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보는 이슬람(67)
6.25전쟁 이전의 한·터키 관계
터키는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기준으로 유럽과 아시아로 나눠진다. 지중해의 꽃, 동양과 서양을 잇는 다리, 역사의 성지 등 터키를 수식하는 말도 여러 가지다.
오늘날 터키 국민은 그들의 조상이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여 서쪽으로 이동해 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16개 군주국이 흥망을 거듭하여 터키인들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기 10세기 무렵이었다.
대체로 중세에 아랍 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터키인 대부분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였으며 아랍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터키 국민은 오늘날까지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자연 숭배 사상과 풍습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우리 민족의 풍습과 유사한 것이 많다.
가령, 터키어는 한국어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하며 문장구성의 순서, 모음조화, 어미 활용 등에 있어서 한글과 같은 원칙을 따르고 있다. 터키는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하여 서부지역으로 이동을 거듭한 역사가 있어서 한국사처럼 영토와 민족이 거의 일치하는 경우와는 달리, 영토의 역사와 민족의 역사가 별개인 역사를 가진다. 그러므로, 튀르크 민족은 민족사가 역사의 중심으로 강조되며, 동시에 현재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영토의 역사도 함께 고려된다.
민족사는 아시아 전역과 유럽을 거쳐 온 전형적인 민족의 역사이며, 영토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오리엔트, 그리스-로마, 초기 기독교, 비잔틴, 이슬람 등 13개 문명이 모두 거쳐 간 인류문명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아놀드 토인비 같은 역사학자는 터키를 두고 인류문명의 살아있는 옥외박물관이라 칭송했다.
화려한 오스만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을 아주 높게 두고 있는 편이며,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해서도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터키는 우리말과 비슷한 점이 많을 뿐 아니라, 음식, 문화, 습성, 국민 정서, 그리고, 몽고점이 있는 것까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다.
터키라는 국가를 말하면 우리는 흔히 이스탄불, 지중해의 나라, 형제의 나라 등의 수식어를 연상하지만 정작 터키가 왜 형제의 나라로 불리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 그러면, 과거 고대의 역사에서부터 터키와 한국은 어떤 역사적 관계가 있었는지를 알아보자.
고대사에서부터 터키와 우리나라와의 관계
1) 선사 시대: 흉노와 한민족
터키는 BC 2,000년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였으며, 터키의 역사는 흉노(BC4~1세기)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흉노족으로, 중국 사람들은 기원전 220년에 수립된 ‘테오만 야부그’ 왕국을 흉노로 불렀다. 흉노는 다양한 부족 연합체의 성격이었지만 지배 부족은 튀르크로 확인되고 있다. 튀르크 민족의 고향은 중앙아시아이다. 고대 동양의 역사서에서 ‘돌궐’이라 칭했던 민족이 바로 오늘날 튀르크 민족들의 직계 조상이다. 튀르크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바로 ‘돌궐’이다.
그러므로, 흉노는 돌궐의 조상 격이며 중국이나 한반도에 철기문화를 전해준 민족이며 종종 중국의 진시황제를 괴롭혀 만리장성을 쌓게 했던 장본인들이다. 흉노족 이전의 조상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흉노는 중국과 오랫동안 협력과 전쟁을 반복하다가 기원전 1세기경 쇠퇴한 후 서진하여 여러 작은 부족 연합체를 구성하다가 4세기 말경 유럽에 등장하는 훈(Hun)족으로 성장하였다. 유럽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과 흉노족은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 삼국과 북방 민족
우리 민족과 튀르크 민족의 조상은 언어학적으로 우리말과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의 알타이어계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 민족도 그 기원이 북방 기마민족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함께 생활했던 이웃이었다.
2) 삼국 시대: 돌궐 제국과 고구려
현재 터키족의 직접적인 조상은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돌궐(6~8세기)이다. 돌궐은 중국이 삼국 시대를 거쳐 다시 분열되어 위진남북조 시대에 들어가자 그 혼란기를 틈타 세력을 모은 후 6세기부터 역사 전면에 등장하였다. 돌궐은 ‘톤유크’라는 사람이 중앙아시아 ‘소그드’어 계통의 문자를 만들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고대 터키어로 기록된 돌궐 비문을 몽골 오르혼강, 남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상류 및 서북 몽골 지방 등에 세울 만큼 발전된 문화를 갖고 있었다.
돌궐은 이후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여 새로운 패자로 등극한 수나라와 대결하게 되었다. 돌궐은 세력 확장을 꾀하는 수나라와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미 삼국 시대부터 우리 민족과 터키 민족의 전통적인 외교관계는 시작된 것이다. 돌궐과 고구려의 관계는 단순한 외교관계에 의한 우방이 아니라 중국을 대상으로 하여 이와 잇몸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돌궐의 왕 ‘무칸’이 572년에 사망하자 고구려가 돌궐에 조문 사절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오르혼강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돌궐이 지배했던 중앙아시아의 고분 벽화에도 고구려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어 양국 간의 교류가 깊었음을 말해준다.
수나라의 양제는 중국을 통일하자 주변국들을 점령해 동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수나라는 역사적으로 항상 중국 북방을 위협했던 돌궐을 정복해 실크로드를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지만, 돌궐과의 우호국인 고구려로 인해 여의찮은 상황이었다. 수 양제는 돌궐보다 약한 고구려를 먼지 치기로 결심하고 612년에 군사를 일으켰지만, 살수대첩에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하여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도 돌궐과 고구려의 연합관계에 항상 신경을 썼다. 당나라 최전성기를 이룩한 태종이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후 돌궐마저 위협하였다. 고구려는 이후 유민들이 말갈족의 협력을 얻어 발해를 건국하였다.
돌궐은 비록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지만, 역사상 최초로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역을 통일하며 대제국을 건설했고, 자신들의 문자를 소유하며 수준 높은 문화도 발전시켰다.
3) 삼국 시대–후삼국시대: 튀르크족의 이슬람화와 한민족과의 관계 단절
돌궐이 멸망하자 그 후 튀르크계 민족인 위구르족이 역사에 등장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중국과 다툼을 벌이던 튀르크계 민족들의 일부는 점차 서쪽으로의 이동을 시작했다. 물론 과거 흉노족들이 서쪽으로 이주해 훈(Hun)이라는 제국을 건설해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바 있지만, 이들의 서부 이동은 세계 판도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튀르크계 민족의 서부 이동은 자연 한민족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위구르는 허약해진 당나라에 군사 원조를 해주는 대신 안정적으로 실크로드를 장악하며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그들은 이란계 민족인 소그드족의 영향을 받아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고 역시 소그드 문자의 영향으로 위구르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들은 서쪽으로 이주하면서 7세기부터 중동에서 발생한 신흥 문명 이슬람과 접하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당나라와 아랍 이슬람의 아바스 제국이 충돌한 탈라스 전쟁에서 당나라가 패함으로써 중앙아시아는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점차 이슬람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유목 민족들이 하나하나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슬람은 중국 서부 접경지역까지 진출했다. 이 무렵 중국인들은 이슬람과 관련된 모든 언어에 ‘회’자를 붙여 표기했다. 즉, 회교는 이슬람, 회인은 무슬림, 회력은 이슬람역인 해지라 등이었다. 우리말에도 파생된 회자 돌림 언어들의 기원은 바로 위구르족이었다.
4) 고려 시대: 튀르크–위그르족과 고려
우리 민족과 튀르크 민족은 외교관계로만 우방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고려말부터는 직접적인 접촉 관계에 들어갔다. 그것은 중앙아시아 유목 민족들 가운데 새로 등장한 몽골족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가능해졌다. 튀르크-위구르족은 몽골의 세계정복에 초반부터 적극 참여함으로써 제국 건설 후에는 소위 ‘색목인’의 상류층에 들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 민족은 고려 말기에 몽골의 침략을 받아 결국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몽골의 관습과 문화가 한반도에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고, 이에 편승해 수많은 튀르크-위구르족들도 한반도에 들어와 자신들의 배경을 바탕으로 권력과 부를 누렸다.
이들은 이미 이슬람을 믿었기 때문에 ‘회회인’으로 통했고, 고려 가요 중의 쌍화점에 ‘회회 아비’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당시 몽골은 고려의 왕세자를 인질로 데려다가 몽골 관습대로 키웠으며 몽골 공주와 결혼시켜 고려로 돌려보냈다.
원나라 공주가 고려 충렬왕의 왕비로 시집가게 되자 많은 시종이 딸려 보내졌고, 그 시종 중 상당수가 튀르크-위구르 출신이었다. 그중 위구르 출신인 ‘삼가’라는 인물이 고려의 풍수에 반해 충렬왕에게 귀화를 간청했으며, 충렬왕이 이를 받아들여 고려 여인과 결혼시켜 ‘덕수’ 장이라는 성을 하사해 ‘장순룡’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5) 고려 말–조선 초기: 튀르크–위그르족
몽골 원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에는 명나라가 들어섰다. 한반도는 새로운 왕조 조선이 건국되어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또다시 명나라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튀르크-위구르족은 후원자였던 원나라가 멸망했지만, 여전히 한반도에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공동체를 유지하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이슬람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그들을 ‘회회 무리’라고 불렀다. 그들은 ‘예궁’이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종교의식을 치렀으니 이것이 역사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모스크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들은 조정에 나와 왕을 알현하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며 꾸란을 낭송했다고 한다. 특히, 세종은 이를 즐겨 ‘회회 조회’라는 이름으로 정례화했으며, 이들의 축원 의식을 ‘회회 송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조선이 유교문화가 정착되자, 1427년 이들의 복장과 관습, 종교를 금지하는 법령이 결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몽골 시대 한반도에 진출한 튀르크 민족들은 그 후 우리 민족과 결혼해 피가 섞이고, 관습과 의식에 동화되어 그들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6) 조선시대: 관계의 단절 시기, 오스만 튀르크의 영광
조선의 유교 이념은 중국 이외의 문물 유입을 철저히 거부했다. 따라서 조선 초기를 제외한 조선시대 대부분은 우리 민족과 튀르크 민족의 교류는 완전히 단절된 시기였다.
한때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수많은 대제국을 건설하며 중국을 지배하고 때로는 침략으로 괴롭히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민족들은 과거의 영광을 잃고 초원으로 돌아가 유목 생활을 하며 소규모의 도시국가들을 형성한 채 역사에서 잊혀 갔다.
그러나, 튀르크 민족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활동무대를 서부로 옮겨간 것이다. 10세기경부터 대규모로 이슬람을 받아들인 튀르크 민족은 이슬람 세계의 발전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용병으로 이슬람 세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지배 세력으로 탈바꿈해 셀주크 튀르크와 오스만 튀르크 제국뿐 아니라 칭기즈칸의 세계 정벌을 유발했던 하라즘샤 제국, 페르시아 문학을 세계문학 반열에 올려놓았던 가즈나 제국, 몽골 침략을 유일하게 격퇴했던 이집트의 맘루크 제국, 중앙아시아, 인도, 중동,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티무르 제국 등 수많은 제국을 건설하며 이슬람 세계의 후원자이며 수호자가 되었다.
특히, 셀주크 튀르크 제국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기독교 성지순례를 방해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을 유발했으며,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유럽까지 진출하여 로마제국의 후손이었던 비잔틴을 멸망시켜 로마역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아프리카-아시아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해 유럽인들의 가슴을 항상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셀주크 튀르크 제국의 한 유력한 가문인 오스만이 ‘부르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비잔틴을 공략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했고, 결국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3대륙에 걸친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다.
오스만 제국의 기본 정신은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다원적 융합이었다. 지금도 이스탄불에는 많은 수의 유대계 터키 시민들이 살고 있으며, 이들이 터키 최대 일간이 휴리예트, 와코, 알라르코, 프로필로 등 굴지의 재벌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은 조선과 건국-멸망 시기가 거의 비슷한 1299년~1923년까지 존재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패전한 후 전성기의 기운이 꺾였으며, 그 이후 약 200년에 걸쳐 유럽의 끈질긴 공격과 영토 침탈로 국력이 크게 약화하였다.
결정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에 가담한 러시아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과 손잡고 추축국을 형성하여 패배함으로써 대제국은 붕괴하고 말았다. 따라서, 전통적인 우방이자 혈맹이었던 튀르크 민족은 조선시대 저 멀리 서쪽 유럽지역으로 이주하여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과는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7) 일제강점기: 불행한 관계, 타타르와 한민족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의 절박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아타튀르크(튀르크인의 아버지라는 뜻, 본명 무스타파 케말)가 1918년~1923년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연합군이 점령한 아나톨리아 반도 상당 부분을 회복하였고, 1923년 비로소 600년 왕정을 폐지하고 터키공화국을 건국하였다.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의 틈바구니에 두 민족은 불행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에 남아 소규모의 도시국가를 형성하며 유목 생활을 하던 튀르크 민족들은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처럼 18세기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남진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가혹한 탄압을 받아 일본과 우방국이 되었다. 서구제국주의 열강이 발호하던 시기에 두 민족 간의 특수한 관계가 조성된 것이다.
오스만 제국과 일본 간에는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아주 긴밀한 외교적 접촉이 있었으며, 1905년 러·일전쟁 때는 오스만 함대를 파견하는 등 러시아에 대항해 공동전선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오스만 제국의 밀사 압둘라시드 이브라힘이 1909년경 조선을 방문하여 당시 사정을 소상히 밝힌 조선 보고서가 출간되기도 하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의 조선 침략 실태, 조선 관리들의 무능함, 그리고 조선의 문화 등 다양한 면을 소개하고 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에 관한 관심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고,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불안을 느낀 튀르크계 타타르 민족의 일부가 일본의 중재로 한반도로 이주해 들어오기도 시작했다.
*러·일전쟁의 모습
한반도에 유입된 튀르크계 타타르 민족들은 주로 무역에 종사하거나 양복점이나 포목점을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일본 조선총독부의 특혜와 안정적인 수입을 바탕으로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았다.
특히, 이들은 서구로부터 배워온 양복 기술을 바탕으로 을지로와 소공동에서 해방 직후까지 양복 문화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들은 공동체 내에 학교나 모스크 시설이 있는 문화회관을 갖고 있었고 서울 근교에 공동묘지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비호를 받아왔던 이들은 해방 후 우리 민족의 따가운 눈총과 국제정세에 불안을 느끼고 터키, 호주, 캐나다 등지로 떠나고 말았다.
한편, 터키와 소련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국력이 쇠진하고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상호 우호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25년에는 우호 불가침조약까지 체결하였다. 1923년 터키공화국을 건국한 튀르크 민족은 아타튀르크 파샤의 영도 하에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하며 근대화에 착수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을 지키며 세계정세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전 말기 소련이 우호 불가침조약을 파기함에 따라 상호 대립하게 되었다.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국립 이스탄불대 역사학과 석사, 박사,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터키어권선교회(FOT)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전방개척선교(KJFM)’ 저널 편집인, 아신대(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1)무슬림 이해하기’ / (2022, 라비사북스). ‘벌거벗은 세계사(경제편)’/ (2023,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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