀 켈러는 “일을 잘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일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 중 하나는 바로 일을 잘하는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총명한 목수를 대하는 걸 보면 보통 취하도록 술을 들이키지 말고, 여유 시간에 망나니짓을 하지 않으며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에 출석하라고 타이르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교회가 해주어야 할 얘기는 따로 있다. 신앙을 좇아 살려면 무엇보다 훌륭한 테이블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가르쳐야 한다.[10]
4. 믿는 자에게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비즈니스는 주로 ‘목적이 없는 수단’으로 표현된다. 현대인들은 브랜드를 통해 페르소나를 창출하고, 행복한 삶의 기준을 잘 되어 가는 것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반면 고대 문화는 성품과 용기, 겸손, 사랑, 정의라는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 규정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마케팅과 홍보는 단순히 상품을 사는 것 이상의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11]
회사에서 도덕적으로 너무 힘든 스트레스를 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팀 켈러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직장에서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있으십시오, 당신이 활용할 수 있는 기술과 관계를 사용하여 높이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 정직하게 올라가십시오, 그러나 정말 양심에 부딪히는 문제가 있으면 그때는 사직서를 쓰고 새롭게 창업하십시오.”
오늘날 사회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윤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둔다. 하지만 복음은 직장의 문화 속에서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한다. 겉보기에는 다른 회사와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복음이 기반이 된 회사는 고객들을 섬기고, 적대적인 관계와 착취가 없으며, 생산물의 탁월함과 품질을 강조하고, 설령 수익이 줄어들지라도 조직의 현장에서 일상적인 기업활동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골고루 미치는 윤리적인 환경을 갖추기 마련이다. 복음이 아닌 다른 직업관은 자신의 이윤과 이익에 따라 선택하게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더욱 윤리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며, 더 건강한 직업 환경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12]
5. 직업에 소망을 불어넣는다
직업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직업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낙관주의이며, 또 다른 오해는 내가 열심히 일해봤자 세상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생각하는 비관주의이다. 양극단을 오가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이상주의는 속삭인다. “일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고 영향을 끼치며 새로운 것들을 내놓으며 세상에 정의를 실현해야지!” 반면에 냉소주의는 비아냥거린다. “일한들 뭐가 변하겠어? 쓸데없는 희망을 품어선 안 돼, 그저 먹고 살 수 있으면 그만이지, 너무 공들이지 말라고 여건 되면 당장이라도 집어치워!”
이런 양극단을 배제하면서도 믿음으로 일하고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팀 켈러는 타락한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미래에 소망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팀 켈러는 먼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타락한 세상에서 일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사람들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가 많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해서 힘든 것이지 원하는 직업을 가지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직업이라는 정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만족시키는 자기만족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현대사회의 불안 요인은 개인주의라고 꼽는다. 개인주의를 근대 문명의 최고 업적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테일러는 말한다. “개인주의는 자기 자신의 삶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보다 광범위한 시야를 상실해 버렸다. … 개인주의의 어두운 면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의 초점 이동에 있다. 이를 통해 삶은 덤덤하게 되고 협소해진다. 우리의 삶은 갈수록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우리는 타인의 삶이나 사회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진다.”[13]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삶은 협소해지고 의미가 사라진다. 인생의 의미란 나 자신의 만족만을 추구할 때 오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말한다. 목사가 되고 싶었고 주위에서도 권유했다. 또한 열심히 목회해서 어느 정도 성공한 목회자가 되었지만, 돌아보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진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원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사람조차도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던 이상적인 삶을 직업에서 찾았다고 고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팀 켈러는 일과 영성 서문에서 톨킨의 니글의 이파리를 소개하고 있다. 화가인 니글은 하나의 이파리로 시작해서 큰 나무를 그린 후 그 나무 뒤로 마을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자신이 생각했던 나무를 그리지 못하고 고작 이파리 하나를 그렸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는 아직 못다 한 일들에 대해 아쉬워했다. 큰 꿈을 가졌지만, 그가 인생에서 이룬 것은 고작 이파리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니글은 아주 익숙한 곳을 만나게 된다. 그는 얼른 그리로 달려갔고 거기에는 늘 꿈꾸었던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 그의 나무가 완성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잎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지는 길게 자라서 바람에 나부꼈다. 자주 느끼거나 어림짐작으로 추측해 보았지만 좀처럼 포착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상태였다. 니글은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팔을 들어 활짝 벌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선물이야!”
자신은 이파리 하나를 그렸지만, 자신이 상상하던 그 나무가 천국에 있었던 것이다. 팀 켈러는 이곳의 소제목을 “There Really is a Tree”(정말로 그곳에 나무가 있다)라고 붙였다. 그리고 일과 영성의 원 제목은 “Every Good Endeavor”(모든 선한 수고)이다. 결국 모든 선한 수고에는 선물이 있다고 말한다. 팀 켈러는 니글의 이파리를 통해 우리에게 이 땅에서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비록 완전한 모습을 구현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지 못하지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세상이지만, 우리의 수고와 땀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팀 켈러는 이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완벽한 모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되라는 뜻이다.”
우리의 일을 통해 이 세상이 완전히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땅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완벽한 모델, 완벽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을지라도 우리 순종의 방향이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면 그 순종은 결국 천국에서 아름답게 완성될 것이다. 모든 선한 수고에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
이것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세상에서 우리가 땀 흘리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의미이다.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의 방향이 옳다면 그 이파리는 결국 천국에서 나무로 완성될 것이다. 실제로 그곳에 나무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성경적 믿음은 우리의 일터에 새로운 소망을 불어넣어 준다. 열매가 없어도 낙심하지 않는 천국의 소망을 주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인생의 순종은 천국에서 하나의 퍼즐 조각이 될 것이다. 하나의 퍼즐로만 보면 별로 이루지 못한 인생일지 모르지만,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완성되는 하나님의 큰 그림 속 하나의 퍼즐 조각으로 동참하게 되면 내 작은 인생이 하나님의 큰 역사의 작품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작은 인생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작품이 탄생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을 이루도록 동참시켜 주신다. 우리가 힘든 직장생활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천국에 가면 정말로 그곳에 나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늘도 힘겹게 직장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모델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가 저기 있다고 가리키는 나침반으로 이 땅을 살고 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세상이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먹을 밭의 소산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로하신다.
[1] 팀 켈러, 센터처치, 525.
[2] 센터처치, 690.
[3] 전재훈, 고상섭, 박두진,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277.
[4] 팀 켈러, 일과 영성, 12.
[5] 한병철, 피로사회. 27.
[6] 팀 켈러, 설교, 35.
[7] 일과 영성, 144.
[8] 일과 영성, 88.
[9]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293.
[10] 일과 영성, 94.
[11] 일과 영성, 184.
[12]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299.
[13]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사회, 13.
[복음기도신문]
고상섭 | 고상섭 목사는 영남신학대학교와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그사랑교회를 개척해 섬기고 있다. 팀 켈러 연구가로 알려져 있으며 CTC코리아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최근 공저한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를 출간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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