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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세계관으로 바라본 트랜스휴머니즘

▲ 인공지능 로봇. 사진: Andrea De Santis on unsplash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인 트랜스휴머니즘이 결국 인류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고 밝힌 마크 레그의 데니슨포럼의 기고문을 번역, 소개한다. <편집자>

공상과학 소설은 아주 끔찍한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적 미래를 동시에 그려내며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때로는 수천 년 후의 미래를 그려낸다. 종종 트랜스휴머니즘 개념이 포함되기도 한다. 나도 공상과학 소설을 조금 써봤고, 많은 대가의 작품을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로는 허버트 스펜서, 필립 K. 딕, 류츠신, 오슨 스콧 카드, 쥘 베른이 있다.

하지만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파운데이션과 지구》는 그의 장편 시리즈물 중 후기에 쓰인 책 중 하나로, 이 책에서 우주 여행자는 고립된 행성 공동체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그는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문명을 발견하게 된다. 로봇 노예 군대를 거느린 이곳 사람들은 극도로 개인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며 자웅동체이다. 다른 행성은 동식물과 교감하는, 즉 식물과 동물을 아우르는 융합된 의식을 지닌 모습으로 진화한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행성은 인류의 미래에 대해 초공동체적 또는 초개인주의적이라는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하며, 수천 년 후의 미래의 모습을 상상한다.

특별히 뛰어난 작품으로 찬사를 받지는 못했지만, 《파운데이션과 지구》는 수년 전 트랜스휴머니즘을 해체하려는 나의 지적 열망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이러한 상상은 터무니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현재의 발전 속도라면 수만 년이 지나면 실현될 수도 있지 않을까?

다가오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위험성

지난주 독일의 한 루터 교회에서 디지털 아바타를 사용하는 인공 지능 목사가 40분 동안 예배를 진행했다. 챗지피티(ChatGPT)와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 인공 지능은 여러 분야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인공 지능, 그리고 이와 유사한 기술은 인류의 미래에 관한 심오한 질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애플(Apple)은 최근 실제 주변 환경에 디지털 이미지를 겹쳐서 볼 수 있는 최초의 증강 현실 헤드셋인 비전 프로(Vision Pro)를 출시했다. 비전 프로는 비싸지만 메타 퀘스트 프로보다 훨씬 더 잘 작동하는 것 같다. 메타의 메타버스를 담당하는 앤드류 보스워스는 가상현실이 “우리가 집을 나서는 모든 이유”를 만족시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가상현실 기술이 저렴해지면 우리는 더욱 손쉽게 몰입감 넘치는 오락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몰입감 있는 탈출구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할까?

또는 유전공학을 통해 부모가 자녀의 형질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키가 큰 양손잡이 농구선수를 원하는가? 문제없다. 이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디자이너 아기”라고 한다. 어느 정도 수준에서는 이미 아기를 디자인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회사에서는 배아의 유전적 특성을 검사하여 질병에 걸릴 위험이 크거나 원치 않는 형질을 가진 배아는 버린 다음 체외 수정을 통해 더 적합한 배아를 이식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뛰어난 사람을 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복제는 불법이지만 이론적으로 복제는 거의 실현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한 회사가 인공 자궁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데, 이는 성관계나 임신 없이도 아이를 배고 출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다. 그렇다면 결혼은 누구에게 필요할까? 국가가 우리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까?

목적 의식이 사라진 채 우울하거나 외로움을 느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약물을 합성하여 뇌에서 완벽하게 행복한 화학 작용이 일어나게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한 미래는 바로 이런 모습이다.

이런 식의 디스토피아적 현실은 끝이 없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기술의 진보는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트랜스휴머니즘이란 무엇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 운명에 관한 이야기와 어떻게 부합할까?

트랜스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트랜스휴머니즘을 “유전공학, 냉동공학, 인공지능, 나노기술과 같은 최신 및 신기술 적용을 통해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철학적, 과학적 운동”으로 정의한다.

트랜스휴머니즘과 트랜스젠더주의는 동일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지만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접두사 트랜스(trans)는 “대륙 횡단(transcontinental)”이라는 단어에서처럼 건너편 또는 그 너머를 의미한다. 휴머니즘은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철학적 신념으로, 신이나 다른 영적인 도움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처럼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타고난 능력을 뛰어넘는 향상을 통해 인간이라는 종의 발전 가능성을 찾는다. 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의 차이에 대해 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때때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포스트휴먼”의 가능성을 믿기도 한다. 트랜스휴먼(초인류)은 잠재력이 향상된 중간 단계로, 현재의 모습과 완전히 구별할 수 없는 포스트휴먼으로 가는 경계를 넘나드는 단계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트랜스휴머니즘은 잠재력 향상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인류로 ‘넘어가는’ 운동이며, 트랜스휴머니즘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학자나 일반인은 거의 없지만, 트랜스휴머니즘은 계몽주의, 자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세속적이고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일수록 트랜스휴머니즘이 기본 세계관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트랜스휴머니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트랜스휴머니즘은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기술이 인간을 덜 인간답게 만들수록 우리는 현실에서 더 멀어지고, 컴퓨터에 더 의존하고, IT 기업과 정부에 더 의존하게 되며, 죄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될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 비전은 많다:

– 정부 기관이 해로운 글을 읽지 못하도록 증강 현실 콘택트렌즈를 착용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 컴퓨터에 업로드된 의식은 육체가 없는 형태로 갇혀 인식할 수 있는 감각 없이 고문당할 수도 있다.

– 부유하고 능력이 뛰어난 유전적으로 강화된 인간으로 구성된 슈퍼 종족이 업무처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1등과 2등 시민 계급을 만들어 광범위한 억압을 초래할 수 있다.

– 슈퍼 인공지능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을 감금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시행할 수 있다.

– 인공지능을 통해 경찰은 누가 범죄를 저지를지 예측하고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체포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미디어에서 많이 다뤄졌기 때문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는 어떠할까?

트랜스휴머니즘은 마치 끓는 물 속의 개구리와 같아서 위험하다. 우리는 이미 본질적으로 스마트폰을 트랜스휴머니즘을 구현하는 도구처럼 사용하고 있다. 필자의 예전 철학 교수님은 스마트폰을 “제2의 뇌”라고 말하곤 했다.

인간성을 잃으면서 우리가 얻는 것이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축적된 기술 발전을 통해 일종의 자생적 진화를 통한 구원을 추구한다. 어떤 의미에서 트랜스휴머니즘은 휴대폰, 인터넷, 소셜 미디어, 유전공학, 인공지능 등 최신기술 발전의 지속적인 성장을 상상하는 것일 뿐이다.

현재의 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우리는 몇백 년 후에는 더 이상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본성의 본질적 한계를 뛰어넘어 ‘트랜스 인간(초 인류)’이 될 것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트랜스휴머니즘은 일종의 신앙이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한다. 향상된 인류의 미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것이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거의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또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세 가지 세속적 믿음

영적이지 않은 사람,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는 인류의 상태와 미래에 대해 전혀 견해를 밝히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면 세 가지 입장 중 하나를 취한다고 말할 수 있다.

1. 냉소적 접근 방식은 인간은 운명적으로 현재의 상태에 처해 있다고 믿는다. 죽음이나 악과 같은 한계와 실존적 질문에는 아무런 해답도 제시할 수 없다. 인류는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인 기껏해야 수십만 년을 살다가 태양의 붕괴와 함께 멸망할 것이다. 기후 변화, 핵전쟁 또는 다른 원인으로 인해 인류는 가까운 미래에 멸종할 가능성이 더 크다. 우주는 이성이나 도덕성이 없는 차갑고 무정한 곳이다.

2. 인본주의적 접근 방식은 17세기와 18세기에 번성했다. 인본주의 사고방식은 인류가 유토피아로 나아갈 수 있는 충분한 천재성과 근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예술, 문학, 지성, 정치, 과학, 교육이 융합되어 완벽에 가까운 미래 문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3. 트랜스휴머니즘 접근 방식은 과학기술이 인간을 인간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트랜스휴머니즘이 휴머니즘에서 출발하는 이유는 인류가 지금과 같은 유토피아를 달성하기에는 너무 결함이 많으므로 기술 개발을 통해 유토피아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유전공학, 뇌 임플란트, 약물 등을 통해 인류는 현재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가정에 정치적 신념을 더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철학의 근간에는 국가가 민주적이든 그렇지 않든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괴짜 개발자이자 억만장자인 일론 머스크는 트랜스휴머니즘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며, 자신이 믿는 바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는 스페이스X(SpaceX), 오픈AI(ChatGPT를 만든 회사), X.AI, 테슬라(Tesla), 트위터(Twitter), 뉴럴링크(Neuralink)의 설립자 또는 대표이다. 특히, 뉴럴링크는 인간이 인공 지능과 결합하여 특정 뇌 질환을 치료하고 기억력 등의 향상을 통해 인간의 잠재력을 향상할 수 있는 뇌 임플란트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뉴럴링크는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며, 웹사이트에 환자 등록을 신청할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실존적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개선을 통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트랜스휴머니즘의 주장이 가져올 수 있는 임박한 문제들, 즉 무분별한 의학적, 과학적 ‘성장’이 가져올 수 있는 득보다는 실을 초래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논의해 보겠다.

먼저 트랜스휴머니즘의 철학적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트랜스휴머니즘을 통한 구원? 트랜스휴머니즘이 직면한 세 가지 문제

트랜스휴머니즘을 믿는 사람이 극소수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일종의 세속 종교로 세 가지 주요 장애물을 직면하고 있다.

1. 트랜스휴머니즘은 엄청난 현실적 장벽에 직면해 있다.

대부분의 트랜스휴머니스트와 일반 학자들도 이러한 한계를 인정한다. 저명한 트랜스휴머니스트이자 옥스퍼드 교수인 닉 보스트롬 박사는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적 낙관주의를 전제하지는 않는다”라며 기술이 “막대한 해를 끼칠 수 있다”라고 인정한다. 머스크는 또한 AI가 인류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인류가 기술적 장애물을 극복하여 궁극적으로 “일반 인공 지능” 또는 “슈퍼 인공 지능”을 만들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소위 “정렬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인공 지능 시스템이 인간의 의도나 가치와 일치하도록 조정하는 프로세스를 말한다.

예를 들어 암을 제거하도록 슈퍼 인공 지능을 프로그래밍 한다고 가정해 보자. 인공 지능은 살아있는 모든 인간과 동물을 죽이는 것이 그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인간은 원래 컴퓨터처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인공 지능이 지시를 엄격하게 따름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놀랍게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 때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가까운 예로 소셜 미디어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을 연결하고 하나로 모으기 위해 고안된 기술이 결국 분열과 외로움의 쓰나미를 일으켰다.

따라서 트랜스휴머니즘 기술이 개발되더라도 그 활용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매우 불확실하고 최악의 경우 끔찍할 정도로 위험할 수 있다. 인간은 기술이 불러올 미래를 예측하는 데 서투르다. 이것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직면한 첫 번째 주요 장애물이다.

2. 트랜스휴머니즘은 도덕적 가치를 확립할 수 없다.

객관적인 도덕의 원천이 없는 다른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기술주의 사회는 가치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기술을 추구하다 보면 무엇을 희생하게 될까?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트랜스휴먼(초인류) 운동이 정부가 뇌 임플란트를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는 디스토피아적 상황은 피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기술이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이나 문화가 기술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터넷이나 전화 없이 경쟁력 있는 일자리를 얻으려고 노력해 보자. 타자기로 프리랜서 작가가 되거나, 잉크 펜으로 파피루스를 쓸 것이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기술에 영향을 미치는 것만큼이나 기술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목이 쉬도록 이야기할 것이다. 기술은 종종 우리가 시작했지만 멈출 수 없는 폭주하는 기차와 같다.

3. 트랜스휴머니즘이 우리의 능력을 향상하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두려움, 교만, 부도덕, 분노, 탄압, 불법 등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인간의 문제들은 어떤가? 휴머니즘과 마찬가지로 이 이데올로기도 선한 것을 외면하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고치기 힘든 저주를 직면하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의 비전에 따르면, 인간은 기껏해야 수천 년 동안 매우 똑똑하고 극도의 감각적 자극을 받으면서도 분별력, 인격, 선행, 정의, 도덕성, 심지어 행복까지 결여된 채 살게 될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보여준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일반적인 관점에서도 트랜스휴머니즘을 약화한다.

하지만 성경은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팍스 로마나와 신의 도시

세상의 이데올로기는 종종 그 목표와는 정반대의 씁쓸하고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는다.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적 불평등과 계급을 없애려 했지만, 이를 시행한 국가들은 가장 큰 불평등을 야기했다. 독재주의 엘리트들이 부와 부패 위에 군림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시장을 민주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에서 대기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대 독점 기업이 되어 강력한 로비 그룹을 만들어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광고를 통해 우리의 욕망을 흔들기도 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우리의 삶을 연장하고 풍요롭게 하길 원하지만, 결국 죽음과 공허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도시와 제국에 대한 성경의 분석과 일치한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타락한다. 우리는 사회를 평화와 정의와 관용으로 이끌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지만, 그리스도 외에 어떤 정치 체제나 이데올로기에 희망을 둘 수 없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로마 황제 숭배와 로마 통치를 통한 평화를 추구하는 팍스 로마나였다. 세계 평화를 실현한다는 원대하고 고상한 목표는 적어도 그때부터 존재해 왔다. 평화는 거의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가치이지만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로마는 잘 건설된 도로, 콘크리트, 수로, 하수도 시스템, 첨단 전쟁 무기, 안정적인 화폐 등 뛰어난 기술을 도입했다.

1세기 기독교인이라면 일반적인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이러한 업적을 부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과 부를 누릴 것처럼 보였다. 예수님은 헤롯의 궁전 그늘 밑에 서 계셨을 것이다. 이러한 눈부신 발전 앞에서 로마가 세계 평화의 꿈을 이룰 가능성을 부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로마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정복과 노예제,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을 이용했다. 금욕적인 철학자이자 강력한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평화만을 원했지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끄는 등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 일을 했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오늘날도 이와 유사하다.

알고리즘은 이미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온라인 콘텐츠에 중독되게 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우리의 삶이 휴대전화, 자동차, 이어폰과 얽히면서 우리는 이미 트랜스휴머니즘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는 증강 현실로 나아가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으로 가는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지난 세기 동안 영아 사망률과 기아가 매우 감소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세기 로마 시대 이후 기대 수명은 25세에서 75세로 거의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우리는 달 위를 걸었다. 몇 가지 주요 질병을 퇴치했다. 운이 좋다면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거나 혹은 더 나아질 것으로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화성을 식민지화 하거나 암을 치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죄가 갑자기 사라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증강 현실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200살까지 산다고 해도 죽음과 죄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깨어짐은 지속될 것이다.

영아 사망률이 줄어든 자리를 대신에 우리 사회는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했다. (참고로 로마 시대에는 영아 살해가 흔했다). 우리 사회는 “죽음 운동”을 장려한다. 자살과 정신 건강 문제가 증가하고 있다.

우리의 연약함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28-31).

실제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고 말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한 발짝 물러서서 그 토대에 균열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너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창세기 3장은 최초의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뱀과 대화를 나누고, 뱀은 하와를 속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게 하고, 뱀은 하와에게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죄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인간은 피조물을 돌보고, 평화롭게 다스리고, 동물의 이름을 짓고, 하나님 중심의 문화와 가정을 창조함으로써, 즉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미니 통치자 역할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 반영해야 했지만, 우리는 불순종했다. 대신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선악의 판단을 우리에게 맡겼다. 많은 죄를 지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의 경우, 우리는 선과 악, 최고와 최악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따라 우리 자신을 재구성하면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다. 나중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온 땅은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세기 11:4)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단결했다. 그들은 기술(벽돌)을 통해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하늘에 닿기를 원했다.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우스운가! 너희는 결코 하늘에 닿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이것은 그들이 할 일의 시작일 뿐이요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라고 (6절) 말씀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흩어져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했다. 인간이 스스로 위대해지기 위해 기술을 중심으로 뭉치면 바벨탑처럼 웅장한 일을 이룰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죄악된 결과를 초래한다. 이 이야기에서 주님은 그들의 이기적인 목표를 막으셨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갖추었다. 필요한 것이 모두 있는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함께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비추는 목적을 성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죄 없는 삶을 살기 위해 개선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지금도 그러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이다(골 1:15). 뇌 이식이나 다른 기술적 개선 없이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충만함”은 그분 안에 거하였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는 죄의 저주에서 벗어난 새로운 몸과 마음이 필요하지만, 에덴의 완전함을 뛰어넘는 몸과 마음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새 몸이 어떤 식으로든 아담과 하와의 몸을 능가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 우리는 죄의 속박과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의학은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기독교인도 약을 먹거나 수술받아도 될까?

트랜스휴머니즘과 의료 윤리

철학, 특히 고대 및 중세 철학에서 “결핍”은 그 유형에 필수적인 중요한 특징이 결여된 것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새는 커피잔은 액체를 담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커피잔이다 (물론 머그잔의 본질적인 특성은 “액체를 담는” 것이다). 그러나 머그잔을 녹여 재떨이와 같은 다른 물건으로 만들면 더 이상 머그잔이 아니다. 정확히 언제 어떤 것이 다른 것이 되는지는 철학에서 오래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로, 흔히 “모호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곤 한다.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은 두 팔과 두 다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신체 절단 환자도 여전히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학은 일반적으로 결핍을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질병, 청력 상실, 골절, 베인 상처, 장기 기능 부전 및 기타 수많은 질병은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의학이 자연적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인간의 능력을 향상하고자 할 때 의학은 선을 넘는다. 이것이 모든 의료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체외 수정, 낙태, 유전자 조작, 성전환 등 다른 분야에서도 생명윤리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이슈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글을 썼다. 트위터의 기고가인 잭슨 맥니즈는 다양한 생명윤리 문제에 대해 훌륭한 글을 써왔다.

이 모든 것이 트랜스휴머니즘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트랜스휴머니즘과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주의는 인간의 본성은 가변적이며, 개인적인 목적이 생물학적 목적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트랜스젠더가 기술이 인류의 실존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둘 다 비슷한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른 예로 최근 개발된 유전자 편집 기술인 크리스퍼(CRISPR) 기술을 생각해 보자. 의료 윤리학을 전공한 짐 데니슨 박사는 암 환자를 돕고 다른 유전 질환을 퇴치하기 위해 크리스퍼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크리스퍼 기술은 형질 전환이 가능한 유전자, 즉 자녀에게 전달될 수 있는 유전자를 편집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퍼 기술은 트랜스휴머니즘을 발전시키고 부부가 자녀의 형질을 선택할 수 있는 ‘디자이너 아기’를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기술의 한 예이다.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크리스퍼 기술이 사용할 수도 있다. 유전자 편집의 모호한 영역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다운 증후군을 “치료”하는 것이다.

따라서 크리스퍼 기술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흑백논쟁처럼 보일 수 있지만, 도덕적으로 모호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의학이 치료를 도와야 한다는 경험을 통해 얻은 일반 법칙은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불안전한 주장에 대한 보루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치료가 필요하지 않도록 총체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죽음과 질병을 마주할 때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버팀목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고 에덴의 축복과 풍요로운 삶을 위해 노력할 수 있게 도와준다.

기독교인들은 음모론을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인 대부분은 트랜스휴머니즘을 반대하는 데 동의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시류를 따르지 않기로 할 때도 사탄은 절망이나 두려움으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부 기독교인들이 백신이 “짐승의 표”이고, 백신을 통해 피부에 “칩”을 심는다는 음모에 대해 느끼는 공포이다. 이는 잘못된 성경 해석에 근거한 것으로 백신에 마이크로칩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부가 당신을 추적할 수 있는 추적 칩은 당신이 소지하고 있는 기기, 즉 휴대전화에 이미 있는 것이므로 다른 음모가 필요 없다.)

이러한 공포는 비이성적이고, 기독교인답지 않은 행동이다.

요한계시록은 거짓 교사들에 의해 공포를 조장하는 용도로 악용됐지만,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핍박받는 교회에 확신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주신 심판의 날에 대한 환상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소망과 평안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과 그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 맞다, 팍스 로마나 또는 트랜스휴머니즘과 같은 이데올로기는 절대 아니다.

물론 크리스천이라면 뇌 이식 수술이 현명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거의 확실하게, 그 길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현명하지 않다.) 요한계시록의 구절이 모호하다면 모호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면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든 짐승의 표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데도 ‘666’의 그림자에 현혹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이 숫자가 기독교인을 악랄하게 박해했던 로마의 사악한 통치자 네로 황제를 가리키는 문자일 수 있다고 믿는다. (참고로 가장 초기의 사본에는 666이 아니라 ‘616’이라고 적혀 있다).

음모론을 가려내는 방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렉스 존스는 샌디 훅 총격 사건의 유족에게 10억 달러에 가까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음모론적 사고의 문제점”에 상세히 나와 있다. 실제로 알렉스 존스는 자신의 분노와 추측성 폭언의 대상으로 ‘트랜스휴먼(초인류) 글로벌리스트’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 글에서 필자는 “존스는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거짓과 근거 없는 음모로 가득 찬 그의 부주의하고 분노에 찬 연설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기독교인 여러분, 양의 탈을 쓴 늑대를 조심하라.”라고 적었다.

트랜스휴머니즘, 음모론적 사고 및 기타 모든 종류의 합리화에 대해 바울은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라고 고린도후서 10:4-6에 적었다.

기독교인은 피해망상이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세속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다. 우리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위험성에 대해 말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부정할 수 없는 희망이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이 맞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몸과 새로운 마음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인간의 몸은 선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지만 동시에 타락하고 저주받았다는 긴장 속에서 살아간다.

“육체”는 우리 몸을 타락으로 이끄는 영적 실체이다(갈 5:19-21). 우리의 영, 혼, 육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실질적인 의미에서 우리란 우리의 몸이다. 프레스턴 스프링클 박사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지적하듯이, 바울은 “몸”을 “당신”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해서 우리의 육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6:12). 우리가 몸에 죄를 지으면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죄는 또한 우리 몸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우리 고유의 정체성은 지키면서 동시에 새 마음, 새 영혼, 새 동기, 새 정신, 새 육체를 가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뿐이다. 감사하게도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정확히 그렇게 하실 것이다.

죽음과 육체의 연약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는 실패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멸하실 “마지막 원수”는 죽음이다(고전 15:26). 고린도 교회에서 일부 사람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의심했을 때 바울은 강력하게 반박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14절). 우리가 이 땅에서 성화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영광스러운 몸을 위한 “씨”를 뿌린다 (37-38절).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5:17)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옛것으로부터 지으신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고후 5:18-20)가 된다.

썩을 몸과 썩지 않는 몸에 대한 바울의 말은 길게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질병과 허물로 늙고 약해진 육신을 떨쳐버릴 때 우리는 그 대가로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답고 값진 속량함을 받는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42-58).

팍스 로마나나 세속적 트랜스휴머니즘에 맞서 새 몸과 새 마음을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고 말한다. 그리스어에서 “변화를 받아”라는 동사의 시제는 지속적이고 현재 진행형인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인류의 미래를 안다: 죽임당한 어린 양은 죄악된 도시의 상징인 바빌론을 정복하고 용을 멸망시킬 것이다. 영적 전쟁이 종결되고(승리는 확실하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는 기뻐할 것이다. 또 다른 세상 이데올로기에 직면하여 우리는 희망을 갖고 외칠 수 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계 22:20-21).

우리는 인간의 발명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기초한 미래에 대한 강력하고 견고한 소망이 있기에 자신 있게 사랑과 은혜, 그리고 모두를 위한 진리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자.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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