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투약·환각 장면 담은 콘텐츠 속속 등장…”약물 경각심 무뎌질 우려 커”
성인 10명 중 8명 “마약용어 상업적 사용이 위험성 인식 낮춰”
직장인 이 모(40) 씨는 최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유산균 분말 가루를 종이 위에 뿌려 놓고 코로 들이마시는 장난을 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씨가 자녀에게 “어디서 봤냐”고 묻자, 아이는 “드라마와 웹툰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고 흉내 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씨는 “잘못된 행동이라고 엄하게 얘기하고, 따라 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설명해줬다”며 “다행히 앞으로는 이런 장난은 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에는 급우 사이에서 유행이라며 ‘코카인 댄스’를 춘 적도 있었다”며 “가치관이 아직 확실히 세워지지 않은 시기인 아이들이 마약을 가볍게 여기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청소년 마약이 사회적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10대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웹툰이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등에서 약물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젊은 연령대가 즐겨보는 인기 콘텐츠인 만큼 단순히 흥미성으로 접근할 경우, 청소년의 호기심을 유발해 마약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출 수 있다는 지적이다.
◇ 마약 투약이나 암거래를 소재로…웹툰·드라마 속속 등장
한 유명 웹툰 사이트에서 주말에 연재 중인 인기 웹툰의 경우, 등장인물이 마약 투약을 하는 장면이 여러 회차에 걸쳐 그려진다. ’15세 이용가’인 이 작품에는 불법 약물을 제조하는 과정과 환각 증상 등도 세세하게 나온다.
이 밖에 마약 거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조직 간의 갈등을 다루거나, 약물 중독에 빠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웹툰도 청소년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마약을 소재로 삼은 드라마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말 넷플릭스에서 공개돼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온 ‘더 글로리’의 경우, 마약 중독자로 나온 이사라(김히어라 분)가 약물을 투약하는 장면을 비롯해 환각 증상, 금단 현상까지 드라마 속에서 묘사했다.
앞서 마약 운반을 하는 10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 ‘소년비행’이 또 다른 OTT 채널을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이처럼 ‘수리남’이나 ‘카지노’ 등 마약을 다룬 콘텐츠 대부분이 폭력성이나 약물 모방위험을 이유로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드라마 전체 내용을 1시간 정도로 요약해 리뷰하는 유튜브 콘텐츠를 통해 청소년들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신모(40) 씨는 “아이가 유튜브로 드라마 속 약물 투약이나 환각 장면 등을 여과 없이 시청하면서 마약을 가볍게 여기진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청소년 마약 근절 및 예방 대책 토론회에서 국민의힘 이태규 의원은 “약물의 위험성을 알리진 않고 재미로만 접근하는 드라마가 늘고, 연예인의 잦은 마약 논란이 청소년들에게 마약에 대한 경각심을 누그러뜨리는 게 아닌가 싶다”고 지적했다.
◇ “마약김밥”, “코카인댄스”…일상 속 스며든 마약용어들
대중문화 콘텐츠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마약 용어가 무분별하게 오르내리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실제로 통합식품안전정보망을 통해 분석한 결과, 마약 등의 용어를 업소명으로 사용하는 식품접객업소는 250여개소로 나타났다. ‘마약 떡볶이’나 ‘마약 김밥’, ‘마약 곱창’ 등 청소년이 즐겨 먹는 음식이 대부분이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마약을 식품 등에 수식어로 쓸 때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맛있는 맛’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며 “약물 중독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이것을 마케팅에 사용할 때 더욱 엄격한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마약류 중독자 치료보호기관인 인천참사랑병원의 이계성 원장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광고나 드라마에 술·담배 장면이 자연스럽게 노출됐다”며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면서 이제 그런 모습이 보기 힘들어졌지만, 이제는 그 자리를 마약이 채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원장은 “마약이 TV나 일상에서 종종 노출되거나, 이에 긍정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건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며 “적어도 아이들이 자주 접하는 콘텐츠라도 마약 장면을 술·담배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규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전국의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마약용어의 상업적 사용이 마약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을 저해시킨다’고 생각한 비율은 78.0%에 이르렀다.
◇ 마약 유해성 알리고, 미화하는 장면 피해야
전문가들은 청소년을 마약으로부터 보호하고,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대중문화나 일상에서 약물을 소재로 다룰 때 지금보다 훨씬 신중해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마약을 가볍게 다루다 보면 이에 대한 아이들의 경각심이 무뎌질 수밖에 없다”며 “웹툰의 경우, 작품이 시작하기 전이나 해당 장면에 경고성 문구를 넣는 것을 필수화하고, 이를 지키지 않은 작품은 광고를 게재하지 못하게 하는 등 제재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당 웹툰 사이트 운영 관계자는 “아동청소년보호법에 위반되지 않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세운 청소년유해매체물 가이드라인에 따라 콘텐츠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약을 소재로 다루면서 문제가 된 웹툰에 대해서는 “올 초에 같은 내용으로 웹툰자율규제위원회에 민원이 들어갔다”며 “자율규제위 검토 결과, 15세 이용가로 연령 등급을 유지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설명했다.
마약 용어를 식품이나 상호에 쓰는 것을 막는 ‘식품 등의 표시ㆍ광고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도 최근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해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을 앞두고 있다.
개정안에는 식약처장과 지자체장이 식당 업주 등에게 마약을 쓰지 않도록 권고하고, 권고에 따른 이에게는 비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법안을 발의한 국민의힘 백종헌 의원은 “마약에 ‘한 번’은 없기 때문에 관련 용어를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제한해야 한다”며 “관계부처와 함께 관련 캠페인과 교육 등을 통한 자율규제 방안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이항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이사는 “마약 용어가 긍정적인 의미로 곳곳에 쓰이고 있다”며 “이 때문에 앞으로 마약의 유혹에 맞닥뜨릴 청소년이 거부감이 아닌 호기심을 가질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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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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