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기독교(31)
뉴에이지의 낙관주의적 세계관은 일견 세상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 같지만, 이것은 크나 큰 착각이다. 이미 인류는 과거에 그렇게 세상을 낙관하며 바라보다가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다. 잠시 평화로워 보이는 이 세계는 반드시 전쟁, 기근, 자연재해, 환경오염, 그리고 인간의 죄악 때문에 대재앙에 빠지는 날이 올 것인데, 그 조짐은 이미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조짐은 사실 성경 요한계시록에 예언돼 있는 내용이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을 끝없이 추구하는 현상에 대해 성공회 신부이자 신학자인 앨리스터 맥그래스는[1] 이렇게 말한다.
서구에서, 특히 미국에서는 일종의 ‘문화적 펠라기아니즘’이[2] 우위를 차지해왔다. (중략) 비평가들은 이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세계관이 인간 본성의 비극적인 측면 및 명백한 약점과 실패를 간과한다고 지적했다. 펠라기아니즘을 파헤쳐 보면 그것은 망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믿고 싶은 망상이다.[3]
린위탕은 맥그래스가 말한 펠라기아니즘에 푹 빠진 인물이다. 그가 인간의 부족함과 죄성까지도 ‘인간적이라 좋다’는 식으로 말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이다. 성경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결코 긍정하지 않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한다(로마서 3장 10절). 인간은 어미의 태에서부터 이미 죄성을 지닌 존재로 삶을 시작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인간을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근거 없는 기대를 갖는 것은 기독교의 사상과 배치된다. 기독교는 나 자신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예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그 기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사상을 배격하는 린위탕의 행복 개념을 보라.
인생을 즐기는 일 이외에 인생에게 무슨 목적이 있으랴. 모든 이교도의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큰 문제로 제기되는 이 행복론을, 기묘하게도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전혀 등한시하고 있다.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큰 문제는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 아픈 질책이나 인류의 ‘구원’이라는 문제다.[4]
말년에 기독교 신앙으로 다시 돌아온 것으로 알려진 린위탕은 죄와 구원이라는 사상에 대한 반발심으로 평생 동안 교회를 떠난 것이라고 회고하였다. 죄에 대한 인간의 끌림과 죄를 지적하는 성경에 대한 인간의 반발은 전적으로 본능적인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죄인임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죄인의 궁극적인 증거는 그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성 어거스틴은 “최선의 지식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을 인정하지 않은 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의 공통적인 모습인데, 대문호 톨스토이 역시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론을 주장하였다.
행복이란 간단하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진실한 삶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삶에 대한 깨달음은 모든 것의 기초며 시작이다. 삶에 대한 깨달음이 바로 하나님이다.[5]
많은 사람들이 톨스토이가 기독교적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다른 사상들이 비기독교적이듯이, 톨스토이의 행복론 역시 결코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성경은 ‘자아’ 또는 ‘깨달음’ 같은 것을 행복이라 말하지 않는다. 톨스토이가 말하는 행복은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내면의 안식과 확신에서 비롯되는 그 무엇인데, 이것은 뉴에이지가 말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반드시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며, 이 행복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것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 완성된 행복은 예수 안에서 만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누리게 된다.[6] 같은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과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행복은 성취해가는 것이 아니라 부여받는 것이라는 개념은 대개의 사람에게는 어색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비기독교인은 물론 기독교인 가운데도 늘 있어왔다. “포세이돈 어드벤처”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스콧 목사가 바로 그러했다.[7]
1400명의 승객을 태우고 뉴욕을 출발한 초호화 여객선이 예기치 못한 해저 지진 때문에 침몰하고 말았다. 마침 그 안에 있었던 스콧 목사는 평소에 “인생은 쟁취하는 자의 것이고, 우리 스스로 말고는 아무도 우리를 도울 자가 없다”고 말하던 사람이다. 승객 대부분이 죽고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 생존자들이 온갖 고생 끝에 마지막 죽느냐, 사느냐의 순간을 맞이했는데 그만 뜨거운 수증기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 막았다. 어서 증기 밸브를 돌려서 사람들을 살려내야 하는데 이때 바로 스콧 목사가 자신을 희생한다. 고열로 달궈진 밸브를 온 힘을 다해 돌리면서 그 목사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외친다. “무엇을 더 원합니까? 여기까지 올 동안 당신 도움 받은 적 없어요. 우리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겁니다. 얼마나 더 죽어야 합니까? 얼마나 더 목숨이 필요합니까? 당신에게 생명이 더 필요하다면 나를 데려가십시오.” 결국 밸브를 돌려 사람들을 살려냈지만 그는 힘이 빠져 익사하고 만다.[8]
여기서 우리는 스콧 목사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하나는, 실천하는 신념이다. 그는 가장 필요한 순간에 자신을 희생했다. 목숨을 다하기까지 그는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다 해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다. 그의 말처럼, 정말로 그 생존자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게 된 것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살아남게 된 것일까? 인생은 과연 쟁취하는 자의 것일까? 세상에서는 이런 식의 사상을 가진 목사가 인기를 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스콧 목사는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남은 것조차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이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구절로 오해하고 있는 유명한 금언(金言)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자력 구원을 강조하는 이 문구는 성경에서 나온 구절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먼저 고난과 역경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생의 행복과 구원과 안식을 그렇게 쟁취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다.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 인간이 해야 할 몫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고 인내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믿는다는 개념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개념이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인물 가운데는 성경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인물이 많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바로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예수)가 가르친 형태 그대로를 가지고 그 사랑의 종교를 오늘날 우리들의 종교로 삼을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현대의 세계관 속에 도입시켜야 한다. (중략) 이제 우리는 예수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나타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우리 마음속에서, 그리고 세계 속에서 예수의 정신력에 의해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9]
슈바이처는 예수의 사랑에 감동되어 한평생 예수처럼 살 것을 다짐하고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그가 의학을 공부하고 또 신학을 공부한 것도 모두 예수의 사상을 더 잘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있어 예수는, 특히 산상수훈에서 보여준 것처럼, 종말론적인 사랑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슈바이처가 비록 그 극단적인 사랑에 감복하기는 했지만, 아직 종말이 아니므로 도저히 그런 식의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현대의 가치관에 맞게 그 ‘사랑의 종교’를 각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가 초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정신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슈바이처가 성경적인 하나님 나라 개념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의 예수 인식은 그저 세상적인 인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인 예수처럼 우리들도 이 세계에 정신적 유토피아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상이 바로 뉴에이지다. 슈바이처가 뉴에이지 사상을 알지 못했을지라도 그는 이미 스스로 뉴에이지적인 사상가로 살았던 인물이다.
[1] 북아일랜드 태생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분자생물학 박사학위와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리차드 도킨스가 쓴 무신론 서적 『만들어진 신』을 반박하는 『도킨스의 망상-만들어진 신이 외면한 진리』라는 책을 썼다.
[2] Pelagianism, 펠라기우스주의, 영국의 수도사이자 철학자였던 펠라기우스의 사상으로서 원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부인함으로써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3] 앨리스터 맥그래스, 『고난이 묻다, 신학이 답하다』, 국제제자훈련원, 115-116쪽
[4] 임어당, 『생활의 발견』, 학원사, 100쪽
[5] 레프 톨스토이, 『톨스토이 성경』, 작가정신, 15쪽
[6] 물론 이 세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은 천국을 미리 맛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천국, 구원, 행복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7] 1970년대 재난 영화 붐의 원조가 된 영화다. 진 해크만이 스콧 목사 역을 맡았다. 원작은 소설이다.
[8]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이 영화는 내가 중학교 2학년일 때 TV에서 방송됐다. 당시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내 담임 선생님이 그 영화를 본 후 감동을 받고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억난다. “내가 만약 교회를 다닌다면 그런 목사님이 있는 교회를 다니고 싶다.”
[9] 슈바이처, 『나의 생활과 사색에서』(-나의 생애와 사상), 일신서적공사, 58-59쪽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눈먼 기독교>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박태양 목사 | 중앙대 졸. LG애드에서 5년 근무. 총신신대원(목회학), 풀러신대원(선교학 석사) 졸업. 충현교회 전도사, 사랑의교회 부목사, 개명교회 담임목사로 총 18년간 목회를 했다. 현재는 (사)복음과도시 사무총장으로서 소속 단체인 TGC코리아 대표와 공동체성경읽기 교회연합회 대표로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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