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세 번째 이야기(3): 막간(Interlude)
요한계시록에는 ‘막간'(幕間, Interlude) 이라는 특별한 장이 몇 개 있다. ‘막간’이란, “연극의 한 막이 끝나고 다음 막이 시작되기까지의 동안”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에 ‘막간’을 처음 사용한 본문은 7장에 등장한다. 요한은 ‘막간’이라고 하는 감추어진 히든 카드를 7장에서 사용한다.
요한계시록에 ‘막간’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비유적으로 “어떤 일을 잠깐 중단하거나 쉬는 시간”을 사용하는 의미와 ‘묵시’라고 하는 요한계시록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장르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막간은 글을 쓰는 저자의 문학적인 고도의 수법에 해당된다. 막간을 전략적으로 배치하여 고도의 긴장감(두려움)에서 누그려 뜨려, 한 순간의 쉼과 거기서 오는 새로운 통찰력을 얻고자 할 때 사용된다.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도 위기의 순간, 때때로 이런 막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필자도 이런 시간을 보냈고 요한계시록 강해를 쓰는 지금 이 시간도 이런 축복의 시간(고난)을 만나고 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글을 썼는데 ‘막간'(Interlude) 이라고 하는 히든 카드를 들어 올려야 할 상황이다. 극(drama) 으로 볼 때는 구성이 엉성할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때 아닌 초반에 취하여 긴장을 좀 늦추고 하늘을 보아야 할 위기 상황이다.
비지 땀을 흘려가며 순간 순간 기도하며 요한계시록에 대한 강의안을 쓰고 있다. 생각지도 않는 날에 내가 생각했던 시간보다는 빨리, 8월 첫 주부터 요한계시록 강해로 교회를 순회하게 됐다. 설레임과 두려움이 밀려온다. 이번 강해는 일차, 두 번 강해로 진행된다.
주님이 허락하신 요한계시록 첫 강의는 처음 1장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몇 장을 뛰어넘어 요한계시록 3:14-22에서 시작한다. “안약을 사서 바르라”는 처방전을 주님에게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계 3:18), 무엇보다 내게 먼저 실제가 되어 본문 말씀을 더 이해하라고, 주님이 상황을 이끌어 가신다.
“너가 먼저 받으라!” 주님이 통곡하신다. 은혜로 받으니 놀랍다. 눈이 침침하여 얼굴 안면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불편하다. 병원에 가는 일을 미루다 어제는 병원을 다녀왔다.
연구를 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와우, 요한계시록 공부하면, 사탄이 정말 좋아하지 않구나. 죽이려고 달려들겠구나! 정말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왜 이 책을 들었지? 제 정신이었나?! 내려놓고 싶은 유혹, 포기해야할 것 같은 생각, 두려움. 사탄이 자주 넣어 힘써 싸워 이겨야 할 상황이다. 워낙 깊이 있는 말씀이라 말씀 앞에 정말 두렵고 떨린다.
며칠 전에는 영적으로 진도가 나가지 않는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 하루 이틀을 끙끙 앓았다. 나는 규칙적으로 하루에 한 두 번 산책을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며칠 동안은 말씀을 가지고 씨름 하느라 시간을 놓쳤다.
영적인 싸움이 치열하다. 이것이 초반부에 히든 카드를 드는 이유다. 독자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하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다.
오늘 아침, 첫 강의안을 최종 주님의 은혜로 마쳤다. 더 어려운 두 번째 강의안, “영적전쟁, 진리 전쟁: 음흉한 신학이론”이 남아 있다. 제목만 보아도 굉장히 날카롭고 비평적이고 전쟁해야 할 분위기를 느낀다. 이번 주 마무리 해야 하는데 아직도 생각하고 집중하면서 쓰는 중이다.
지금 진리 전쟁을 하고 있구나,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하지만 거센 파도에 휩쓸려 사망의 골짜기를 지났던, 택한 백성 이스라엘 이야기를 담은 실제 그들의 종말론을 보게 되니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저려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어떤 때는 글을 쓰기가 어렵기도 하다.
진리의 영이 말씀을 깨닫게 한다. “진리는 외롭구나! 좁은 길이구나!” 진흙 탕 속에서도 보이지 않지만, 매장되어 죽은 것 같지만 진리의 생명의 물줄기가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을 보면서 너무 감격이 된다. 그들을 부둥켜 안고 내가 10여 년을 넘게 살았던 ”그 땅”(הארץ)을 생각하며 뒤 늦게 깨달은 진리 앞에 통회 하는 심정으로 계시록 마지막 말씀을 외친다.
“하아돈 예수아”(הָאָדוֹן יֵשׁוּעַ)
“보아 나!”(בואה נא)
“보아 나!”(בואה נא)
“주 예수여, 하루라도 속히 어서 오소서!”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아래의 두 권의 책이다. 이 두 권의 책을 읽는 이유는 어디서 음흉한 신학 이론이 파고 들었으며 여기에 대해 신실하게 주님을 따랐던 이들은 어떻게 태도를 보였는가에 대해서 알고 싶기 때문이다.
조엘 비크& 마크 존스 / “청교도 신학의 종말론” (A Puritan Theology, 2012)
그는 청교도 신학의 종말론에 대해 7부에서 중요한 내용을 다루었다.
윌리엄 왓슨 / “청교도 시대의 종말론” (2015)
왓슨은 우리에게 “청교도 시대의 종말론”이라는 책을 써서 값진 재산을 물려주었다. 원 제목은 “Dispensationalism before Darby(다비 이전의 세대주의)” 이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보고 공부를 하노라면 “와우, 주님이 하셨다!” 이렇게 영혼의 목메인 소리로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던 학설이 뒤집어지기 때문이다. 전천년설은 1800년대 초기에 다비에 의해 나타났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귀로 동냥하여 주워들은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는 무지한 태도에 회개를 주님은 내게 요구 하신다.
두 번째 책은 요한계시록과 종말론에 대해서 4년 동안 저자가 일 차 자료만 읽고, 그리고 나서 글을 쓰는 작업을 시도한 책이다. 대단한 책이다. 나는 고작 6개월 일차 자료만 읽었는데 상대도 되지 않고 너무 부끄러울 뿐이다. 복음기도신문에 기고하는 글이 늦어질 것 같기도 하다.
당시에 요한계시록을 전천년설에 따라 강해를 하거나 설교를 한다는 것은 천만 위험한 일이었음을 보게 되었다. 돌아오는 것은 조롱과 핍박이었다. 계시록에 천년은 저 먼 이야기라는 사람들이 주름을 잡고 있었을 때 오래전부터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선포한다는 것은 복음에 미친 사람만이 했다니, 순교를 각오했겠구나! 실제 처형을 했으니 말이다. 성경, 진리의 말씀을 강해 하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다. 적대자들이 하는 말, “처음에는 제 정신에서 시작했어도 나올 때는 정신분열을 일으킬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니 오호라!
갈 길이 먼 길을 잠시 내려놓고 막간이라는 시간에 생각해 본다. 난 얼마나 편한 곳에서 핍박 없는 곳에서 요한계시록 강해를 쓰고 있는가! [복음기도신문]
김명호 | 헤브론선교대학교 성경언어대학 교수. 복음과 기도의 기초 위에 성경의 원어 연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선교완성을 위한 다음세대를 세우는 사역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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